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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0 : 발해의 역사 3 (개요 3)

두바퀴인생 2011. 4. 2. 12:13

 

 

 

한국의 역사 200 : 발해의 역사 3 (개요 3)

 

정치

발해는 내부적으로 황제국을 지향하였다. 중앙의 정치조직은 3성(三省)과 6부(六部)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체제를 구성하였다. 3성 6부 밑에는 5감(五監)·9시(九侍) 등의 기구를 두었다.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고구려의 전통을 살려서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이 외에도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중정대, 서적 관리를 맡은 문적원, 중앙의 최교교육기관인 주자감 등이 있었다.

 

발해의 지방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는데(오늘날의 광역시에 해당), 국도(國都)인 상경(上京)과 중경(中京)·동경(東京)·남경(南京)·서경(西京)을 가리킨다. 상경은 당의 장안성(長安城)과 그 규모를 같이하여 외성(外城)·내성(內城)을 두고 시가지를 바둑판같이 구획하였다. 지방행정의 중심인 15부에는 도독을 두어 지방 행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부 아래에는 62주를 설치하여 자사를 파견하고, 그 아래 다시 현을 두고 현승을 파견하였다. 지방행정의 말단인 촌락은 주로 말갈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촌장을 매개로 지배하였다. 최근 러시아연해주에선 발해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가 발굴되면서 연해주가 발해에 속해있었음을 증명하게 되었다.

 

고구려 계승의식

발해의 귀족 및 지배계층은 고구려 유민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2대 무왕은 일본에 보내는 국서를 통하여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라고 주장하며 고구려 계승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3대 문왕 역시 스스로를 고려국왕 대흠무라 자칭하였다.

 

사회

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와 고구려계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 수도를 비롯한 큰 고을에 살면서 노비와 예속민을 거느리고 있었다.

 

발해의 주민 구성은 발해인들로 구성되었다. 이 중 다수를 차지한 것은 말갈인이며, 이들은 고구려 전성기 때부터 고구려에 편입된 종족이었다. 발해 건국 후 이들은 피지배층이 되어 자신이 거주하는 촌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가 행정을 보조하였다.

 

발해의 지식인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고, 때로는 신라 사람과 수석을 다투기도 하였다. 이렇게 발해는 상층 사회를 중심으로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하층 촌락민들은 고구려나 말갈 사회의 전통적인 생활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사용 언어는 발해어로 총칭한다.

 

경제

발해의 수취 제도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조·콩·보리 등 곡물을 거두는 조세, 베·명주·가죽 등의 특산물을 거두는 공물, 궁궐·관청 등의 건축에 농민을 동원하는 부역이 있었다. 발해의 귀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무역을 통하여 당나라의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여 화려한 생활을 하였다.

 

발해는 9세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농업에서는 기후 조건의 한계로 콩, 조, 보리, 기장 등을 재배하는 밭농사가 중심이었다. 철제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고 수리 시설이 확충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도 지었다. 특히, 목축이나 수렵도 발달하여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솔빈부의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모피, 녹용, 사향 등도 많이 생산되어 수출하였다. 어업도 발달하여 고기잡이 도구가 개량되었고 송어, 문어, 대게, 고래 등 다양한 어종을 잡았다. 수공업은 철·구리·금은 등 금속가공업과 삼베·명주·비단 등의 직물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다. 철의 생산량이 상당히 많았고, 구리의 제련술도 뛰어나 좋은 품질의 구리를 생산하였다. 세금으로는 조세, 공물, 부역 등이 있었다.

 

한편 수도인 상경 용천부 등 도시와 교통 요충지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다. 상품매매에는 현물 화폐를 주로 썼으나 다른 나라의 화폐도 함께 사용하였다. 발해는 당나라,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다. 이때 사신과 더불어 상인들이 동행하여 무역하였다.

 

당나라와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는데 당나라는 산둥 반도와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발해의 수출품은 주로 모피, 인삼 등 토산물과 불상, 자기 등 수공업품이었다. 수입품은 귀족들의 수요품인 비단, 책 등이었다.

 

교육

3대 문왕 때 학문 연구 기관인 주자감을 세웠으며, 관리들이 학습시킬 수 있게 서적원이라는 기관을 만들었다. 주자감에서는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교육하였다. 휴학생 중에는 당나라의 빈공과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였고, 이거정 등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유교 지식인으로 활동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정혜공주 묘지와 정효공주 묘지가 세련된 4·6 변려체로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발해에서는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몇 편의 한시가 현재 전하는데, 양태사왕효렴의 작품이 유명하다.

 

문화

 

발해 유적지에 나온 용머리

 

 

발해의 문화는 고구려, 당나라, 말갈의 문화가 섞인 것이었으며, 당나라와 요나라의 역사서에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점을 들어 발해가 고급 문화를 향유했음을 시사한다.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 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다. 또한 정효 공주 묘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이런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발해의 지상 건물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 터를 통해 당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상경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본떠 설계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

 

발해에서 발견되는 절터나 불상 등은 고구려의 양식을 따른 것이 많다. 다른 조각상도 고구려의 것을 닮아서 소박하며 힘찬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자기 공예가 발달하여 가볍고 광택이 있었는데, 그 종류가 다양하였으며, 당나라 사람이 자주 구해갔다고 한다.

 

군사

발해의 군사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지배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

 

외교

대신라 관계

처음에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소원하기도 하고 심지어 적대적일 때도 있었다. 고왕 대조영은 초기에 신라에 사절을 보내 우호관계를 맻을 것을 희망하였고, 신라는 이에 고왕에게 대아찬직을 수여하여 화답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발해를 말갈족의 일부로 파악하고 있었다. 신라 성덕왕(聖德王)이 721년에 국경지대에 설치한 북경장성(北境長城)도 발해가 아니라 말갈족의 침공에 대비한 것이었다. 말갈족은 고구려와 발해에 복속되었던 대를 제외하고 신라를 괴롭혔고 신라는 말갈에 늘 적대감을 품으며 대비해야만 했다.[18] 신라가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임 인식한 것은 726년 무왕의 사절단에 의해서였다.

 

732년 등주를 공격당한 당나라는 발해에 대한 보복전을 개시하였는데, 이 전쟁에 신라를 개입시키고자 하였다. 신라는 이에 응했으나, 폭설을 이유로 군대를 철군시켰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신라는 당나라와 관계가 회복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발해와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그러나 문왕대에 이르러, 발해는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 당나라 못지 않은 문화 선진국이었던 신라와의 교류가 절실했고, 신라도 사이가 안좋았던 일본과의 외교전에서 발해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게 되었다. 양국은 신라도와 북해통이라는 두 국제도로를 이용해 사신을 교환하며 외교, 통상적인 교류를 이어갔다.

 

대당 관계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는 처음에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당나라와 외교관계가 피할 수 없는 과제라 여긴 발해는 결국 713년에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 때부터 당나라와 무역과 외교관계가 왕성해지기 시작했다. 732년 당의 말갈 편입 시도에 대해 발해가 등주 공격으로 대응하여 서로 외교관계가 악화되었으나, 문왕대에 이르러 문화적 교류가 활발히 진행됨에 따라 양국간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발해에서는 문방구를 비롯한 여러가지 당나라의 물품들을 수입하고, 당에서는 모피와 가죽, 그리고 여러가지 산림자원을 수입했다.

 

대일본 관계

727년 발해가 맨 먼저 일본에 개국을 알리기 위한 사신이 도착하는 것으로 두 나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발해와 일본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으나, 후일에는 문화적 교류와 상업적 목적이 더 강했다.

 

남북국 초기에 일본과 신라는 731년에 전쟁까지 벌어질 만큼 험악했다. 일본의 실권자였던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麻呂)는 신라 정토 계획이라는 침략 계획을 꾸미면시 배후에 발해를 끌어들이려고 했고, 이를 위해 758년부터 연이어 발해에 견발해사를 파견했지만 발해는 이미 이시기에 신라와 우호관계를 맻기 시작한 터라 이에 미온적이 되어 결국 일본의 신라 침략 계획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은 대륙과의 교류에 적대국인 신라와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 발해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발해는 자신들의 배로 일본의 견당사를 호송하는 사신을 수차 파견했다.

 

역대 국왕과 연호

  1. 고왕, 재위 698년-719년
  2. 무왕, 재위 719년-737년 - 인안(仁安)
  3. 문왕, 재위 737년-793년 - 대흥(大興), 보력(宝暦)
  4. 폐왕 대원의, 재위 793년-793년
  5. 성왕, 재위 793년-794년 - 중흥(中興)
  6. 강왕, 재위 794년-809년 - 정력(正暦)
  7. 정왕, 재위 809년-812년 - 영덕(永徳)
  8. 희왕, 재위 812년-817년 - 주작(朱雀)
  9. 간왕, 재위 817년-818년 - 태시(太始)
  10. 선왕, 재위 818년-830년 - 건흥(建興)
  11. 대이진, 재위 831년-857년 - 함화(咸和), 시호가 알려지지 않았음.
  12. 대건황, 재위 857년-871년, 시호가 알려지지 않았음.
  13. 대현석, 재위 871년-894년, 시호가 알려지지 않았음.
  14. 대위해, 재위 894년-906년, 시호가 알려지지 않았음.
  15. 대인선, 재위 906년-926년, 시호가 알려지지 않았음.
  • 13대왕 대현석을 경왕, 마지막왕 대인선을 애왕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과거 일본인이 신라의 경애왕과 혼동하여 잘못 만들어낸 오류이다.
  • 발해에는 현재까지 모두 15명의 국왕이 있었다고 추정되지만 13대왕 대현석과 14대왕으로 추정되는 대위해 사이 그리고 대위해와 마지막왕 대인선 사이에 단명한 왕들이 더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 환단고기》의 대진국본기에는 이와는 약간 다른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환단고기》는 학자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위서(僞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발해와 역사서

발해인이 남긴 역사적 사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의 사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 있는 발해에 대한 기록은 《구당서》와 《신당서》, 일연의 《삼국유사》, 유득공의 《발해고》 정도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에 의하면, 18세기의 규장각에서도 발해의 정식 역사서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진위 논란이 있는 자료 중에는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지 않으나 발해 때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서들이 있다.

  • 규원사화》의 토대가 된 《진역유기(震域遺記)》는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귀화할 때 가지고 왔을 것으로 추측되는 《조대기》를 근거로 쓰였다고 한다.
  • 단기고사》는 그 서문에서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이 편찬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발해가 아닌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책들은 그 내용이 시대에 어긋나는 것들이 많아 한국 사학계에서는 위서로 판단한다.

 

발해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 발해 말갈전과 《신당서》 발해전에 전하는데, 모두 발해를 말갈의 나라라고 기록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으로 인식했으나 한국사에서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사를 한국의 역사이고 남북국시대로 주창한 이후 한국사에 적극적으로 포함시키는 흐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발해 이후의 국가

발해가 멸망한 후에 발해의 터에 유민이 여러 나라를 재건하였으나 곧 멸망하였다. 그리고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세운 괴뢰 국가도 존재했다. 이들 중 다음과 같은 나라가 알려져 있다.

  • 동단국(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세운 괴뢰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