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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98 : 발해의 역사 1(개요)

두바퀴인생 2011. 3. 31. 02:50

 

한국의 역사 198 : 발해의 역사 1 (개요 1)

 

개요

.
발해
渤海
698년 ~ 926년
Balhae-Territory in 830.JPG
830년 경의 발해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인구구성 고구려인, 말갈족
수도 구국, 중경, 동경, 상경
정치체제 군주제
행정구역 5경 16부
성립 698년
멸망 926년 1월
초대 군주 고왕(대조영)
698년 ~ 719년
최후 군주 대인선
906년 ~ 926년
성립 이전 고구려
해체 이후 후발해, 고려, 동단국,
정안국, 흥요국,
대원국

발해(渤海, 존속 기간: 698년 - 926년)는 당나라신라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를 계승하여, 229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동부 및 연해주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 위치해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8년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기반을 둔 고구려 유민과 속말말갈 세력이 힘을 합쳐, 대중상대조영이 만주에서 당나라 세력이 쇠퇴해진 틈을 노려 건국하여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의 한 축이 되었다가 926년 1월에 기마대를 이끌고 침략한 요 태조의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발해의 건국으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南北國)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발해는 강한 군사력과 발전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의 계승을 명분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오늘의 북한중화인민공화국, 러시아에 걸친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발해사 쟁점

대조영이 세운 발해는 발해의 영역이 현재의 중국, 러시아, 그리고 북한에 걸쳐 있기 때문에 일본까지 포함하여 현재 정점 역사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자국 중심적인 해석으로 같은 사료를 놓고도 서로 그 해석을 달리한다. 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발해인이 남긴 사료가 적기 때문이며 현재의 연구자들이 국적이 발해시대 당시의 경쟁적 파트너였던 당, 일본, 신라 등과 연결되는 것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까지 거의 뭍혀 있던 발해 역사가 조선 후기 유득공의 <발해고>를 시작으로 관련 서적이 나오기 시작하였으나 발해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사료가 부족하고 고고학적인 유물도 대부분 사라져 그 근원과 주체, 민족, 문화, 계승국이 모호하다보니 각국이 자국에 유리하게 왜곡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제 시대 일본은 만주 침략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발해사 왜곡, 중국은 동북 공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발해를 단순히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폄하기 위한 왜곡, 러시아는 자신들의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해 말갈족이 세운 독립 정권으로 왜곡, 북한은 주체사상을 강화하기 위해 발해사를 왜곡하는 바람에 발해사는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찟기고 조작되고 폄하되어 합의 점을 찿지 못하고 현재 쟁점화 되어 있다.

 

발해사 쟁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대조영의 출자와 건국 주체, 민족 구성, 강역과 지리, 문화가 성격, 발해 인식의 차이 등이다. 이러한 각 요소들은 다시 복잡하게 얽혀 첨예한 국가귀속 문제를 낳고 있다.

 

발해사의 쟁점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국가.학자별로 계속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주제마다 합일점을 찿기란 쉽지 않다. 특히 국가별 차이가 너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현 동아시아 정세에 비춰 앞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의 발해사 연구 현황과 방향은 아래와 같다. 연구의 출발은 조선 후기 유득공의 <발해사>를 출발로 지금까지 220년, 광복 후 최초의 논문 발표를 기준한다면 5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여기서 진정한 의미의 발해사 전문가가 등장해 연구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라면, 연구 기간은 아직도 30년이 되지 않는다.

 

발해 유적이 산재한 중국.러시아에 대한 현장 접근의 어려움, 발해사에 대한 무관심, 용이하지 않았던 자료수집 등 제반 문제를 생각하면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는 대단하지만, 발해사에 대한 이해 관계를 지니고 있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 역시 발해에 대한 관심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은 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발해사 연구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뒤를 돌아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큰 과제를 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방안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첯째,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의 적극적인 수용과 연구의 공간적인 시야를 점차 확대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일정한 정도의 발해 고고학 전공자가 필요하다.

셋째, 인접 학문과 공동연구 및 학문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섭의 연구자세가 필요하다.

넷째, 발해사 연구의 개방화와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다섯째, 현재 활발하게 전개되는 발해사 연구 결과가 자라나는 세대의 국사 교과서나 한국사 개설서에 신속하면서도 정확하게 반영될 필요가 있다.

여섯째, 발해사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발해사 연구와 전망은 아래와 같다.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 학계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지도사관으로 받아들이면서 북한 역사학의 기초를 다졌다. 1950년대 후반에 북한에서 일어난 시대 구분 논쟁은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한 역사 해석의 시도였다. 이 결과 북한 학계는 발해사를 중세사로 편입했지만, 발해사를 제대로 서술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1962년 발표된 박시형의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부터이다. 이 논문은 한말 계몽사가들 이후에 단절된 발해사 연구 전통을 다시 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며 발해 관련 사료를 면밀히 검토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음을 밝혔다. 이후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박시형이 제시한 발해의 고구려 승계에 대한 보완적 역활에 불과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북한은 김일성 혁명사상이라는 이른바 '주체사상'에 의한 사상통제가 강화되면서  우리 역사를 주체적인 입장에서 고조선.고구려.발해에 관한 연구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통일신라를 부정하고, 고구려-발해를 중심으로 하는 인식의 틀을 형성 발전시켰다. 결국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밝히는 데 중점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편향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주체사상이 확고한 자리를 구축해 가면서 정치적 견해에 입각해 연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의 학자들은 발해의 주민 구성에서 고구려 유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고구려 멸망 후 원고구려 고토에 일부 정치 집단들이 있었고, 684(5)년에 동모산에서 진국을 성립했으며, 698년에는 황제국인 발해국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발해 문화의 고구려 계승성만 강조한다든지, 발해 강역과 관련된 논증, 각 부분사에서 발해 위치의 지나친 격상 또는 자의적 해석 등에서 우리 학계와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의 발해사 연구 동향과 목적은 아래와 같다.

중국 학계의 발해사 연구는 1919년 시작된 이래 1,240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그중에서는 단연 고고학 분야가 가장 많고 발해사 귀속과 성격에 관한 연구가 뒤를 이었다. 그 중요한 연구 성과는 1980~199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은 고고조사를 바탕으로 커다란 연구 성과를 거두었지만, 발해를 고구려 계승국가가 아닌 말갈족의 역사로 규정하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 발해사 연구가 활성화된 게기는 건국 이후 논의하기 시작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해사 입장에서 보면, 이 두시기에 종족과 국가 성격에 관한 성과가 두드러지는데, 그 이유는 중원과 다양한 형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소수민족들에 대해서 그들이 건립한 정치체를 '지방정권' 또는 '할거정권'이라고 인식하면서, 역사상의 각 민족관계를 '중앙과 지방'이라는 구도 속에서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발해사를 포함한 소수민족 역사에 대한 근본이론으로, 1949년 논의가 시작된 이후 198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 중국의 각 민족들이 스스로를 다민족국가 중국의 일원임을 인정하도록 하고, 과거에 대한족주의자들이 주장했던 한족만 중국인이라는 의견을 부정하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에 따른 것이다. 최근 보도되는 중국 언론을 통해 보면, 중국 학계는 '하상주단대공정', '중국고대문명탐원공정', '요하문명론'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통해서 만주지역에 출현하는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문화에 대해 대대적입 발굴과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2007년 4월부터 제3차 '진국문물조사사업'을 전개하여 현재는 현지 조사단계를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 학계는 고대사만이 아니라 소수민족 역사를 영토적 관념에서 그 뿌리를 두고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는 동북공정으로 이어졌다. 이것의 인식틀은 단순히 각 왕조에의 영토만이 아니라 그 역사마져도 중국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논리로, 한국 고대사의 정체성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대형 프로젝트의 이론적 배경에는 '통일된 다민족국가' 또는 '중화대가정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국화를 도모하고 있는 패권주의의 대표적인 실제가 되고 있다.

 

일본의 발해사 연구 쟁점과 목적은 아래와 같다.

일본에는 <속일본기>를 비롯하여 발해 관련 역사서와 목간, 문집, 금석문 사료, 유적 등 발해사 연구에 중요한 1차 사료가 많이 보유되어 있는 나라다. 특히 일본의 기록 자료는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서에서 보이지 않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외교 관련 기록에서는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 여부도 규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근대 역사학이 태동한 19세기 후반 일본 학계에서는 자국사와 관련하여 조선사, 즉 한국사도 정리하였으며, 20세기 전반에는 처음으로 발해사를 일본사의 범주에 넣었다. 또한 1945년 이전의 만주 점령 시기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연구 성과는 지금도 그 가치가 유효하다. 19050-1960년대에는 연구가 다소 주춤하다가, 1970년대 이후에는 다수의 전후 세대 연구자들이 등장하면서 발해사에 대한 이해가 다양화되었으며 대체로 한국사의 범주에 두었다.

 

일본 학계의 발해사 연구는 동아시아 책봉체제론이나 국제적 계기론에 입각하여 주료 교류와 교섭에 주력하였다. 발해 건국 집단을 속말말갈로 파악하고 소수의 고구려인과 대다수의 말갈 제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보았다. 또한 양자의 교류를 둘러싼 많은 해양민족이 오래 전부터 행해져 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다하비성'에 보이는 말갈국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적인 근거는 바로 삼국사기에도 나타나 있는데, 중국 측의 말갈 만주 존재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한국 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는 범칭설의 주요한 자료가 된다. 일본 학계의 동북학 연구에서도 드러나듯이 '아무르강 유역-사할린-훗카이도와 일본 동북지역'을 잇는 광범위한 교류가 밝혀지고 있으며, 당시 일본에서는 아무르강 유역의 여러 집단을 말갈로 인식한 점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의 발해 연구 동향과 쟁점은 아래와 같다.

러시아는 이미 19세기에 비추린(1777-1853)이라는 탁월한 동양학자나 나타나 발해에 대한 문헌 자료의 내용을 일부 파악하고 있었다. 이후 러시아에서 발해에 관한 역사 연구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오랜 전통을 이어왔다. 또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는 성터, 절터, 주거 유적, 고분 등 발해와 관련된 수많은 유적이 널리 분포하고 있으며, 이미 1950년대부터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러시아에는 역사학 자료와 고고학 자료를 통해 발해를 연구할 수 있는 객관적 여건이 형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덕분에 러시아는 발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역사학적인 측면과 고고학적인 측면 모두에서 많은 학문적 업적을 쌓아왔다.

 

오늘날 러시아의 발해 연구자들은 발해를 말갈이 건국한 것으로, 다민족 국가인 것으로, 발해의 동쪽 영역은 연해주 남부지역으로 한정되는 것으로, 발해 문화의 성격은 독자성과 다원성을 띠는 것으로, 발해는 말갈계의 독립 주권국가였던 것으로 파악한다.

 

발해의 영역을 중앙과 지방으로 구분하여 물질문명의 차이를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 발해의 강역을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 설정해 보고자 하는 시도, 발해의 생업.경제, 구체적인 유구와 유물 등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발해 문화에 대한 전체적인 시기 구분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이다.

 

러시아는 중국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참고하고 있는데, 한국의 연구 결과도 러시아 연구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번역.출간하여 활용할 수 있게 해야 될 것이다. 또 러시아의 자료도 체계적으로 수집, 번역, 발간하여 한국의 연구자들이 활용이 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 공동 발국 조사가 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발국조사를 실시하여 발해의 물질문화에 관한 자료도 체계적으로 축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발해와 말갈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말갈과 상호 연계성 문제를 역사학적인 측면과 함께 고고학적인 측면에서도 깊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발해 역사는 나라마다 각기 다른 목적으로 가지고 변질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들이 발굴하는 내용을 비밀에 붙이고 공개하고 있지 않는 실정이며 그들의 목적을 위해 발해 역사를 고구려 역사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지방 정권화를 시도하고 있다. 북한은 정통성과 주체사상적으로 정통성과 독립성을 주장하기 위해 발해사를 편향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일본은 대륙 침략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국에 유리한 대로는 만주사를 독립적으로 변질시켰고 대륙 정책 변경에 따라 한국사까지도 왜곡시키는 등 침략적 야욕에 따라 역사를 왜곡.호도하여 왔다. 러시아는 만주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해 발해사를 이용하여 말갈족이 세운 자주독립국으로 강조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발해사는 한국.중국.북한.일본.러시아 등 5개국이 공동으로 발굴.조사되어야 하며 공동으로 발해사 연구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역사가 승자의 역라지만 공정한 역사 이해와 수립. 기록은 동북아의 안정과 공동번영을 위해서도 열린 자세로 협력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는한 발해사는 여전히 자국에 유리한대로 이기적이고 편향적인 왜곡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