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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1 : 발해의 역사 4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지배정책) 본문
한국의 역사 201 : 발해의 역사 4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지배정책)
1. 안동도호부 설치
당은 668년 12월 5부 176성 697,000호로 이루어졌던 옛 고구려 영역에 당의 지방제도를 적용하도록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재편하고, 상급 통치기관으로 안동도호부를 평양성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현지 지배를 위해 고구려 지배층 가운데 유공자를 선발하여 도독.자사.현령을 임명하여 당 관리와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를 총괄하는 안동도호에 임미시로 설인귀가 임명되었는데, 도후부 병력은 2만이었다.
이처럼 당은 정복지역에 부.주.현 등 당의 지방제도를 설치하되 현지인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편제된 지역을 '기미주'라고하며, 현지인을 통한 간접 지배방식을 '기미지배'라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의 경우 당 관리가 함께 지배에 참여하는 형태를 띠었다는 점에서 순수한 기미지배라고 보기는 어렵다.
669년 2월 당 고종은 이적이 고종의 칙명에 따라 기미주로 편제하는 계획을 올리자, 이를 인준하고 일차적인 실무는 유인궤에게 위임하였다. 아마 이와 동시에 설인귀가 평양성에 파견되어 유인궤와 함께 기미주 편제를 위한 구체적인 실무를 논의하였다.
얼마 후 설인귀는 신성(요녕성 무순)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고구려 유민을 선발하여 관리에 임용하였다. 이는 신성 지역을 기미주로 편제하였음을 의미한다.
뒤이어 670년 4월, 설인귀는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 토벌에 나섰다. 설인귀는 평양성에 부임한 지 1년 만에 신성으로 이동한 셈이다. 설인귀가 신성으로 이동한 것은 구당서,삼국사기,자치통감의 사료에 의하면 고구려 유민의 신라 투항과 고구려 유민의 강제 이주를 위해 이동한 것으로 판단된다. 669년 2월 보장왕의 서자 안승이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로 투항하였고, 보장왕과 남건 등 고구려 지배층을 다수 장안으로 압송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미지배를 본격적으로 실시하기도 전에 반발에 부딪힌 것이다. 당은 그 여파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 기미주 편제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고구려 유민들을 당의 내륙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킬 필요가 있었다. 당은 고구려 유민 28,200호를 비롯하여 수레.소.말.낙타를 내주(산동성 내주)와 영주(요냥성 조양)를 경유하여 당의 내륙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그 결과 빈약자들만 남았다고 한 점에서 28,200호는 유력한 민호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유민은 내주와 영주를 경유하여 장강.회하 이남(지금의 강소성 일대), 및 장안 서쪽의 여러 주(지금의 감숙성,청해성 일대), 즉 당의 서부와 남부의 변경 지대로 옮겨졌다. 강제 이주된 이들 고구려 유민은 평양성.국내성 지역과 요동 지역 등 고구려 주요지역에서 선별된 사람들이었다.
안동도호부 설치에 따라 669년 후반기 유인궤는 안동도호부와 주둔군 2만을 제외한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강제 이주 대상 고구려 유민을 인술하여 회군하였다. 귀국한 유인궤는 사직을 요청하였고 고종은 승인하였다. 14일 후에는 요동지역에 주현을 설치하였다.
668년 12월에 결정된 옛 고구려 지역에 대한 기미지배 방침은 1년간 준비 기간을 거친 다음에 670년 정월부터 실시되었다. 그 당시 안동도호부는 옛 고구려 전 지역을 포괄하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아직 함락시키지 못한 성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관리가 파견된 곳은 몇몇 주요한 도성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차적으로 관리가 파견된 것으로 판단된다.
2. 고구려 유민의 반당 투쟁
한 무제 이후 기미지배는 당의 주변국에 대한 군신질서를 강요한 것으로 영역화(내지화).기미.책봉의 관계로 나타났다. 당시 기미지배는 외지에 대한 부주현제의 확대 적용과 토착 수령에 의한 지배의 요인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원칙이 공존하는 형태였다.
당의 이러한 기미지배는 백제 멸망 후에도 적용하였는데, 즉 5부 37군 200성으로 이루어진 백제 영역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5도독부 37주 200현으로 재편하고, 현지 유력자를 도독.자사.현령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는 달리하여 두 가지 특지이 보이는데, 첯째는 5부 176성이라는 고구려 지방제도와 무관하게 9도독부 42주 100현이라는 당의 지방제도를 강제하였고, 둘째는 현지 유력자들을 도독.자사.현령에 임명함과 동시에 당 관리가 함께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고구려의 기미주는 백제에 비해 내지화 경향이 짙은 정책이었다.
유공자란 글자 그대로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당에 협력하거나 투항한 지배층을 의미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666년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당으로 달아났던 남생을 포함하여 국내성 등 6성이나 667년 이적이 신성을 공격시 항복했던 신성을 비롯한 16개 성의 성주들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기미주 편제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 28,200호가 강제 이주당했고 이러한 강제 이주는 평양 지역과 요동 지역에서 선별된 유력자라는 점에서 강제 이주가 미친 불안과 동요는 전지역으로 파급되었을 것이다. 또 기미지배에 참여한 현지의 유력자의 경우에도 당 관리가 함께 참여함으로써 반발을 불러 왔을 것이며 유력자 기반을 축소하는 것과 감시.통제는 반당투쟁에 나서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당은 안동도호부 설치 후 기미지배를 전개하면서 고구려 유민을 강제 이주시키고 관리들을 참여 시키면서 도호부가 안정되었다고 판단하고 설인귀를 토번으로 출정토록 지시되여 떠나자 그 직후 평양 지역에서 검모잠에 의한 반당투쟁이 발발하였다.
3. 영역화에서 기미지배로 전환
고구려 유민들의 반당투쟁에 대한 안동도호부의 대응은 아래와 같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670년 6월 고구려 수렴성 출신 대형 검모잠이 잔민을 수습하여 궁모성에서 패강에 이르러 당의 관리 및 승려 법안을 죽이고 신라로 향했 갔다. 서해의 사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을 만났다, 그를 한성에서 맞아 임금으로 삼고 소형 다식을 신라에 보내 망국의 슬픔을 고하였다...문무왕이 그를 나라의 서쪽으로 보내 금마저에 거처케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당서에는 대장 검모잠이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보장왕의 외손 안순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에 당은 조서를 내려 고간과 이근행을 각각 동주도와 연산도 행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토벌케 했다....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고간은 안동도호부 치소를 요동주로 옮겨 안시성에서 반란군을 격파하고, 다시 천산에서 승리하여 신라의 지원병 2천을 사로잡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 사료에서 설인귀의 토번 출정 이후 검모잠이 주도하는 반당투쟁이 신라와 결합하였고, 안시성에서도 고구려 유민들이 현지 유력자에 의해 반당 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은 영역화를 전제로 하는 기미지배를 강요하였기 때문에 현지 유력자들이 주도하는 반당투쟁이 일어났고 당의 토벌이 시작되자 이들은 동북의 말갈이나 남쪽의 신라로 달아났다. 특히 신라와 결합된 반당투쟁은 이후 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이때 신라는 660년에 백제 지역에 설치된 웅진도독부와 663년 계림도독부로 삼은 신라, 고구려 지역까지 안동도호부에서 포함하여 총괄하는 기능을 가졌다. 신라는 백제 통합을 목적으로 당과 연합했었지만, 이 시기에는 웅진도독부와 대립하고 있던 시기로 반당투쟁을 일으킨 고구려 유민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당은 안동도호부에 대한 고구려 유민들의 반당투쟁과 웅진도독부에 대한 신라의 공격이 결합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자, 토번 정벌의 실패로 면직되었던 설인귀를 다시 계림도 총관으로 임명하여 신라와 전쟁을 총괄하는 기능을 가졌다. 671년 7월 26일 설인귀는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내 양측의 입장을 조율하려 했지만 문무왕의 거절로 결렬되었다. 그래서 신라는 곧바로 소부리주를 설치하였고, 당은 신라와 결탁한 고구려 유민의 반당투쟁 세력을 673년까지 안동도호부 밖으로 축출하였다. 곧이어 당은 신라와 전면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674년 당은 설인귀 대신 유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고구려 유민 반당투쟁 진압 실패에 따른 문책성 인사였다. 이제 당은 안동도호부만으로는 신라와 전면적인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듬해 9월 대신라 전선에 20만의 대군을 파견하였다.
나당 전쟁이 전면화되자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는 676년 2월 요동성(지금의 요녕성 요양)으로 퇴각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신성으로 이동하였다. 요동성으로 퇴각하기 직전인 675년 9월 당은 매초성에서 신라군에 대패하였고, 신성으로 이동 직전인 675년 11월에도 기벌포에서 신라군에 대패하였다. 이 두차례의 전투가 당의 안동도호부 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당은 웅진도독부의 기능을 안동도호부 휘하의 건안성(요녕성 개주)으로 옮기고 백제 멸망 후 서주.연주 등으로 강제 이주된 백제 유민을 이 곳으로 옮겼다.
이렇게 볼 때 당은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도호부 휘하의 고구려 유민을 무마할 필요가 있었다. 영역화를 위한 강압적인 기미주 정책을 완하하고 난 뒤 676년 11월 기벌포를 다시 공략하였지만 대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안동도호부는 677년 2월 다시 요동성에서 신성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전에 장안에 있던 보장왕과 부여융을 각각 요동주 도독과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여 요동과 웅진으로 파견하였다. 이는 당 관리들이 철수한 상태에서 구고려 유민과 백제 유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필연적인 조치였다. 그리고 보장왕의 요동 파견과 함께 이미 강제 이주시켰던 고구려 유민들도 함께 요동으로 귀환시켰다. 이 또한 전년에 백제 유민을 건안성 일대로 이주시킨 것과 동일하다.
이에 따라 안동도호부 역활이 축소되었고 보장왕을 통해 요동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긴 것은 고구려 유민들이 복귀함에 따라 위험성이 짙어지자 신성으로 옮긴 듯하다. 또 요동성 일대는 태자하 유역의 수륙 교통의 중심지인데 비해 신성은 동북쪽으로 흔하와 소자하의 합류 지점에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였다. 게다가 이곳에서 동북방면으로 말갈 7부가 거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성은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이 결합할 수 있는 요충지이므로 요동 지역 통제를 위해 이 지역에 위치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남생은 보장왕을 도와 실질적인 실무 업무를 맡았다. 행정은 요동주 도독에게 맡겼다 하더라도 통치방침과 정책의 결정은 역시 안동도호부가 장악한 것을 의미한다. 당은 보장왕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남생을 보낸 것이었다.
당이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기는 동시에 기미지배를 완하한 것은 요동 지역의 안정을 통해 다시금 신라를 정복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679년 이후 신라 정벌 의도가 소멸되자, 안동도호부의 제 기능이 요동 지역 안무하는 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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