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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4 : 발해의 역사 7 (발해 건국 과정 3 :제2대 무왕 대무예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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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4 : 발해의 역사 7 (발해 건국 과정 3 :제2대 무왕 대무예1)

두바퀴인생 2011. 4. 6. 07:57

 

 

 

한국의 역사 204 : 발해의 역사 7 (발해 건국 과정 3 : 제2대 무왕 대무예 1)

 

 

제2대 무왕 대무예

 

무왕(武王, ? ~ 737년, 재위:719년 ~ 737년)은 발해의 제2대 왕으로 이름은 대무예(大武藝)이다.

 

 

생애

고왕이 죽자 아버지를 계승하여 발해를 통치했다. 연호는 인안(仁安)이라 하였다. 일본과 수교(修交)하여 사신 왕래와 문물교환을 자주 하는 한편, 나라 안에서는 무력을 양성하여 726년(인안 8년) 아우 문예(門藝)로 하여금 흑수말갈(黑水靺鞨)을 공격하게 하였고,

 

732년에는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당나라의 등주(登州, 지금의 산둥 성 옌타이)를 공격하였다. 무왕은 문왕의 아버지이다.

 

가족 관계

 참고

 

 

 

 

연표
연도 성명 연호 설명
668 고구려 멸망. 대중상, 식구를 이끌고 영주로 거처를 옮김.
698 대조영 인구 10여 만호, 군사 정예군 수만 명으로 대진 건국. 고왕 즉위.
713 국호를 발해로 고침.
719 대무예 고왕 붕어. 무왕 즉위, 연호 인안.
732 인안 14년 장문휴를 보내어 해군으로 당의 등주를 공격.
733 인안 15년 당 현종,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 공격. 신라도 협조하였으나 폭설로 중지.
737 대흠무 인안 19년 무왕 붕어. 문왕 즉위, 연호 대흥.
756 대흥 20년 상경으로 천도(遷都).
793 대흥 57년 문왕 붕어. 동생 원의가 즉위했으나 수 개월 후 사망.
793 대화여 성왕 즉위, 연호 중흥.
794 대숭린 중흥2년 성왕 붕어. 강왕 즉위, 연호 정력.
809 대원유 정력16년 강왕 붕어. 정왕 즉위, 연호 영덕.
812 대언의 영덕4년 정왕 붕어. 희왕 즉위, 연호 주작.
817 대명충 주작6년 희왕 붕어. 간왕 즉위, 연호 태시.
818 대인수 태시2년 간왕 붕어. 선왕 즉위, 연호 건흥. 신라를 공격, 북쪽 부락을 공략.
830 대인수 건흥13년 선왕 붕어.
831 대이진 건흥14년 대이진 즉위. 연호 함화.
857 대건황 함화27년 대이진 붕어. 대건황 즉위.
871 대현석 ?15년 대건황 붕어. 대현석 즉위.
894 대위해 ?24년 대현석 붕어. 대위해 즉위.
906 대인선 ?13년 대위해 붕어. 대인선 즉위.
906 ?7년 신라와 비밀리에 연계를 맺음.
924 ?19년 거란의 발해 침입, 요주자사를 죽이고 백성들을 빼앗음.
925 ?20년 발해인 장군 500여 명 고려로 망명. 12월, 거란이 발해에 침입.
926 ?21년 거란군, 부여부 점거. 발해 멸망. 국명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거란 세자가 지배

 

 

 

 

 

 

정치 세력 분화와 대당 강경책

 

당과 흑수발갈의 밀착

발해가 713년 당과 국교를 수립한 이후 처음으로 파견한 사신은 교역과 예불을 요청하였다. 발해는 불류 송화강 동쪽에 위치하여 한냉대 습윤 기후에 속하는 지역으로 산림이 풍부한 이 지역은 짐승이나 약재류는 풍부하지만 농경에는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다.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읍루, 말갈, 물길 등으로 불리는 종족이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반농반렵 생활을 영위하면서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해 인접 지역을 침략하였다. 7세기에 말갈제부족이 고구려에 신속하였던 것은 이를 통해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멸망 이후 이 지역에서 국가를 수립한 발해로서는 교역이 필수적이었다.

 

불녈.월희.철리 등 말갈제부가 발해와 당의 국교 수립 직후인 714년 2월부터 당과 교섭하기 시작한 사실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말갈제부가 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발해를 경유해야만 가능하였으므로, 발해는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이다. 흑수말갈도 마찬가지였다.

 

흑수말갈은 고구려가 멸망 이후 말갈제부가 분산되고 해체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세력을 유지한 집단이었다. 그래서 흑수말갈은 691년 후반에서 692년 사이에 속말수 즉 북류 송화강 일대로 진출하였다가 이다조가 이끄는 당군에게 격파당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흑수말갈은 동류 송화강  하류의 삼강평원으로 후퇴하였다가 722년 5월에 처음 당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구당서에 의하면 발해 무왕은 726년 당이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흑수말갈에 기미주를 설치하자 흑수말갈 토벌의 당위성을 강조한 발언이 있다. 당시 돌궐은 흑수말갈에 부족장을 통해 감찰하고 공납을 징수하는 역활을 하는 관직을 파견하였는데 그를 '토둔(吐屯)'이라하였다.

 

결국 719년 즉위한 무왕이 크게 영역을 확장하자 동북의 오랑캐들이 복속하였으며 말갈제부에 대한 영향력도 강화되었다. 그런데 흑수말갈이 돌궐에 예속되어 있었으므로, 발해는 돌궐의 양해 아래 주변 세력을 팽창시켜 나갔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당은 흑수말갈에 기미주를 설치해 나갔다.

 

722년 5월 흑수말갈이 처음으로 당에 내조하자, 당은 추장 '친속리계'에게 '발주자사'를 제수하였다. 발해를 포함한 여타 말갈제부의 사신이나 수령이 보통 당으로부터 장군이나 절충 등의 관직을 수여받은 경우와 달리, 이때 발주자사를 받은 것은 당이 흑수말갈의 한 부락을 기미주로 편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해 12월 흑수말갈의 대추장 예속리계가 직접 내조한 사실은 흑수말갈이 당의 의도에 호응한 것을 의미한다.

 

당은 725년 안동도호 설태의 건의로 군대를 포함하여 흑수말갈 전체에 기미주를 설치하고 장사를 파견하여 당의 통제하에 두자고 하였다.그래서 당은 이듬해 실행하였다. 당은 728년 흑수부가 설치된 흑수말갈 대추장에게 이헌성이라는 중국식 성명을 하사하고 '운휘장군 겸 흑수경략사'를 제수하고 유주도독을 '압사'로 삼았다. 압사는 압번사의 약칭으로 변방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이었다.

 

결국 흑수말갈은 토둔이라는 돌궐의 영향력이 사라지자 발해 무왕의 세력 팽창에 놀라 당에 접근하였던 것이다. 이에 당은 거란과 발해를 견제할 목적으로 흑수말갈을 지배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발해 무왕은 당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발해 주변 말갈제부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발해가 동북방면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도 진출하였음을 알수 있는데, 신라가 721년 '하슬라도'의 장정 2천 명을 동원하여 국경에 장성을 쌓은 사실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장성은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군'과 '정평군'의 경계에 있는 옛 장성으로 비정된다. 또 발해와 신라가 국경을 이루는 '이하(泥河)'도 영흥 북쪽 '용흥강', 지금의 '금야강'으로 비정된다.

 

이처럼 발해의 급속한 발전은 북쪽의 흑수말갈과 남쪽의 신라가 당과 결탁하는 상황을 낳았다. 특히 당의 거란 정책의 일환으로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흑수말갈에 기미주를 설치한 사실은 발해의 지배층에게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이는 발해의 지배층으로 하여금 대외노선을 놓고 분열케 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반당파와 친당파의 갈등

당과 흑수말갈의 밀착에 대해 발해는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발해와 말갈제부 그리고 흑수말갈이 당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면 당 현종(713-756) 대에 거의 매년 한 번씩 사신이 파견되었고 말갈제부와 흑수말갈이 같이 동행한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두 가지 특징있는 사실이 나타나는데, 우선 발해와 말갈제부의 사신 입당 시기가 동일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발해의 배후에 위치한 말갈제부가 입당하기 위해서는 발해의 영역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고, 흑수말갈이 돌궐에 토둔을 요청할 때도 발해와 동행하였으며, 흑수말갈이 발해에 통고없이 단독으로 당에 기미주 설치를 요청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야기되었던 점까지 고려한다면, 발해와 말갈제부가 입당 시기가 같은 경우에는 이들도 동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발해는 말갈제부보다 흑수말갈에 관심이 컸다. 안동도호 설태가 기미주 설치를 건의한 725년에 흑수말갈은 네 차레나 입당하였는데 그 중에서 세 차례는 발해의 사신 파견과 일치한다.

 

둘째는 대문예가 당에 망명하고 발해의 등주 공격이 있었을 때까지인 726-732년 사이에는 발해 사신이 수령이 아니라 왕제, 왕자 등 왕족이 집중적으로 파견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숙위로 당에 인질로 체류하기도 하였다. 이 사이 왕족이 6회 파견되었고 숙위가 3회였다. 숙위는 기본적으로 인질이지만 외교사절로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숙위가 집중적으로 파견된 것은 흑수말갈 문제와 그로 말미암아 당으로 망명한 대문예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당시 발해 지배층의 흑수말갈이 당과 유착한 것에 대한 발해 지배층의 생각은 분열되고 말았다. 구당서에 의하면 흑수말갈을 공격하려는 무왕과 이를 반대하는 동생 대문예의 입장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무왕은 흑수말갈이 발해와 상의없이 독자적으로 당의 관리를 요청한 사실에 대해, 이는 당과 함께 발해를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 전에 흑수말갈이 돌궐에 토둔을 요청할 때는 발해와 상의 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발해가 흑수말갈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흑수말갈이 상의없이 단독으로 당의 관리를 요청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바로 흑수말갈이 발해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며 이는 나아가 불녈.월희.철리말갈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발해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반면 대문예는 흑수말갈의 토벌은 필연적으로 당과의 전쟁을 야기한다고 반대하였다. 즉 고구려가 전성기 때에도 당과 대적하다가 멸망하엿는데, 지금 발해는 고구려보다 약소하므로 당과 대립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논리는 그가 오랫동안 당에 인질로 머물면서 당의 문물과 위세를 직접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문예는 당과의 전쟁은 발해의 멸망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반대하였던 것이었다. 대문예가 흑수말갈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고 당과 전쟁이 아닌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무왕과 대문예의 의견 대립이 단순히 두 사람에 그쳤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발해 지배층은 외교노선을 둘러싸고 무왕과 대문예의 의견을 지지하는 두 부류로 나누어졌고, 흑수말갈 토벌을 반대하는 친당파와  흑수말갈을 토벌해야 한다는 반당파로 분리되었다. 이 시기 돌궐은 묵철가한이 사망하고 혼란을 극복하고 세력을 통합한 비가가한이 등장하여 당과 대립하는 중이라 반당파는 돌궐의 지원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무왕은 결국 흑수말갈의 토벌을 강행하였고, 이는 지배층의 의견 대립을 넘어 정국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무왕은 대문예가 극구 반대하자 그를 소환하여 죽이려 하자, 그는 당으로 망명해 버렸던 것이다. 이후 대문예의 송환 문제가 발해와 당 사이에 최대 현안이 되었다. 물론 무왕은 흑수말갈의 문제를 처음에는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하였지만, 외교적 해결이 실패로 무왕은 흑수말갈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무왕과 대문예의 의견 대립 배경에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즉 발해 초기에는 장자상속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문예에게도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고, 게다가 그는 당의 지지를 기대할 수 있는 상태였음을 감안할 때 의견 대립이 격화된 원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왕위 계승 문제를 내포하였다고 보는 시각은 흑수말갈의 토벌과 대문예의 망명 시기를 726년이아니라 730년으로 보는 견해와 결부되어 더욱 정치하게 전개되었다. 728년 무왕의 적자 대도리행의 사망으로 대문예가 차기 후계자로 급부상하게 되자 726년 흑수말갈의 기미주화로 말미암아 친당파와 반당파 간에 대립은 더욱 복잡하고 심각해져 내전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따라서 대문예의 망명은 반당파에 의한 친당파의 일소라는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왕위계승 문제는 발해 초기 왕권의 취약성과 관련되는데, 지배층은 물론 건국집단이었고 건국에서 영역 확장까지의 과정을 볼 때, 이들은 군사집단의 성격이 강했다. 대문예가 흑수말갈 토벌군 사령관으로 국경에 이르러 다시 토벌을 반대한 것은 결과적으로 왕권의 취약성을 나타낸 것으로 무왕은 대문에의 반발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대문에가 국경에서 다시 상소를 올리자 무왕은 노하여 종형 대일하를 보내 문예를 대신하여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대문예는 소환하여 죽이려 하였다.그러자 대문예는 당으로 도망쳤고 당은 그의 망명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죄효위장군을 제수하였다.

 

무왕대 활발한 영역 확장은 국가적 토대를 확보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왕권 강화가 수반되었고, 그것은 다른 한편 건국 집단과 마찰을 야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점재된 내적 갈등 요소는 외적 충격이 가해질 때 전면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발해는 건국 전후 과정에서 돌궐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과 돌궐의 일시적 화친 속에서 발해는 당과 국교를 수립하고 당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해서 발해에 주목했지만, 발해는 당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당은 흑수말갈을 통해서 발해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대당교섭 이후 발해는 활발한 교섭을 행하였지만, 발해의 외교노선이 친당 일변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발해 지배층은 친당파와 반당파로 자연적으로 분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이 흑수말갈에 기미주를 설치함으로써 발해는 대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친당파와 반당파 간에 갈등은 증폭되었다. 흑수말갈에 대한 토벌 방침은 결국 반당파가 친당파를 누르고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문예가 토벌군 사령관으로서 국경에 이르러 다시 불가 상소를 올린 점은 친당파 세력도 만만치 않았음을 반증한다. 결국 발해 지배층 내부에서 양파 간의 외교노선상의 의견 차이는 대문예의 망명을 전후하여 정치세력 분열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발해의 등주 공격

 

발해의 등주 공격732년 발해당나라등주를 선제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등주 공격
날짜 732년 겨울
장소 당나라 등주, 발해신라의 국경선
결과 발해, 신라 압박 성공
이유 당나라흑수도독부를 설치
교전국
당나라
신라
발해
지휘관
대문예 발해 무왕
장문휴

 

 

발해 무왕은 발해의 영토를 계속하여 확장시켰다. 그러나 발해의 북쪽에 위치해 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다른 말갈 부족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마침 흑수말갈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자, 당나라는 흑수말갈을 "흑수주"(黑水州)라 부르며 직접 통치를 시도하였다.

 

이에 무왕은 아우 대문예(大門藝)로 하여금 흑수말갈을 치도록 명하였으나, 흑수말갈을 공격하면 당의 공격을 받을 것을 예측한 대문예가 이를 거역하였다. 그러나 무왕의 완강한 반대로 대문예는 흑수말갈 정벌에 나섰으나 또 다시 공격의 부적절함을 고하였다. 그러자 격노한 무왕은 아우 대문예를 처형하려 하였고, 대문예는 결국 당나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에 당나라의 현종은 대문예를 환대하였고, 대문예를 "좌효기장군"(左驍騎將軍)에 봉하였다. 발해는 대문예를 송환하려고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인안(仁安) 13년 9월, 무왕은 장문휴(張文休)에게 산동반도의 등주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장문휴는 등주를 기습 공격하여 점거하고,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당은 당황하여 신라인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을 통해 신라와 연락하여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발해의 남부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발해는 이 사건으로 주변국에 위세를 보이게 되었고, 신라와 당은 나당 전쟁 이후 처음으로 우호적인 관계로 변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