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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3 : 발해의 역사 6 (발해 건국 과정 2 :고왕 대조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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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3 : 발해의 역사 6 (발해 건국 과정 2 :고왕 대조영)

두바퀴인생 2011. 4. 5. 04:03

 

 

한국의 역사 203 : 발해의 역사 6 (발해 건국 과정 2 : 고왕 대조영)

 

제1대 고왕 대조영

 

고왕(高王, ? ~ 719년, 재위: 698년 ~ 719년)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인 발해(渤海)의 시조로서, (大)이고, 조영(祚榮)이다. 대조영은 대중상(大仲象, 걸걸중상, 대걸중상)의 아들로서, 옛 고구려의 장수이다.

 

대조영의 출신 민족에 대해서 대한민국북조선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고구려인이었을 것이라 주장하지만, 중국일본, 러시아의 역사가들은 대개 속말말갈족에 가까울 것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다.

 

 

 생애

 고구려 무장

구당서에 따르면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이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남북한의 학자들은 대조영을 옛 고구려의 무장으로 보고 있다.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사망한 직후 그의 세 아들인 연남생(淵男生)과 연남건(淵男建), 연남산(淵男産)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이 많이 쇠진한 상태였는데, 결국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연남생이 당나라(唐)에 항복했다.

 

당나라는 667년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는 수십 개의 고구려 성들을 함락시키고,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결국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고구려 부흥 운동과 발해 개국

고구려가 멸망한 후 옛 고구려 영토에는 당나라가 통제하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세워지고, 남아있던 고구려 세력 또한 671년 안시성 함락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분산 정책에 따라 유민을 여러 지역으로 끌고 갔는데, 대중상 부자도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696년 영주에서는 당나라의 지나친 억압 정책에 대한 거란족(契丹)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생겨난 혼란을 틈타 대중상과 말갈의 족장 걸사비우(乞四比羽)는 영주에서의 이탈을 감행했고, 측천무후(側天武后)의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동쪽으로 이동, 당의 장수 이해고(李偕固)가 이끄는 당나라의 추격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때 걸사비우와 대중상이 죽고, 대조영은 남은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을 이끌게 되었다. 대조영은 698년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의 추격군을 격파해 승리하고 동모산(東牟山, 지린 성 돈화 부근)에서 진국(震國)을 건국하였다. 당의 북진 정책을 위협하던 돌궐(突厥)과 손을 잡아 대당 견제세력을 구축했다.

 

치세

고왕은 705년에 당과 화친하였고, 713년에는 당나라의 정식 책봉을 받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해져 국명을 발해(渤海)로 고치게 되었다. 719년, 대조영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대무예가 왕통을 이었다.

 

국제 관계

고왕과 발해에 관해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발해 말갈의 대조영, 혹은 고구려의 별종 등으로서술하고 있지만, 《신당서》(新唐書)에서는 본래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속말갈의 한 일파로 성은 대씨이며, 고구려와의 종족 관계를 모호하게 기록하였다. 한편 한국 기록인 《신라고기(新羅古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고왕을 고구려 장수라고 표기하였다.

 

당나라는 발해를 고립시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고왕은 돌궐과 동맹 관계를 형성하며 고립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713년, 당나라는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 및 홀한주도독부도독(忽汗州都督府都督)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발해의 세력이 건국 초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해졌음을 의미한다.

 

발해는 신라와의 관계도 대체로 좋지 못했는데, 신라의 유학자 최치원(崔致遠)은 "발해의 왕인 대조영이 신라랑 수교를 맺고 싶어 사람을 보냈는데, 신라의 왕인 효소왕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대조영에게 대아찬이라는 관작을 하사하였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신라와 발해는 이 시기에 몇 차례 교류가 있었으나 친선 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이는 첫째로 양국이 그 무렵에는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아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고 신라가 보기에 그 무렵에 발해는 그저 말갈 부족의 한 종류로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 발해가 본격적으로 관계를 맻기 시작한 것은 8세기 초반에 발해가 본격적으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양국이 함흥 일대에서 직접 국경을 접하면서부터이다.

 

가족관계

 참고

 

연표

연도 성명 연호 설명
668 고구려 멸망. 대중상, 식구를 이끌고 영주로 거처를 옮김.
698 대조영 인구 10여 만호, 군사 정예군 수만 명으로 대진 건국. 고왕 즉위.
713 국호를 발해로 고침.
719 대무예 고왕 붕어. 무왕 즉위, 연호 인안.
732 인안 14년 장문휴를 보내어 해군으로 당의 등주를 공격.
733 인안 15년 당 현종, 대문예를 보내어 발해 공격. 신라도 협조하였으나 폭설로 중지.
737 대흠무 인안 19년 무왕 붕어. 문왕 즉위, 연호 대흥.
756 대흥 20년 상경으로 천도(遷都).
793 대흥 57년 문왕 붕어. 동생 원의가 즉위했으나 수 개월 후 사망.
793 대화여 성왕 즉위, 연호 중흥.
794 대숭린 중흥2년 성왕 붕어. 강왕 즉위, 연호 정력.
809 대원유 정력16년 강왕 붕어. 정왕 즉위, 연호 영덕.
812 대언의 영덕4년 정왕 붕어. 희왕 즉위, 연호 주작.
817 대명충 주작6년 희왕 붕어. 간왕 즉위, 연호 태시.
818 대인수 태시2년 간왕 붕어. 선왕 즉위, 연호 건흥. 신라를 공격, 북쪽 부락을 공략.
830 대인수 건흥13년 선왕 붕어.
831 대이진 건흥14년 대이진 즉위. 연호 함화.
857 대건황 함화27년 대이진 붕어. 대건황 즉위.
871 대현석 ?15년 대건황 붕어. 대현석 즉위.
894 대위해 ?24년 대현석 붕어. 대위해 즉위.
906 대인선 ?13년 대위해 붕어. 대인선 즉위.
906 ?7년 신라와 비밀리에 연계를 맺음.
924 ?19년 거란의 발해 침입, 요주자사를 죽이고 백성들을 빼앗음.
925 ?20년 발해인 장군 500여 명 고려로 망명. 12월, 거란이 발해에 침입.
926 ?21년 거란군, 부여부 점거. 발해 멸망. 국명을 동단국으로 바꾸고 거란 세자가 지배

 

 

 

발해 초기의 영역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한 대조영은 연이은 당의 토벌을 피해 멀리 송화강을 건너 '동모산'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진국(振,震國)'을 자칭하였다. 그 시기는 698년 후반으로 추정된다. 진국 대신 '발해'가 국호로 사용된 것은  713년 대조영의 '발해군왕' 책봉을 계기로 좀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발해 국호에 대해서는 여러기지 이설이 있으나 추후 살펴보기로 하겠다.

 

동모산은 지금의 중국 '길림성 돈화시'의 '성산자산성'으로 비정된다. 발해가 이곳에서 건국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주요 지역(평양성, 요동성, 국내성,부여성 등)이 장기간 전란과 멸망 이후 격동으로 피폐해지고, 그 주민은 대규모로 당 내륙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호구수가 격감하여 이들 지역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에는 부적당하였기 때문이다.

 

당의 토벌이 철회되지 않은 상태에서 건국한 발해는 우선 대외적인 안정을 구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대조영은 우선 당을 견제하기 위해 돌궐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고,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 건국을 알리고 화친을 요청하였다. 699년 신라 효소왕(8년)은 대조영에게 '대아찬'을 재수하였고 일단 발해를 인정하였다.

 

이처럼 대조영은 당의 토벌을 벗어나기 위해 당과 대립하던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외적 안정을 이루었다. 따라서 신흥 국가인 발해에게 시급한 것은 다음은 영역 확보였다. 발해의 서쪽은 당, 남쪽은 신라가 있었지만, 고구려 옛 땅인 요동 지역은 대부분 방기된 상태였다.

 

발해의 영역은 '구당서'는 사방 2천 리, '신당서'는 사방 5천 리로 표기하고 있다. 아마 신당서는 발해의 전성기 때의 영역일 것이다. 병력 수는 두 사료 모두 공통적으로 정예병 수는 10만 에 가까운 수치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10여 만 호의 인구와 사방 이천리의 영역은 고왕~무왕대의 발해 영역으로 보면 타당할 것이다.

 

무왕 대에는 부여.옥저.변한.조선 등 해북의 여러 나라를 차지하였다고 기록에 나오지만, 국명에 오류가 있다. 그렇지만  고구려의 옛 영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건국 직후 발해의 세력 범위에 대해서는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 유민과 '속말'.'백산말갈'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하에 속말.백산말갈의 거주지와 고구려 발상지인 '압록강'.'혼강' 유역으로 파악되며 그 영역은 속말말갈의 거주지인 '이통하' 부근에서 북류 '송화강' 상류 유역, 그리고 백산발갈의 거주지인 함경도에서 연변을 포함한 '돈화' 지구에 이르는 일대의 지역, 그리고 혼강.압록강 유역 등에 걸친 광대한 지역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초기 국호에 대한 논란

발해사의 기본사료인 구당서 '발해말갈전'과 신당서의 '발해전'은 주지하듯이 대조영의 출신에 대해 각각 '고구려 별종'과 '속말말갈' 출신으로 달리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초기 국호에 대해서도 각각 '진국(振國)'과 '진국(震國)'으로 달리 전하고 있다.  신당서에는 발해의 문물제도에 대한 풍부한 기록을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인정되어 신당서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진(振)은 불교의 '동방대진나'와 '주역'의 '제출호신'에서 나온 것으로 '동방'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구당서'와  '책부원귀' 등 오래된 기록에 국호가 '진(振)'으로 표기되어 있고, '진(震)'이 의미하는 동방은 당에 대한 상대적 위치가 동쪽인 점에서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조영이 과연 이것을 국호로 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신당서는 구당서의 진(振)과 뜻이 통하며 당을 중심으로 동방의 의미를 갖는 진(震)으로 고쳤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진국(振國)'이 당의 실록에 근거한 '구당서, 책부원귀, 자치통감'뿐 아니라, 동시대 신라의 기록에도 대조영이 건국하였을 때의 국호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당서는 오대의 혼란기에 당 전반기의 실록과 역사를 편집한 데 불과하지만 풍부한 원사료를 전한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당서는 당 후반기 사료가 부족하고 번잡한 서술을 보완하는 데 성과는 있었지만, 구당서의 내용을 너무 삭제하였고 화려한 문장에 치중하여 고증을 소홀히 한 탓에 사실 관계가 불분명할 뿐 아니라 뒤바뀐 곳도 있었다. 그래서 자치통감도 신당서 보다 구당서를 취하였다.

 

이러한 제반 사항을 고려해 볼 때, 발해 초기 국호는 구당서의 기록대로 진국(振國)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진(振)의 의미는 '나라의 위력을 사방에 크게 떨치는 큰 나라'로 보는 견해가 일찍이 제기되었고, 이와 달리 인민을 구제하는 뜻의 '진민(振民)'과 결부시켜 고구려 유민을 구제한 사실에서 유래하였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조영이 건국 직후 대당견제의 일환으로 돌궐과 신라 등에 활발하게 사신을 파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전자가 좀더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된다.

 

713년 당은 '최흔'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발해군왕.홀한주도독'에 책봉하자 이때부터 대조영은 매년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는 양국 간에 정식 국교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당서에는 '이때부터 당은 말갈의 호칭을 버리고 발해로만 통칭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에 의하면 대조영은 발해군왕에 책봉됨으로써 국호를 진에서 발해로 교체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이 713년 발해와 수교 이후 바로 발해로 국명을 호칭한 것은 아니다. 구당서 본기에는 '발해말갈'로 표기하고 있고, 책부원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당이 발해로 통칭한 것은 713년 이후가 아니라 741년 이후로 판단된다. 725년 '태산'에서 행해진 '봉선' 행사에는 각국의 사신들이 대부분 참석하였는데, 이때 '발해'를 '말갈'로 호칭하고 있다. 따라서 책봉을 계기로 후대에 국호가 발해로 바뀌었다는 '신오대사'란 사서의 견해가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발해와 당의 국교 수립 과정

당은 '이진충의 난'을 돌궐의 도움으로 평정하였으나 거란과 해가 돌궐에 복속하게 됨에 따라 동북방면의 요충지인 영주를 회복하지 못했다.  또한 안동도호부가 안동도독부로 축소되고 요동 지역의 지배력도 약화되었다. 그리고 발해라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당은 돌궐과 대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위를 점하기 위해 거란을 평정하는 데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당은 우선 이진충의 난으로 상실한 영주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는데, 702년 '위원충'을 '안동도 안무사'로 삼고, 704년에는 '당휴경'을 '유주.영주 도독 겸 안동도호'에 임명하였고, 705년에는 '안동도독부'를 '안동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원래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영역의 관할을 위해 설치되었지만, 이때 안동도호가 유주와 여주 도독을 겸임하였다는 점에서 도호부를 부활시킨 목적이 영주 지역을 회복하려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시기에 당은 시어사 '장행급'을 파견하여 발해에 대한 토벌 방침을 철회하고 대조영을 초위함으로써 국교를 수립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에 대조영은 왕자를 파견하였고 당은 대조영을 책봉함으로써 국교를 수립하려 하였으나, 거란과 돌궐이 당의 변경을 침공함으로써 책봉이 실현되지 못했지만, 당은 영주 회복을 위해 거란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발해에 접근하였던 것이다.

 

발해와 당의 국교 수립은 이로부터 8년이 지난 713년이 되어서야 실현되었다. 이 시기 당의 현종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710년 10월 처음으로 유주 지역에 '유주절도사'를 신설하고 안동도호를 겸임시켰다. '절도사'는 '기미지배'에 입각한 도호부를 대체하는 새로운 '무력변방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이 처음 유주에 설치되었던 것도 그 목적이 영주를 탈환하는 데 있었다.

 

당은 돌궐과 결혼동맹으로 화친을 맺고 712년 6월 영주를 회복하기 위해 해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1월에는 해와 거란이 어양(漁陽)을 침공하였다. 더 이상 이들을 토벌할 여유가 없었던 당은 이 직후에 발해와 국교를 수립한 것은 거란 배후에 위치한 발해의 중요성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당은 발해와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요동 지역을 안정시키고 이를 통해 거란의 배후를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즈음 돌궐의 묵철가한 말기에 쇠약해진 틈을 타서 거란의 '이실활(李失活)'이 항복해옴으로써 어부지리로 영주를 회복하게 되었고 717년에야 '영주도독부'를 복치하였다.

 

718년 거란의 이실활이 죽고 그의 사촌 동생 '사고(娑固)'가 즉위하였다. 그런데 720년 사고는 '가돌우'와 권력을 다투다 패하여 영주로 달아났다. 이에 안동도호 '설태'가 당군과 사고의 무리를 거느리고 가돌우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여 설태는 생포되고 사고는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영주는 크게 동요하게 되어 영주도독 '허흠담'은 '유관'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가돌우는 사고의 사촌동생 '울우'를 추대하여 당에 사죄사를 파견하였다. 이에 당은 가돌우를 용서하고 울우를 '송막도독'에 임명하였다.

 

'책부원귀'에 의하면 당은 거란과 해를 토벌하기 위해 720년 9월 좌효위 낭장 '장월'을 말갈(발해)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은 단독으로 거란을 토벌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과 발해의 연합에 의한 거란 토벌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발해는 이 제안을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이 무렵 돌궐은 묵철가한 사후 혼란을 '비비가한'(716-733)이 수습하면서 세력을 회복하고, 720년 11월 다시 당을 공격하였다. 이는 거란의 가돌우가 사고를 쫓아내고 권력을 잡았고 안동도호 설태가 당군과 사고의 무리를 이끌고 가돌우를 공격하다 설태가 생포되고 사고가 죽임을 당하였다. 이는 당을 배반하고 돌궐에 귀속한 것을 의미한다. 이후 가돌우는 울우로 하여금 사죄사로 당에 보내 책봉을 받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무렵 발해는 719년 3월 대조영이 사망하고 아들 무왕 대무예가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독자적으로 대조영에 대해 고왕(高王)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스스로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은 바로 당의 정삭(正朔)을 거부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당으로부터 발해군왕이라는 책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에 대한 독립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