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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16 : 발해의 역사 19 (발해의 요동 지배여부에 대한 재검토)

두바퀴인생 2011. 4. 18. 03:40

 

 

한국의 역사 216 : 발해의 역사 19 (발해의 요동 지배여부에 대한 재검토)

 

  

발해의 요동 지배여부에 대한 재검토

 

역사에서 잊혀졌던 발해에 처음 주목하였던 사람은 조선후기 실학자나 근대적인 역사방법론으로 발해사를 주도했던 만선사학자, 그리고 민국시대 중국의 사가들은 요동이 발해의 영역이었는지에 대해 모두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료 부족을 근거로 부정적이었다. 그렇지만 1980년대 이후 요동역역설에 긍정적인 견해가 점차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은 일단 발해사 연구가 한계에 다다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종래 간과되거나 소홀히 취급되었던 사료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하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발해의 요동 경략설은 종래 의문시 되어 오던 요사 지리지를 포함하여 관련 사료에 대한 충분한 비판없이 그대로 취신하는 경향이 짙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 점은 오히려 발해사의 실상을 왜곡할 소지가 적지 않다. 그래서 관련 사료를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먼저 9세기 중반에 발해와 일본간의 국서에 등장하는 요양이라는 표현을 살펴보자.

 

'속일본후기'를 보면 발해 중대성이 일본 태정관에게 보내는 국서와 , 일본 국왕이 발해 국왕에게 보낸 국서에는 '일역'과 '요양'이라며 각각 일본과 발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나온다. 이를 근거로 요동이 발해 영역인 것처럼 기록한 요서 지리지 기사와 곧바로 연결시켜 이 무렵에 발해는 요양에 도읍을 두었다는 주장이 일찍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곧바로 철회되었는데, 당대에 사용된 요양의 개념에는 요서만 가리키는 협의의 개념과 요동까지 가리키는 광의의 의미가 있으며, 광의의 요양은 광의의 요동과 같은 개념이므로 양국의 국서에 사용된 요양은 발해국 자체를 의미하며, 구체적인 지명으로서 현재의 요양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료는 발해의 요동영역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계속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일역'이 당시 일본의 도성 소재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요양' 역시 발해의 도성이 있던 구체적 지명으로 볼 수는 없다.

 

다음으로 사료적 가치에 문제가 많은 요사 지리지를 비롯한 후대의 사료를 살펴보자.

 

요사에 의하면 동경 요양부에 대한 역사적 연원이 나오는데,  각종 사료를 뒤섞어 놓아 오류가 적지 않다.

 

첯째, '요양은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던 곳이며, 당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고 하는 부분은 668년 평양에 설치된 안동도호부가 676년 요동성으로 이동한 사실을 뒤섞어 놓은 것이다.

 

둘째, '왕호를 참칭하고 연호를 바꾸었으며 궁궐을 세우고 5경 15부 62주를 설치했다'고 하는 부분은 대이진 대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이미 그 전에 무왕대에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발해의 왕계가 대이진까지 이어졌음을 설명하고 뒤이어 발해 전성기의 모습을 서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셋째, 이러한 혼란의 결정판은 끝부분의 홀한주=평양성=중경 현덕부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거란이 발해 후반기의 수도였던 홀한성을 함락하고 동란국(동단국)을 세웠다가 그 주민을 동경 요양부로 강제 이주시킨 사실과 처음 평양에 설치된 안동도호부가 요동성(후대 동경 요양부)으로 이동한 사실, 그리고 한때 중경 현덕부가 발해의 수도였던 사실을 뒤섞어 놓은  것이다.

 

이처럼 사료적 오류가 많은 기록임을 감안할 때 발해가 요동을 지배했다는 결정적인 근거를 찿을 수가 없다.

 

다음에는 거란이 발해의 영역인 요동을 차지하기 위해 수십년간 격돌을 벌였다는 거란측 기록을 살펴보자.

 

'거란국지'와 왕적의 '요동행부지'에 보면 거란의 아율아보기가 20년 혹은 수십년 싸운 끝에 비로소 발해의 옛 땅인 동경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표현은 거란의 요동 진출 및 발해와의 충돌 과정과 비교적 일치함으로, 발해가 최소한 후기에 요동을 차지하였다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되었다.  요서는 요 말기에 기록된 것이며 요동행부지는 1190년 제점요동로형옥에 임명된 왕적이 견문한 기록이다. 이 사료는 요의 멸망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시점에 작성되었으므로, 여기서는 요대의 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거란이 발해와 20년 동안 싸웠다는  표현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사료상 거란과 발해가 충돌한 것은 924년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율아보기가 처음 가한에 오른 것이 906년으로 이때부터 발해의 멸망까지는 20년이 된다. 발해 멸망이 아율아보기의 마지막 유업에 해당된다고 보면, 20년 운운은 그의 평생 업적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발해 멸망 후 동경을 세웠다는 부분도 중간의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즉 발해 멸망 후 동란국(동단국)을 세운 것은 아율아보기지만, 태종이 그 주민을 요양으로 이주시켜 남경이라 불렀다가 938년 동경으로 고쳤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거란국기 사서에는 1116년 동경에서 일어난 발해 유민 고영창의 반란 기사 일부분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발해 멸망이 아율아보기의 마지막 위업이며 그 결과 발해 유민을 집단적으로 동경으로 이주시켰으므로 , 이곳에서 일어난 반란은 반드시 진압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동경이 발해와 등치되는 표현을 통해 곧바로 동경이 발해의 영역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리적 오류가 뒤섞인 기사는 다른 데서도 보이는데, 동경이 발해의 수도였다거나, 발해의 부여성이 동경이라는 표현 등이 그것이다.

 

'자치통감'과 '구오대사' 사서에 의하면 거란이 발해의 요동을 공격하는 동시에 후당의 유주 방면도 공격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 기록은 거란국지나 구오대사 거란전 등에도 똑같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 거란이 발해를 공격한 것은 924년 5월 거란이 하북 지역민들을 요주 지역으로 이주시키자 발해가 공격한 사건에 대한 반격이다.  요주는 요서 지역에 위치한 지금의 요녕성 신민시 요빈탑으로 비정되는데, 거란의 반격 역시 이 지역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거란이 공격하였다는 요동은 협의의 요동, 즉 흔하 이남의 요동반도에 해당되지 않는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후당 조정은 거란의 발해 공격 사실을 유주의 보고를 통해 접하였다. 곧바로 거란이 후당의 북방을 공격하자, 그 이유가 발해와 후당을 동시에 공격함으로써 양자의 밀착을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파악하였기 때문에 두 가지 사건을 함께 기록하였다. 이때 발해가 거란의 배후에 있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발해의 요동이라는 표현이 삽입된 것이 아닐까 판단된다. 여기서 말하는 요동 역시 광의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