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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23 : 발해의 역사 26 (발해의 역사 종합 2) 본문
한국의 역사 223: 발해의 역사 26 (발해의 역사 종합 2)
문왕 초기에도 발해의 영역 확장은 지속되어 741년 무렵 불녈.월희.철리말갈 등이 복속되었다. 다음 과제인 흑수말갈의 복속을 위해 발해는 756년 무렵에는 현주에서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그 결과 당의 평로절도사의 관할 범위에서 흑수말갈이 제외되었다. 762년 문왕이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승진 책봉되었던 것은 당시 안사의 난과 관련하여 당이 발해를 중시하였던 데서 나온 것이지만, 결국 발해의 국력 신장을 반영하는 조치였다.
상경 천도 이후 문왕은 확장된 영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체제정비에 나섰다. 발해는 대당관계 개선 이후 활발하게 당의 문물제도를 수입하였다. 특히 당례와 율령을 수입한 사실은 발해가 율령적 정치이념을 모범으로 체제를 정비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정당성.사빈시 등 중앙 통치기구나 도독.자사등 지방관의 명칭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율령적 정치이념을 모범으로 하는 지배체제의 정비는 그 목적이 왕을 통치의 정점으로 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 기구를 통해 백성을 직접 지배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왕권도 궤를 같이하여 강화하여 나갔다. 이러한 추세는 774년 대흥에서 보력으로 연호를 바꾼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발해의 세력권에 포함된 지방의 유력자인 수령에게도 도독.자사 등을 제수하여 중앙의 지배체제에 수용하였다. 8세기 중반 천황제 국가를 표방한 일본과 외교적 갈등이 발생했던 것은 발해 또한 고양된 왕권 의식을 대외적으로 과시한 결과였다.
한편 대일외교에서 철리말갈이 독자성을 표출한 사건은 발해의 지배통합 전략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이후 동경으로 천도하고 연호도 다시 대흥으로 복구되었다는 것은 체제정비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건국집단 출신의 기득권 세력이 반발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지지를 받아 793년 대원의가 즉위하였다. 한마디로 반정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문왕대 체제정비를 주도한 친당파 출신들인 국인 세력들이 다시 모반하여 대원의와 추종세력들을 죽이고 문왕의 적손 대화여를 성왕으로 추대함과 동시에 수도를 다시 상경으로 환도하였다. 그러나 성왕도 곧바로 사망하였듯이 두 세력간의 권력투쟁으로 발해는 793년부터 818년까지 25년간 6왕이 단기간 재위하는 격심한 내분기에 처하게 된다.
발해의 내분기는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후손인 선왕 대인수가 즉위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로부터 대이진대까지 발행는 당의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내분기의 권력투쟁은 결국 국인 세력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선왕은 818년 즉위 직후 내부 모순을 해소하고 내분기에 이탈의 조집을 보이던 말갈제부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북방으로 영역을 확장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무렵 당은 발해 국왕에 대한 책봉호를 강등과 승진을 되풀이함으로써 발해를 통제 내지 회유하였다. 그러나 신라 국왕에게 당은 발해에 대한 독자적인 군사권을 포함하여 고위 관작을 일관되게 제수하였다. 책봉호를 통해 볼 때 발해와 당은 잠재적인 대립관계에 있었다. 또한 선왕은 대일외교에서 사신 파견 시점을 늦춤으로써 발해 사신은 예전과 달리 일본의 하정(賀正) 의식에 불참하였다. 이로써 일본이 발해를 조공국으로 간주하는 소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선왕의 뒤를 이은 대이진은 지배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유년칭원법의 사용, 학생의 파견, 당의 문물제도를 통한 통치체제의 확립 등에서 그 면모가 확인된다. 이 시기 발해는 3성 6부 등 중앙정치기구와 5경 15부 62주 등 지방통치체제를 완비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당의 율령제하의 그것과 거의 흡사하기 때문에 당시 발해의 정국을 주도한 국인세력은 당의 율령제를 모범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지배체제가 문왕대보다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지배체제가 강화되는 모습은 상경성의 구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상경은 756년 무렵 처음 천도하였을 때의 규모는 중경이나 동경과 비슷하였다. 그러나 선왕과 대이진 시대에는 이미 현재 발굴된 상태와 같은 규모로 확장되었고 내부 구조도 당의 장안성을 그대로 모방하였다. 상경성이 모방한 당의 장안성은 황제가 남면(南面)하는 구조로, 모든 행정기관은 모두 궁성 남쪽의 황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성의 거주지로 대규모 이방을 설치하였는데, 백성은 외성 밖에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도시 구조의 목적은 주민통제에 있었다. 따라서 이 무렵 발해에서도 방리제(坊里制)에 입각한 도성제(都城制)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9세기에 해동성국을 구가하던 발해는 10세기초 당의 쇠퇴를 틈타 급속히 성장한 거란의 일격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에 앞서 거란이 처음 진출한 요동 지역은 이전까지 발해와 당 사이에 완충지대로서 기능하였다. 즉 요동 지역은 발해와 당의 긴장관계를 해소시키고 발해가 동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며 발전하는 데 일정한 방파제 역활을 하였던 것이다.
10세기초 거란은 처음 시라무렌을 따라 요하 상류로 진출하였다. 이쪽에는 일찍부터 발해가 부여부를 설치하고 경병을 주둔시켜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따라서 거란은 동남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이때 발해는 완충지대에 접근하는 거란에 대한 대비로 후량.후당 등에 여러번 사신을 파견하는 한편 남쪽의 신라 및 고려 등과 외교관계도 맺었다. 그러나 거란이 요동 지역을 영역해 나가자 적극적인 공세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발해는 요동 방면의 전선에 집중하였고 거란은 이러한 틈을 이용하여 다시 동북쪽으로 군대를 우회하여 1,000여 리를 9일만에 주파하여 발해의 부여부를 급습하여 3일만에 함락시키고, 발해의 지원군 3만이 달려왔으나 싸우지도 않고 발해 지원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곧바로 수도까지 진격하여 함락시켜 버렸다.
이 과정에서 발해는 거란에 사신을 단 한 차례밖에 보내지 않았을 만큼 거란의 동향에 무관심하였다. 다른 한편 당이 신라를 통해 발해를 견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발해가 신라와도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거란의 위협이 현실화되자 신라와 군사적 원조관계를 맺었지만, 발해는 기본적으로 후량. 후당 등과의 외교를 우선시하였던 것이었다.
결국 발해는 기본적으로 당과 잠재적인 대립관계에 있으면서도 당 중심의 세계질서의 변화에 매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10세기초 거란의 등장에 따른 국제정세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당 일변도의 외교정책에서 탈피하지 못하였고 거란의 위협에도 능동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거란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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