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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9 : 발해의 역사 12 (제4대 폐왕 대원의)

두바퀴인생 2011. 4. 11. 03:51

 

 

 

한국의 역사 209 : 발해의 역사 12 (제4대 폐왕 대원의)

 

 

 

제4대 폐왕 대원의

 

발해 폐왕 대원의(大元義, ?~793년, 재위: 793년)는 발해 제4대 왕이다. 그는 대조영의 종손(從孫)이자 문왕의 족제(族弟, 친척동생)이며 재위 중에 쫓겨났기 때문에 시호가 없다.

 

생애

대원의는 문왕의 태자인 대굉림(大宏臨)이 일찍 죽자 문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시기심이 많고 성질이 포악해서 신하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에 대해 《구당서》나 《신당서》에서는 “대원의가 폭정을 하자 국인이 앙심을 품고 그를 죽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 후 발해의 왕위는 대굉림의 아들인 성왕에게 돌아가게 된다.

 

가족관계

 

참고

 

 

 

 

 

왕.성왕의 지지세력과 상경 천도

 

문왕 말기에 지배세력간에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면, 문왕이 죽은 후 대원의가 즉위한 것도 우발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정치세력간의 길등과 대립의 연장선상에서 그의 즉위 배경과 그를 지지한 정치세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폐왕 대원의가 즉위한 것은 문왕이 죽기전에 적자 대굉림이 먼저 사망하였고, 그 아들 대화여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에는 어리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적손이 살이 있음에도 왕위 계승에서 방계인 족제 대원의가 즉위하였고, 그가 의심많고 포악해서 국인에게 피살된 후 대화여가 추대되었다는 사실은 문왕 사후 치열한 권력투쟁이 있었고 나아가 대원의가 왕위를 찬탈했으리라는 추정을 불러일으킨다.

 

대원의가 적통이 아님에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문왕의 적자 대굉림이 일찍 죽은 죽은 상황에서, 그가 문왕의 족제라는 혈연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자 대굉림이 일찍 죽은 시기는 문왕이 죽기 전이었다. 그의 사망시기는 정효공주가 매장된 792년 11월 28일  이후부터 문왕이 사망한 793년 3월 4일 사이로 보고 있다. 나아가 누이 정효공주의 나이와 조카인 강왕 대승린의 존재를 고려할 때, 대굉림의 사망 당시 나이는 30-35세 내외이며, 그 아들 성왕 대화여의 즉위 당시 나이는 10-15세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정효공주와 대굉림 그리고 문왕의 사망이 연속적으로 발생했다면, 대원의의 즉위 자체가 비정상적인 것으로 왕위 찬탈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심지어 대원의가 대굉림을 시해하고 문왕의 죽음까지도 관련이 있다는 견해까지 나오고 있다.

 

대원의는 사료를 검토한 결과 문왕의 6촌으로 판단되며 그 가계는 건국 이래로 3대에 걸쳐 국정에 참여한 권력집단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무왕대에 대문예가 망명 이후 흑수말갈을 토벌했던 종형 대일하라는 인물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문예의 망명으로까지 비화되어 지배층의 분열을 초래한 흑수말갈 토벌 문제에서 무왕을 지지한 대일하는 무왕과는 4촌으로 근친관계에 있었다. 어쩌면 대원의는 대일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 만약 대원의가 문왕의 근친으로 국정에 깊숙히 관여하고, 나아가 대굉림의 사망으로 왕위계승자가 공석일 경우 그가 왕위계승 후보가 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간왕이 즉위한 지 1년만에 사망하자 종부인 대인수가 선왕으로 즉위한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물론 선왕의 경우도 찬탈의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여기서는 다만 근친이 왕위계승의 자격이 있고 그 정도로 근친이 권력집단의 일원이라는 점을 지적해 둔다. 

 

문제는 문왕 사후 왕위에 오르기 어리다고 하지만 엄연한 왕위 계승의 첯째 후보인 적손 대화여나, 그 다음 후보인 문왕의 아들들이 살아 있음에도 대원의가 즉위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는 문왕대에 추진된 체제정비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고, 아울러 대원의가 일정한 정치세력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원의를 지지한 세력의 정치적 실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간접적으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문왕 말기에 상경에서 동경으로 천도한 사실이다. 대원의를 살해하고 성왕을 추대한 국인은 곧 바로 상경으로 환도하였으므로, 이들은 문왕 말기에 상경을 고수하며 동경으로의 천도를 반대하였을 것이다. 반대로 대원의로 대표되는 세력은 동경으로 천도를 적극 지지하거나 주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앞에서 살폈던 동경 천도와 연호 복구의 의미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문왕 사후에 족제인 대원의는 건국집단 출신의 기득권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적자 대굉림의 사망과 적손 대화여의 연소함을 계기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을 받고자 하였다.

 

대원의는 즉위하자마자 당에 사신을파견하여 책봉을 받기 위해 사신들이 793년 9-10월쯤 출발하여 압록강을 거쳐 산동반도에 도착하여 100여 일이 걸리는 거리의 당에 다음해 정월에 도착하였다. 왕자 대청윤을 비롯하여 30여 명의 사신단은 각각 직위를 하사받고 전왕의 사망과 대원위의 즉위 사실을 고했다. 그러나 당은 적손 대화여 대신 즉위한 대원의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을 것이며, 이후 그가 피살됨으로써 책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