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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6 : 발해의 역사 9 (제3대 문왕 대흠무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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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6 : 발해의 역사 9 (제3대 문왕 대흠무 1)

두바퀴인생 2011. 4. 8. 06:52

 

 

 

한국의 역사 206 : 발해의 역사 9 (제3대 문왕 대흠무 1)

 

제3대 문왕 대흠무1

 

문왕(文王, ? ~ 793년, 재위: 737년 ~ 793년)은 발해의 제3대 왕으로, 이름은 대흠무(大欽茂), 연호는 대흥(大興)이다. 그의 부인은 효의황후(孝懿皇后)로 룽터우산 고분군 M12 묘지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생애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북으로는 불열말갈철리말갈을 포섭하였고, 또한 남쪽으로 용흥강 주변까지 발해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수도를 상경 용천부로 정했다가 다시 동경 용원부로 옮겼다. 문왕은 관직제도를 제정(당나라3성 6부를 도입), 사적(史籍) 수입, 주자감(胄子監) 설립 등 정치·문화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당나라 등과 활발하게 교역을 하여 국가재정을 강화하였다.

 

그의 딸 정혜공주정효공주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석에는 문왕을 가리켜 황상(皇上)이라 칭하고 있어 발해가 그의 대에 이르러 내부적으로 황제국으로 칭했지만, 문왕은 스스로 황제로 칭하지 않았고,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는 호칭으로만 불렸다.

 

문왕의 아들 대굉림이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그가 죽자 대원의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그도 수 개월 만에 죽게 되고 대화여(성왕)이 즉위한다.

 

 

고구려 계승의식

문왕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를 통하여 스스로를 고려국왕 대흠무라 칭하며 발해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자신을 천손(하늘의 자손)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외교 활동

문왕은 당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중시하였으며, 이 무렵부터 신라도를 통해 신라와도 교류를 활발히 하였다.

 

또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대흥 · 보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가계

 

참고

 

 

 

연표
연도 성명 연호 설명
668 고구려 멸망. 대중상, 식구를 이끌고 영주로 거처를 옮김.
698 대조영 인구 10여 만호, 군사 정예군 수만 명으로 대진 건국. 고왕 즉위.
713 국호를 발해로 고침.
719 대무예 고왕 붕어. 무왕 즉위, 연호 인안.
732 인안 14년 장문휴를 보내어 해군으로 당의 등주를 공격.
733 인안 15년 당 현종,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 공격. 신라도 협조하였으나 폭설로 중지.
737 대흠무 인안 19년 무왕 붕어. 문왕 즉위, 연호 대흥.
756 대흥 20년 상경으로 천도(遷都).
793 대흥 57년 문왕 붕어. 동생 원의가 즉위했으나 수 개월 후 사망.
793 대화여 성왕 즉위, 연호 중흥.
794 대숭린 중흥2년 성왕 붕어. 강왕 즉위, 연호 정력.
809 대원유 정력16년 강왕 붕어. 정왕 즉위, 연호 영덕.
812 대언의 영덕4년 정왕 붕어. 희왕 즉위, 연호 주작.
817 대명충 주작6년 희왕 붕어. 간왕 즉위, 연호 태시.
818 대인수 태시2년 간왕 붕어. 선왕 즉위, 연호 건흥. 신라를 공격, 북쪽 부락을 공략.
830 대인수 건흥13년 선왕 붕어.
831 대이진 건흥14년 대이진 즉위. 연호 함화.
857 대건황 함화27년 대이진 붕어. 대건황 즉위.
871 대현석 ?15년 대건황 붕어. 대현석 즉위.
894 대위해 ?24년 대현석 붕어. 대위해 즉위.
906 대인선 ?13년 대위해 붕어. 대인선 즉위.
906 ?7년 신라와 비밀리에 연계를 맺음.
924 ?19년 거란의 발해 침입, 요주자사를 죽이고 백성들을 빼앗음.
925 ?20년 발해인 장군 500여 명 고려로 망명. 12월, 거란이 발해에 침입.
926 ?21년 거란군, 부여부 점거. 발해 멸망. 국명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거란 세자가 지배

 

 

 

문왕 대의 지배체제 정비

 

문왕 즉위와 대당관계 개선

무왕은 대내외적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732년 당의 등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대내적으로 말갈제부의 복속.편제와 이를 뒷받침할 체제정비의 필요성, 대외적으로 발해의 지지세력인 돌궐 및 거란의 세력 약화와 당과 결탁한 신라의 위협 등 불리한 국제 정세 때문에 대당강경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당은 외양상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농민생활이 곤궁하여 균전제가 동요하였으며, 또 부병제의 과중한 부담으로 병역을 기피하는 자가 많아져 당의 무력기반인 부병제도 붕괴되어 모병제를 채택하는 등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어 갔다. 이와 함께 기미정책의 파탄으로 변경방위체제는 도호부 체제에서 절도사 체제로 이행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번진이 변경에 설치된 도호부보다 내지로 물러난 지점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변경 번진의 설치는 당의 세계제국적 성격의 후퇴와 연결되었다.

 

이민족의 분리통치를 전제로 하는 기미제도도 1국 1기미주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결과적으로 기미지배는 책봉과 같은 기능을 가지게 되었으며 당 중심의 질서에 편입되었다. 즉 기미지배의 실제내용은 붕괴되었지만 그 형식과 이념을 통해 일정한 규제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당 현종은 붕괴된 기미지배의 재현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당도 발해를 더 이상 압박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당과 발해를 더 이상 압박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과 발해의 관계가 바로 개선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대당관계 개선을 위해 발해는 당을 납득시킬 만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발해는 732년 등주 공격으로 인한 단절된 대당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736년 3월 왕제 대번을 처음으로 파견한 이후, 다음해에도 세 처례 사신을 파견하엿다. 이 무렵 현종이 무왕에게 보낸 칙서를 보면 당이 억류하였던 발해의 사신 대낭아를 귀환시킨 사실을 전하고 있다. 730년 파견된 대낭아가 이때까지 억류되엇던 것은 발해의 등주 공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국법을 어긴 죄로 유배되었던 대낭아는 어쩌면 대문예 암살 사건과 관련되었을 지도 모른다. 대낭아 귀환 조치로 발해는 등주 공격시 잡은 당의 포로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양국간의 관계가 점차 개선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칙서의 내용을 보면 무왕의 지난 행적에 대해 비난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직 양국 관계의 정상화로 보기는 어렵다.

 

문왕이 737년 즉위하고 당은 문왕 책봉을 위해 738년 단수간을 파견하였다. 또 같은해 6월에는 <당례:대당개원래 예법서> 등의 필사를 요청하여 하락받았다. 이때의 당례는 732년 완성된 것으로 발해가 이를 필사하려는 것은 단순한 문화적 욕구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일종의 질서회복이나 화평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즉 당의 예법으로 상징되는 당 중심의 세계질서에 발해가 다시 편입하여 당과의 화평을 적극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석달 후 발해는 담비 가죽과 마른 문어를 당에 바쳤다. 738년 윤8월이라는 시점을 미루어 볼 때 그 목적은 문왕의 즉위를 인정받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문왕의 책봉은 이러한 외교활동의 결과이며, 이로써 대당관계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자 문왕은 책봉식 이후 국내 대사면령을 내렸다. 사면 대상에는 일반 죄수는 물론 무왕대에 대문예를 지지하였다가 숙청된 친당파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친당파의 사면은 대당관계를 개선하려는 발해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결국 문왕은 당의 책봉을 받고 친당파를 대거 사면함으로써 발해의 대당관계는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경 천도와 제도 정비

발해가 대당강경책을 포기하는 735년부터 불녈.월희.철리 말갈 등도 다시 당과 교섭을 재개하였지만, 741년 이후로는 자취를 감추었다. 대당관계 개선 이후 발해가 이들의 대외교섭을 통제하고 복속시켰던 것이다. <책부원구> 사서에도 그때까지 '발해말갈'과 '발해'로 혼용하던 명칭을 741년을 기점으로 '발해'로만 통칭하였다. 월래 '발해말갈'이란 '말갈제부'와 구분하기 위한 명칭이었는데, 발해가 말갈 지역을 통합함으로써 양자를 구분할 이유가 없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흑수말갈의 경우 747-752년까지 6회나 당과 교섭한 사실은 발해가 그때까지 흑수말갈을 복속시키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8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흑수말갈도 곧 발해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말갈제부가 대당관계에서 자취를 감춘 이후 당은 평로절도사에게 양번(거란.해)과 발해, 흑수말갈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하였다. 즉 당이 말갈제부 가운데 발해와 흑수말갈만을 외교 상대로 인정하였다.

 

당이 흑수말갈과 직접 교섭하는 방침은 안사의 난 직후에도 동일하였지만, 변방 지배력의 약화로 775년 무렵에는 평로절도사 관할에서 흑수말갈이 제외되었다. 그 시기에 당은 발해 문왕을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승진 책봉하였다. 이는 발해가 흑수말갈을 완전히 복속하게 되자 책봉 지위를 올려주었던 것이다.

 

안록산은 난을 일으킬 당시 평로.범양.하동 절도사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안록산은 최소한 735년 무렵부터 발해를 견제하는 당의 책임자였으며, 평로절도사 자체가 발해와의 교섭을 관장하였기 때문에 발해는 안사의 난 때 무관심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난이 발발한 직후 반란군과 당 조정은 서로 발해를 끌여들이려고 노력했다.

 

756년 7월 현종이 사천으로 피난한 이후, 평로유후사 서귀도는 안록산을 토벌하기 위해 발해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서귀도가 안록산과 은밀히 내통하자, 안동도호 왕현지는 그를 죽이고 평로절도사를 자칭하였다. 758년 4월에는 왕현지가 발해에 사신을 보내 전후 사정을 설명하였다. 아마 발해가 반란군측에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발해는 왕현지도 믿지 못하고 정탐을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결국 발해는 반란군이나 당 조정도 믿지 못하고, 안사의 난에 개입하지 않았다.

 

761년 3월 반란군 우두머리 사사명을 죽이고 황제에 오른 사조의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관군의 공격을 받고 패배하여 유주로 달아났다가, 763년 1월 범양 절도사 이회선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8년에 걸친 안사의 난은 마침내 평정되었다. 그런데 유주로 달아난 사조의는 막판에 해.거란 지역으로 달아나다 추격군에 살해당했던 것이다. 

 

이처럼 당조정과 반란군이 서로 발해를 끌여들이려고 한 점은 그만큼 발해의 국력이 신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발해국왕으로의 승진.책봉은 발해의 국력 신장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이라는 점에서 당의 동방 정책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평로절도사의 관할 범위에 두었던 흑수말갈이 제외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한편 이 무렵 발해는 천보 말년에 현주에서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종래 상경 천도의 원인으로는 안사의 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대외적 요인이 강조되었다. 당시 일본도 대비책을 강구한 것으로 보아 발해도 안록산이 동쪽으로 쳐들어올 가능성을 판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발해는 건국 이래 60년 동안 동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왔으므로, 통치의 중심도 이 방면으로 옮길 필요가 있었던 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발해가 상경 천도 이후 흑수말갈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아 발해의 통제하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된다.

 

어처럼 발해는 말갈제부의 대외교섭을 통제하여 이들을 복속시켜 나갔고, 9세기 발해의 지방 통치제도는 5경 15부 62주로 완비되었다. 부가 우선적으로 설치된 지역은 고구려가 통치하던 지역으로, 현덕부, 부여부, 압록부, 남해부, 용원부 등이 설치되었고,  점차 발갈제부 지역인 불녈, 철리, 솔빈 등으로 확대되어 동평부, 철리부. 솔빈부를 두었을 것이다. 월희 지역은 회원부, 안원부로 추후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루 지역에는 정리부, 안변부 등이 설치되었다.

 

발해는 국력이 신장되었던 것은 단지 영역이 확장된 결과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확장 영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지배체제를 정비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문왕대에 발해가 지향한 지배체제를 살펴보자.

 

문왕은 대당관계가 개선되자 재위기간인 57년 동안 61회 이상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처럼 활발한 대당관계를 통해 당의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특히 738년 당의 '당례'를 필사하였다. 또한 당의 '당례'를 수입한 이상 발해는 '율령격식'도 수입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735년에 책정된 '개원이십오년령'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발해는 율령적 정치이념을 모범으로 체제를 정비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중앙 통치제도나 지방제도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율령적 정치이념을 모범으로 제배체제의 정비는 그 목적이 왕권 강화와 직결되며 백성을 직접지배히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문왕의 지배체제 정비는 상경으로 천도한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이러한 추세는 대흥 38년(774년) 보력으로 개원한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보력은 원래 왕이 신하들에게 반포하는 달력인데, 보력이란 연호는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문왕대의 지배체제 정비는 대당관계 개선과 함께 당례 및 율령체제의 수용을 통해 추진되었으며, 상경 천도 이후부터 그 구체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보력으로 개원한 의도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체제를 강화 내지 완성하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