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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봄 2(어느 군인 아내의 편지...)

두바퀴인생 2011. 4. 12. 04:43

 

 

 

 

우면산의 봄 2 (어느 군인 아내의 편지...)

 

 

 

개혁을 시도하던 카이스트 서남표 총장이 곧 사임을 할 전망이다. 최근들어 학생과 교수가 자살하는 사건으로 사회적으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자 서총장도 더 이상 과감한 개혁을 못할 전망이다. 영어몰입교육, 징벌적 등록금, 교수들의 연구비 유용 등 감사결과 여러자기 문제가 제기되고 있어 정치권에서도 더 이상 부담을 떠안기가 어려울 것이다. 선거를 의식한 정치권이 모두 개혁은 뒷전이고 문제 발생에 대한 책임만 전가하고 있다. 대학 개혁의 선봉이었던 서총장의 찬사가 비난으로 바뀌었고 이제는 그의 퇴진으로 대학들의 개혁은 아마 물건너 간 꼴이 될 전망이다.

 

 

말미에 어느 칼럼에 군인 아내가 보낸 편지를 소개하였다. 육사출신 남편을 둔 아내의 사연으로 국민들이 군을 우습게 보고 천시하는 풍조에 좌절감과 분노를 느끼고 있는 오늘날 대한민국 군인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아마 군인가족들의 허탈감이 넘쳐나고 있는 글이다.

 

군 개혁을 시도하고 있는 정부와 국방부는 개혁 내용에 대해서 이견들이 많다. 현역과 예비역까지 가세하여 각군의 밥그릇 싸움질에 김국방이 고뇌를 거듭하고 있으나 청와대, 야권, 여권, 육.해.공군, 현역과 예비역들 간에 내용과 범위, 권한, 규모, 군정권과 군령권을 놓고 시시비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군 자체의 방산비리를 포함하여 진급제도, 예산 배정, 독립과 예속, 인사권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는한 군구조만 개혁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닐 것이다.

 

또한 열악한 군인들의 삶의 질도 문제거니와 육사 출신과 비육사 출신들 간의 진급과 보직 문제도 도마에 올라 있다. 직업 군인들은 평균 20~30번의 이사를 하게 된다. 보직이 바뀔때마다 부대를 이동하고 전방으로 갈 경우 자녀교육을 포함한 각종 문화시설은 극히 열악하다. 관사를 포함한 아파트도 노후되어 한눈에도 금방 알 정도로 민간 아파트에 비해 형편없는 모습이다. 전방 지역은 군인들의 뿌리는 돈으로 지금까지 먹고 살았다. 이제는 배가 불러지자 군대를 떠나라고 한다. 군인들이 매입하여 입주하는 민간 아파트에는 민간인들이 집값이 떨어진다고 데모를 하는 등 군인들을 내쫒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군인들 덕분에 그들이 지금까지 많은 생활 혜택을 누리고 살았다는 사실을 잊은체 말이다. 정말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라의 장래가 걱정이 된다. 군을 천시하는 나라치고 국운이 융성했던 나라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라꼴이 군대를 천시하던 고려와 흡사하고 무신정권으로 나라가 절단났던 결과 몽고군에게 정복당하듯이 말이다.

 

군 조직은 피라미트형으로 각군총장이나 합참의장으로 진급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차피 선배나 동기생들은 누구나 중간에 전역을 하게 된다. 중간에 전역하는 장교와 장군들은 계급에 따라 아파트 각층에서 떨어지는 기분이란다. 그런 직업군인의 남편을 둔 아내는 전후방을 전전하면서 안정적인 생활도 누리지 못하고 명절이나 년휴, 대통령 출국, 적 도발 조짐 때면 어김없이 비상, 대기 등으로 부대에서 근무하게 되고 평소에는 훈련이나 일직근무로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부대에서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어린 자녀들이 아빠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이니까! 한 번씩 서울 나오려면 몇 시간을 차를 타야되고 행락철 되면 홍천-인제 국도는 차가 밀려 이동에 애를 먹고 훈련도 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런 길에 전차나 장갑차가 몇 대 지나가면 민간차량들이 수 킬로미터를 꼬리를 물고 따르게 된다. 버스 기사가 추월이 불가하여 장시간 뒤를 따르다가 휴게소에서 전차장을 불러서 따지다가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따귀를 때리는 등 못된 기사눔이 싸우는 경우도 있었다.

 

군인 가족들은 전방에서 제태크도 전무하고 경제적인 마인드도 부족하다. 중도에 사회에 나오면 군출신을 천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자리메김 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연금이라도 받으면 다행이지만 중.소령 이하 비연금자는 살아가기가 정말 막막하다. 졸업 기수별로 다르지만 육사 출신도 소령으로 진급도 못하고 전역하는 경우도 많고 중령, 대령은 30~50% 가까이 탈락한다. 최근 출신간 공석 문제도 불거졌다. 비육사출신들이 말하기를 육사츨신들이 모두 해먹는다고 한다. 그러나 출신별 공석을 만들지 않으면 학사, 학군, 3사 등 기타 출신들은 진급에서 지금보다 더 어려움을 겪게 될 공산이 크다. 4년 동안 기량을 연마하고 임관한 육사출신과 그렇지 못한 다른 출신들과 똑같을 수가 없다. 군사지식이나 학문이나 지휘기법이나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3사관학교는 60~70년대 월남전시 초급장교가 대량으로 전사하자 초급장교 수급대책으로 급하게 창설한 곳이 3사관학교다. 당시 대학입시고시에 떨어져 대학도 못가고 재수하거나 사병으로 근무하다가 지원한 경우가 많았다. 한마디로 수준이 낮은 계층의 장교들을 양산한 것이다. 집총훈련, 각개전투, 구보와 사격으로 몇 개월씩 기초양성교육만 받고 일 년에 수천 명씩 배출하여 전.후방 각부대에 보직되었으나 자질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그들은 부하를 지휘하는 기법이 오로지 무자비한 구타와 폭력을 많이 구사하여 불쌍하고 착하기만 하던 수많은 병사들이 개돼지처럼 맞으며 군생활을 했다. 그러한 소대장들이 존경맏을리가 없었고 걷으로는 복종하는 척 하였지만 속으로는 병사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었다. 당시는 구타가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시절이었고 그것이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일석점호는 구타점호로 거의 자정까지 소대장실에는 소대원들이 줄지어 하루 일과 수행에서 잘못된 점에 대하여 구타를 대기하는 진풍경이 그당시 군 내무반 모습이었다. 아마 70년대 군생활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유니폼은 그 사람을 포장하고 눈에 잘 띠며 참신한 모습이라 보기에도 좋다. 즉 한마디로 간판과 같은 역활을 한다. 많은 여성들이 젊은 시절 사관생도의 유니품에 매료되어 수많은 추억을 만들었거나 그 중에는 결혼에 꼴인한 여자들도 많을 것이다. 60-70년대 그 당시는 5.16 혁명 이후 혁명군이 민정을 감찰하였고 월남전으로 많은 봉급을 받게 되자 군인들이 줏가가 고공으로 치솟던 시절이었다. 주말이면 육사내 화랑천 공원이나 근방 태능 숲속에는 여기저기서 여대생들과 미팅하는 사관생도들의 모습이 많았다. 바로 앞에 있던 서울여대생들은 쳐다보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일부 여성들은 유니품에 빠져 출신도 모르고 그냥 육사 출신인줄로 알고 결혼했는데 결혼 후 남편이 진급에서 계속 탈락했다. 알고보니 남편이 3사 등 비육사 출신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게 된 경우도 많다고 한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강재구 소령을 영웅으로 만들고 월남전에서 여러 영웅을 만들던 시절이었고 군출신들이 전권을 휘두르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당시 서울대와 맞먹을 정도의 우수자원이 몰리던 잘 나가던 육사 출신인줄 알고 결혼까지 했는데... 알고보니 맹탕이라, 그렇다고 이제와서 결혼을 바꿀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자녀낳고 사는 여자들도 많을 것이다.

 

전방 각 지역은 군인들이 뿌리는 돈으로 성장하였다. 전방지역 사람들에게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들은 척박한 농토와 가난으로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지역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군인들의 피와 땀을 먹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70~80년대 과거에는 초급 장교나 부사관들은 전방에서 총각딱지를 떼는 경우가 많았고, 우연히 유흥가 출신의 여자와 동거내지는 결혼하여 평생을 힘들게 사는 사람도 많았다. 나중에 여자에 대해서 알고나서 후회해봐야 소용도 없었다. 윤락녀들이 직업소개소를 경유하는 과정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얼마간 지내다가 서울 북방인 의정부, 동두천, 포천 그리고 강원도 원주, 춘천으로 올라가서 지내다가 다시 문산, 파주,일동, 이동, 운천, 화천, 인제를 거쳐 연천,전곡,동송,지포리, 와수리, 육단리, 사창리, 다목리, 양구, 양양, 속초 등지로 이동하면서 팔려가서 나중에는 동해안쪽으로 빠져 그 다음에는 남쪽으로 부산까지 이동한다고 한다. 한 곳에서 2~6개월을 지내면 얼굴이 알려지고 손님이 떨어지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게 된다. 적게는 300만 원에서 많게는 천만원까지 얼굴과 나이, 몸매에 따라 팔려가는 가격이 달라진다. 그녀들이 돈을 많이 모았다는 소문을 듣지도 못했지만 대부분 술과 매춘으로 망가진 몸이 되어 노후를 비참하게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녀들 중 대부분은 이미 우리들의 어머니, 할머니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힘들게 모질게 살아왔으니 성공한 사람도 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녀들과 어두운 과거가 얼굴에 같이 겹치는 모습이지만 여자의 과거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초급 시절 전방 근무 중 술집. 다방 여자와 우연히 동거하거나 같이 살게되면 평생을 망치기 쉽상이다. 한 초급장교는 하숙집 찬모였던 나이가 많은 여자와 관계하여 지내다가 헤어지려 했으나 부대를 이동할 때마다 따라와서 같이 살게 된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남자가 몰래 다른 부대로 이동해 버리면 그 부대 정문 앞에서 지휘관이 출근하면 길바닥에 드러누워 난리를 치면서 간 곳을 알려달라고 하면 할 수 없이 알려 주었고, 그래서 이동한 부대를 찿아가서 만나주지 않으면 또 출근시간쯤 그 부대 정문에서 지휘관 차를 가로막고 난리를 치면 할 수 없이 지휘관이 지시하여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남자는 군대 생활도 망쳤지만 대위 말년이 되기까지 정식 장가도 못하고 그 여자에게 봉급은 모조리 빼앗기고 여자는 사치와 낭비, 돈 빼돌리기로 군 생활 중 재산은 한푼도 모으지 못하고 대위로 전역하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서로 헤어졌는지 아니면 같이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군부대가 갈 곳이 없다. 군 작전을 수행하기도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군인들이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 국방부 앞에서 데모하는 나라, 군부대 이전을 반대하는 나라, 군고급장교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는 나라, 군인가족들의 아파트 입주를 반대하며 데모를 하는 나라, 군 부대를 혐오시설로 인식하는 나라, 군인들이 노후를 보장받지 못하는 나라, 군인들이 취업이 안되는 나라, 군인들의 시설과 문화, 교육, 복지가 뒤쳐지는 나라이다.

 

물론 군 스스로도 개혁의 고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방산, 급식, 군수, 공사, 납품, 인사, 진급, 보직 등 각종 비리와 부패를 척결해야 할 것이다.북의 불장난이던, 주변국의 무력침공이던 이 땅이 다시 초토화되어  우리들이 다시 강대국의 원조를 받으며 옥수수죽과 우유가루를 배급받으며 살아야 할 날을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군대를 다시 정상의 자리로 세우는 일은 사기를 돋구는 일이다. 엄정한 선발로 직업군인을 선발하고 미래전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있고 유능한 전략.전술가를 만들어야 하며 한편 군인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로 누구나 부러워 하는 우대정책을 만들어 급여와 각종 보수를 상향시켜야 하며 이러한 우수자원이 전역후에도 안정적인 직업과 생활이 보장되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위기시에 목숨을 요구할 수 있지 않는가?  이런 상태로는 위기 도래시 당나라 군대나 월남 패망시 월남군과 별반 차이가 없는  재판이 될 것은 뻔하지 않는가!

 

국민들이 군을 우습게 보는 나라, 군대가 갈 곳이 없는 나라, 군을 천시하는 풍조를 바꾸지 않는 한 군 개혁은 어려울 전망이다. 그들에게 현재와 미래를 보장해주고 누구나 직업군인을 선망하는 대안과 정책을 내놓지 못하면 군은 더 이상 국방을 책임질 수 있는 군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합지졸, 당나라 군대를 만들지 말라! 

 

 

 

 

 

 

어느 군인 아내가 보내온 편지

 

며칠 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저는 대한민국 육군의 아내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글이었다. 편지를 보낸 부인은 육사(陸士)를 졸업한 남편을 만난 뒤 17년간 열 번 이사를 다니며 머릿속에서 지운 단어가 있다고 했다. '부귀영화(富貴榮華)'였다.

"제가 이사를 특별히 많이 다닌 건 아닙니다. 남편 동기들은 보통 스무 번 넘게 옮겨다녔거든요. 제 천성이 낙천적이어서 그런지 이사도, 전방 오지(奧地) 근무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남편도 군인으로서의 삶을 보람으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가족이 작년부터 혼란에 빠졌다. 천안함 폭침 직후였다. "신문에 숨진 장병(將兵)의 부모에게 멱살 잡힌 대령 사진이 실린 걸 보고 남편이 말했습니다. '우린 국민을 지키려고 존재하는데 믿어주지도 않는 국민을 왜 지켜야 하는지….'" 아는 재미교포 2세 군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아내는 남편이 불쌍해졌다고 한다. "미군 중령은 월급 외에 집세를 450만원 받습니다. 미국이 부자(富者)나라여서만은 아닙니다. 군인이 존경받기 때문이지요. 전 그게 자랑스럽습니다."

국민에게 멱살 잡히는 국군, 국민에게 의심받는 국군, 국민이 곁에 있는 걸 싫어하는 국군의 아내는 서울 서초동 정보사(情報司) 부지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었던 자존심이 무너졌다고 했다.

"편지를 쓰게 된 건 월급 푸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정보사 부지 군인아파트 기사 때문입니다. 군인아파트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럼 지금 서초역 주변에 있는 정보사 아파트도 눈엣가시겠네요. 금싸라기 땅을 허접한 군인아파트 때문에 썩히고 있으니…. 이 얼마나 모욕적인 말입니까."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환경 때문이라는 주민 인터뷰도 봤습니다. 그런데 서리풀공원 주변에 아파트가 없나요? 군인을 유해(有害)시설로 보기 때문 아닌가요? 똥별, 식모(食母)별…, 이런 군인이 대다수인 양 이야기할 때마다 느끼는 치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린 가난해야 참군인이고 낡은 차 타야 올바로 살아온 것처럼 되나요."

군인의 아내가 기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2009년 11월 7일자 신문에 쓴 짤막한 후기(後記) 때문이었다. 당시 지방 취재 중 목격한 광경이었다. '군부대를 지나는데 그들이 사는 아파트를 봤습니다. 하나같이 낡고 우중충한 모습에 비좁아 보였습니다. 밖에서 보기에도 딱한 그런 곳에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그런 대접을 하면서 유사시 국민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이 대목에서 군인의 아내는 울었다고 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복무 10년 이상 된 직업군인의 자가(自家) 보유율은 31.5%다. 나머지는 자기 돈으로 세를 얻거나 관사(官舍)·군인아파트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이사가 더욱 잦을 수밖에 없다. 관사나 군인아파트는 보통 15~18평 정도다. 누군가 그 열악함을 인터넷에 올렸다. "아는 군인 장모(丈母)가 관사를 둘러본 뒤 딸을 보며 울었답니다." 기자에게 편지 보낸 군인 아내의 어머니도 아마 딸의 처지에 소리없이 울었을 것이다.

특전사(特戰司)·3공수여단, 국군기무사, 정보사령부가 하나같이 부대 이전 때마다 주민 반발에 곤욕을 치렀다. 정보사 그 비싼 땅에 뭘 짓는 게 옳은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면서도 군(軍)이 주변에 있는 건 싫어하는 국민이 참으로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