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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2 : 발해의 역사 5 (발해 건국과정 1) 본문
한국의 역사 202 : 발해의 역사 5 (발해 건국과정 1)
1. 보장왕 모반과 대조영 집단의 강제 이주
당은 677년 요동성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이동시키는 한편,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을 요동으로 귀환시켰다. 나당전쟁의 패배 이후 요동 지역만이라도 기미지배를 통해 안정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당의 시도는 한꺼번에 위기를 맞이했다. 바로 안동도호부를 위해 유민을 무마해야 할 보장왕이 말갈과 모반을 꾀하였던 것이다. 보장왕은 모반이 사전 발각되어 공주(지금의 사천성 공협)으로 유배되고 이에 관련된 유민은 하남과 농우의 여러 주로 다시 강제 이주되었다.
보장왕을 견제하기 위해 안동도호부에 파견된 남생은 679년 5월 29일 사망하였다. 한편 630년 멸망한 돌궐은 이 부렵부터 당의 지배에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679년 돌궐은 정주를 침입하는 한편 해와 거란을 선동하여 영주를 침략하도록 하였다. 이때 남생의 아들 천헌성이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정양군 토벌대사에 임명되어 출정하였다. 보장왕은 내부적으로 남생의 사망과 돌궐 및 해. 거란의 침략을 계기로 고구려 부흥 운동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갈은 고구려의 수.당 전쟁에 동원되어 참전하였고, 고구려가 멸망후에는 나당전쟁에 참여하였지만, 고구려 유민과 반당투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 말갈제부는 해체되었지만 속말말갈은 비교적 온전하게 존재하였다, 보장왕은 속말말갈과 연계하려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어쩌면 남생의 아들 천헌성이 보장왕의 모의를 사전 적발하여 당에 밀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으로 669년 영주로 강제 이주 시점은 고구려 멸망 이후라고만 사서에 막연히 기록되어 있다. 사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대조영과 걸사비우가 681년 보장왕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강제 이주되는 과정에서 영주에 거주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 유사 등의 사서에서 대조영 출신을 '고구려 별종', '고구려에 예속된 속말말갈'이라고 달리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상이한 기록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그가 머무른 곳이 영주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669년이나 681년의 강제 이주에서 고구려 유민의 최종 목적지는 하서.농우 등 당 내륙 지역인 데 반해 대조영과 걸사비우 등은 그 경유지인 영주에 머물렀던 것이다. 영주는 당의 동북방면의 전진기지로서 이곳에는 주로 거란이나 말갈이 거주하였다. 거란의 경우 이진충과 함께 난을 일으킨 손만영은 4대에 걸쳐 영주에 거주하였고, 속말말갈의 경우 수대에 돌지계 집단, 당 초기에는 오소고 부락이 고구려의 압박을 피해 귀속한 이래로 줄곧 영주에 거처하였다. 이들은 유목 또는 반농반렵 생활을 통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기 때문에, 당은 이곳에 집중적으로 기미주를 설치하였다. 이 점에서 고구려 멸망 이후 대부분 당으로 강제 이주되었던 백산말갈도 영주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고구려 유민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당이 고구려 유민을 내륙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 데는 이들이 농경민이라는 점도 있지만 영주에 집중적으로 배치된다면 말갈까지 규합하여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다면 곧바로 요동 지역까지 파급되어 안동도호부 자체가 붕괴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당은 고구려 유민을 멀리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키되 집단 배치를 피하고 여러 곳에 분산 배치하였다. 물론 영주가 경유지인 만큼 강제 이주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이 잔류하기도 하였지만, 그 규모는 그리 크기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서에 대조영이 두 가지 출신으로 기록된 것은 그가 영주에 거주하게 된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걸사비우의 경우 고구려와 관련이 없는 말갈로만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양자간에는 어느 정도 종족적 차이는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대조영을 고구려 옛 장수라고 한 신라측 기록을 신뢰한다면, 그는 반당투쟁의 실패 이후 속말말갈 지역으로 간 고구려 장수일 가능성이 높다.
2. 이진충의 난과 안동도호부
영주에는 거란족과 말갈족, 그리고 고구려인 등이 혼합 집거하였다. 696년 5월 송막도독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를 점령하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흉년이 들어 거란족이 굶주리고 있음에도 조문홰가 진휼을 하지 않고 오히려 거란족 추장들을 노복처럼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더 근원적인 배경으로 687년 돌궐의 부흥에 따라 당의 북방 기미체제가 전면적으로 붕괴된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당시 당의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식병론(병사를 휴식시킴, 감군책)을 주장하는 등 대외정책에서 소극적이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진충의 난은 이후 하북 지방을 중심으로 4년간 지속되었다. 이진충의 난이 기미지배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영주에 거주하던 다양한 종족들도 가세하였다. 그리고 그 연장선 상에서 발해가 건국되었다.
이진충의 난은 696년 5월 송막도독 이진충과 귀성주 자사 손만영이 거병하여 영주를 함락하였다. 이진충은 영주에 머물고 있었고, 손만영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8월에는 평주(지금의 하북성 노룡)의 협석곡에서 당군을 대패시켰다. 게다가 9월에는 돌궐의 묵철가한이 양주(지금의 감숙성 무위)를 침략하여 도독 허흠명을 사로 잡았다. 이로써 당은 동북방면의 지배력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북 방면도 위태롭게 되었다.
9월 당은 건안군왕 무유의를 청변도 행군총관에 임명하여 거란을 토벌하게 하는 동시에 돌궐에게 혼인 및 포로 반환을 조건으로 거란의 배후를 습격토록 밀약을 맺었다. 때마침 이진충이 사망하여 일시적으로 거란의 세력은 약화되었으나 손만영이 이를 수습하여 남하하였고, 당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탓인지 돌궐도 697년 1월 다시 당의 영주와 승주를 침략하였다. 한편 무유의가 이끄는 당의 토벌군은 다시 평주의 동협석곡에서 거란군에게 대패하였다. 다급해진 당은 묵철을 가한에 책봉하고 돌궐의 요구대로 모두 응하기로 약속하고 화친을 맺었다.
697년 6월 유주(지금의 북경)로 진격하려던 손만영은 배후를 걱정하여 돌궐의 묵철가한에게 함께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은 거란의 약점을 노출시켜, 돌궐과 당이 함께 거란군을 공격하는 바람에 크게 격파되었고 손만영도 사망하였다. 이로써 이진충의 난은 일단락되었다.
698년 6월 돌궐은 혼인 문제로 당이 약속를 지키지 않자 8월부터 정주와 조주 등 하북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당은 9월 적인걸과 설눌을 각각 하북도 행군부원수와 안동도경략으로 출정시켰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돌궐 주도하에 거란군이 격파된 이후로 거란과 해는 돌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돌궐이 하북지방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무렵 거란 잔당들은 여전히 요동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대조영과 걸사비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란 출신 이해고가 이를 토벌하고 개선한 것이 700년 7월이었다.
3. 대조영 집단의 동향과 당의 대응
이진충의 난이 요동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영주에 거주하던 대조영과 걸사비우의 동향은 아래와 같다.
'구당서'와 '오대회요'를 보면 이진충의 난이 발발한 후 대조영과 걸사비우가 각각 무리를 이끌고 요동에 일차적으로 정착하였고, 이해고의 토벌을 받아 걸사비우가 폐사하자 대조영이 무리를 규합하여 천문령에서 이해고를 격파하게 된다.
대조영이 요동에 정착하기까지는 걸걸중상이 주도하였다. 걸걸중상은 거란군에서 사리라는 군 지휘관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고 당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거란의 잔당으로 간주하여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물론 영주에 거주하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이진충의 난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진충은 흉년을 이유로 거병하였기 때문에 거란족을 비롯한 이민족이 잡거하던 영주에서 함께 거병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망국 이후 몇차례의 반당투쟁을 경험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경우 그 가능성이 더욱 높을 것이다.
거란은 이진충의 반란간 696년 9월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였고, 697년 1월에는 요동도독 고구수에게 격퇴당하였다. 그리고 697년 5월에는 설눌을 따라 출정한 고문 부자가 마미성에서 전사하였다. 이때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이진충의 난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697년 6월 손만영의 사망 이후 거란이 와해되자, 요동 공격에 참여하였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자연히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고 이 때문에 당은 이들에게 각각 진국공과 허국공으로 임명하여 회유하려 하였던 것이다.
당의 회유책에 걸사비우는 거부한 반면 걸걸중상은 상대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어쨌던 당은 회유책이 성공하지 못하자 거란 출신의 이해고를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케 했다.
이해고는 손만영 사망 이후 당에 항복하였고 당은 그의 인품을 보고 다시 등용하여 그를 장수에 임명하여 토벌군을 이끌도록 한 것이다. 이해고가 거란 잔당 토벌을 끝내고 개선한 것이 700년 7월이었다. 따라서 이해고가 걸사비우를 폐사시키고 천문령 전투에서 대조영에게 패배한 것은 그 이전이 된다. 이에 근거하여 발해의 건국 시기도 이즈음으로 파악된다. 일본측 기록은 698년에 건국된 것으로 나오며, 이해고의 토벌도 698년이며 개선은 700년에 이루어진 것이다.
697년 당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에게 회유책을 구사하다가 698년 무렵 이들을 토벌하게 된 것은 안동도호부가 698년 6월 안동도독부로 축소되고 요동도독 고구수가 안동도독에 임명되었다. 따라서 고보원을 충성국왕에 임명하고 걸사비우와 걸걸중상을 회유하려던 것은 698년 초반에 계획이 수립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 당은 돌궐과 당의 혼담이 깨지자 돌궐 토벌을 진행하는 한편 이해고로 하여금 요동 지역의 거란 잔당을 토벌토록 하였다. 이해고는 걸사비우의 말갈집단을 격파하고 걸걸중상의 뒤를 이은 고구려 유민을 지휘하는 대조영을 천문령(길림성 합단령)까지 추격하였으나 대패하고 물러났다. 당은 이해고가 패배하자 설눌로 하여금 이해고를 지원토록 했다.
대조영 집단이 천문령 전투에서 당에게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목단강 유역의 동모산까지 이동하였던 까닭은 설눌의 뒤이은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해고와 설눌은 거란이 돌궐에 복속하여 교통이 두절되었기 때문에 대조영을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고 다시 요동 지역으로 토벌 방향을 돌렸다. 이즈음 거란 추장 이해락이 700년 당에 항복한 후 등용되어, 압록강 일대에서 말갈을 섬멸하고 유관 이북에서 거란을 소탕하였다. 압록강 일대의 말갈족은 대조영 진영의 동모산 일대로 도망하여 발해 건국에 동참하였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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