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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13 : 발해의 역사 16 (제10대 선왕 대인수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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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13 : 발해의 역사 16 (제10대 선왕 대인수 2)

두바퀴인생 2011. 4. 15. 07:56

 

 

 

한국의 역사 213 : 발해의 역사 16 (제10대 선왕 대인수2)

 

 

 

제10대 선왕 대인수 2

 

 

제 10대 선왕(宣王, ?~830년, 재위: 818년~830년)은 발해의 제10대 이며 는 대인수(大仁秀)이다.

 

선왕은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현손(玄孫)이며, 연호는 건흥(建興)이라 하였다.

 

선왕은 발해의 영토를 크케 확장시켰는데, 이때 발해의 영토는 남으로 신라와 접하고, 서로는 소고구려를 합병하여 요동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고구려부여 등의 옛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또한 북쪽의 흑수말갈 등 발해에 대항하던 말갈의 부족들도 복속시켰다.

 

선왕은 발해 중흥의 대업을 이룬 중흥군주(中興君主)로서 이때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당과 밀접한 외교를 하여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여 행정구역을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개편하고 학술을 진흥시키는 등 발해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가족관계

참고

 

 

 

 

 

선왕 대이진의 지배체제 강화

 

선왕은  즉위 이후 적극적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도 당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대일외교에서 군신관계를 강요하는 일본의 요구에 벗어나 경제적 교역으로 나서게 되었다. 선왕대에 강화된 왕권은 왕위 계승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선왕의 뒤를 이은 것은 손자 대이진이다. 문왕 말기에 아들 대굉림이 일찍 죽고 손자 대화여만 남아 있는 상황과 똑 같다. 그러나 왕위 계승에서 방계의 개입없이 대이진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선대에 왕권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선왕대 추진된 정책은 대이진에게도 지속되었다. 지배체제 강화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은 대이진 때에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이 사용된 점이다.

 

신.구당서에 의하면 대이진이 831년 정월에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선왕의 사망 시점은 830년 후반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으로부터 책봉 이전에 대이진이 즉위하고 '함화'로 개원하였다. 발해는 무왕 때부터 '즉위년청원법'을 사용하였다. 841년 12월 일본 장문국에 도착한 발해 사신 하복연 일행이 이듬해 2월 입경하여 일본 조정에 중대성의 첩을 제출하였다. 첩의 작성 시점은 함화 11년 841년으로 함화 원년은 831년이 된다. 즉 대이진은 '유년청원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처럼 발해 대이진이 유년청원법을 사용한 것은 당 목종 대에 보이는 유년청원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유년청원법으로 전환하는 배경에 있는 왕권관과 연호관의 변화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유년청원법은 전왕이 사망한 해의 연말까지 새 왕이 상복을 입는다는 유교적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대이진 이전 즉 선왕은 유교를 비롯한 당의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음을 반영한다. 이와 함께 이 무렵부터 발해는 당에 학생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책부원경, 일본3대실록,신당서에 따르면 833년 정월 발해는 동중서우평장사 고상영과 함께 학생 3인을 당에 파견함과 동시에 앞서 파견된 학생 3인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또한 837년 3월에도 하정사와 함께 학생을 파견하였다.

 

이는 숙위만 파견되던 전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833년에 귀국한 학생 가운데 한 명인 이거정은 860년 후반에 정당성 춘부경의 직위를 가지고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는 당에 파견되어 귀국한 학생이 6부의 장관까지 승진한 것을 보여준다.

 

이런 사례는 발해 후기에도 발견되는데, 872년 당의 빈공과에서 발해의 오소도가 신라의 이동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하여 신라는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26년 후인 906년 빈공과에서 발해의 오광찬이 신라의 최언위보다 밑에 있게 되자, 그의 아버지인 재상 오소도가 과거의 전례를 들어 시정을 요구하였다. 오소도는 872년 빈공과에 응시할 당시에는 학생이었지만, 귀국한 이후에는 재상까지 올랐다. 이처럼 당에 학생으로 파견되엇던 이들이 나중에는 국정의 최고책임자 직위까지 올랐던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거정이나 오소도.오광찬은 발해의 지배층에 속하는 성씨이므로, 당연히 국정의 최고직에 오를 수 잇는 자격 요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는 지배층 가운데서도 재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당에 학생으로 파견되어 문물제도를 익히는 것이 요구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만큼 이 시기에 발해에서는 당의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신당서를 보면 발해가 학생들을 파견하여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마침내 '해동성국'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해동성국의 내용은 5경 15부 62주의 지방 통치제도와 3성 6부 등의 중앙 정치제도의 정비를 의미한다. 이러한제도는 당의 율령제와 거의 흡사히기 때문에 당시 발해의 정국을 주도한 정치세력은 당의 율령제를 모범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잇다. 이는 율령적 정치이념을 모범으로 하는 체제정비가 문왕대보다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832년 무렵 상경성에 좌우신책군(左右信策軍)과 좌우삼군(三軍) 및 120사(司)가 설치되었다는 기록도 이런 측면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시기에는 5경을 중심으로 하는 15부가 62주를 관할하였다. 즉 부의 도독이 주의 자사를 관할하에 두었다는 점은 8세기 전반 도독과 자사가 통속관계가 아니라 촌락의 규모에 따라 구별되었던 점과 대조된다.

 

이처럼 9세기에 발해는 지배체제의 확립을 통해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고 일컬어졋다. 이 시기 대일관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보인다. 첯째 사신으로 문인이 다수 파견되었고, 둘째 대사(大使)의 소속관청이 정당성과 문적원으로 좁혀지고, 관직이 좌윤과 소감으로 한정되었다. 셋째 사신단의 규모가 823년부터 100명 남짓으로 파견되다가 860년부터 105명으로 고정되었다. 넷째 외교 문서로 국왕 명의의 국서와 함께 중대성이 첩을 함께 보낸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대이진에서 대현석 시기에 발해의 문물 제도가 완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발해는 이 시기에 숙신과의 관련성을 중시하였는데, 833년 발해를 방문한 장건장의 묘지 비문 내용을 보면 홀한주 즉 발해의 수도인 상경을 읍루의 옛 땅이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 발해인의 인식을 장건장이 그대로 기술한 것으로 파악된다. 장건장은 귀국 후 '발해기'를 저술하였는데, 이 발해기에는 신당서의 예문지에 보이는 '발해국기'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에 의거하여 서술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발해의 ㅅ수도인 상경과 두 번째 수도였던 중경을 숙신의 엣 땅으로 기술하고 있다. 곧 9세기 당시 발해인은 자신들의 중심지가 읍루 또는 숙신의 지역이엇음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읍루나 숙신은 말갈의 선조로 파악된다. 주지하엿듯이 발해는 초기에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하였다. 그런데 9세기에 발해인이 중심지역을 숙신의 고지로 인식하엿다는 사실은 일견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보다 말갈을 계승하였다고 보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점에 주목하여 9세기 초의 발해는 국가통합을 위한 역사적 권위를 숙신과의 연속성에서 구하고, 북방동이제족의 세계를 계승.통합한다는 통합의식을 가졋으며, 이에 따라 초기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북방동이제족 통합의식 속으로 흡수되어 갔다고 보는 견해가 최근 제기되었다.  즉 발해가 철리.불녈 등을 복속한 750년대 전후에 숙신 게승의식이 생겨났고, 초기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760년대 후반 이후 당 및 신라와의 긴장관계가 완화되면서 북방동이제족 통합의식으로 흡수되어 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