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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새벽 34(선의 침묵) 본문
우면산의 새벽 34 (선(善)의 침묵)
우면산 새벽 하늘
3월이 엇그제 온 것 같더니만 꽃샘 추위와 더불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제 봄은 완연히 우리 곁을 찿아 들었다. 우면산에는 향기로운 봄냄새가 서서히 대지를 솟아 오르고 초목들이 봄 기운을 내뿜고 있다. 자연은 태양의 열기와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따라 어김없이 봄을 다시 잉태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며 우주의 영겁을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치열한 삶도 자연의 이치처럼 혹한의 세월이 지나면 다시 봄이 찿아오고 생명의 계절을 맞이할 것을 알기에 희망을 잃지 않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막장드라마가 국민들의 관음증을 유발시키고 있으며 최고가 아니면 최하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팽배해져 있다. '나가수' 프로그램으로 말들이 많다. 원칙을 깬 처사에 시청자들이 분노하고 있다. PD가 교체되고 나가수를 폐지하라고 일인시위도 벌이고 있다.
세 여자들이 나라를 뒤흔들고 지도층의 방탕과 불륜을 고발하고 있다. 그것을 보는 국민들은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독도 교과서 문제로 국민들이 공분하고 있다. 그들의 표리부동한 인간성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일본 돕기도 주춤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흥분하기 쉬운 국민들이라 쉽게 휩쓸리고 쉽게 돌아선다. 우리들이 일본을 아직도 모르고 있으며 그들에게 너무 큰 기대를 그만큼 많이 한 것이 안닌가 생각된다.
국방개혁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언제 국방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문민.민주화 정권 기간 동안 거의 20년 가까이 군은 짓밟히고 찟기고 천시받으며 무능한 집단으로 매도되어 왔다. 그래서 적에 대해 무력하고 오로지 진급과 출세에만 전념하여 상급자 눈치나 보며 군생활을 해온 많은 군인들이 아직도 군에서 주도적인 세력을 남아 있다. 군납비리, 방산 비리가 판을 치고 헛껍데기 나약한 군부가 이번 개혁으로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국방개혁은 용두사미가 될 것이다. 항명이던 무엇이던 개혁의 걸림돌은 과감하게 처단하더라도 이번에는 반드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인가? 선이 지배하는 사회인가? 정의와 불의, 그리고 선과 악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개념이 변질되고 바뀌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변하지 않는 고정된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나 종교나 사상이나 이념이나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인간답게 살 정의도, 자유도, 권리도, 평화도 모두 현재는 허상에 불과하다. 정치/사회 지도층과 대자본가들은 누구보다도 높은 양질의 삶을 즐기며 향유하며 살지만 상대적으로 일반 서민들은 더욱 심화되어가는 양극화의 무거운 짖눌림에 피멍이 들어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개천에서 용나기는 글렀고, 부자 집안에 부자나고 학자 집안에 학자나며 정치 집안에 정치난다는 논리가 정립되어 버렸다. 신분을 뒤집을 유일한 방법은 서민들에게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권력과 자본이 상호 연계되어 벌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사치와 방탕은 막장드라마를 보는 것 같이 착각을 느끼며 일반 서민들로 하여금 상대적인 박탈감에 대한 분노가 가슴속에서 일고 있으나 정의로운 지식인들은 아직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파산과 자살, 가정파탄으로 이어지는 중산층의 붕괴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으며 깨끗하지 못한 돈은 물쓰듯 하는 것처럼 자본가들이 벌이는 사치와 허영은 명품을 사기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찻길이 막히고 주차할 수 없을 정도라니 상상이 갈 것이다.
선을 지향하고 악을 배척하도록 국민들에게 분노의 불길을 당겨줄 지식인마저도 권력과 자본에 마취되어 시체가 된지도 오래된 일이다. 왜 선은 침묵하고 있는가?
실종된 정의, 감금된 자유, 그리고 껍데기 평화가 우리 사회에 나뒹굴도록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때를 아끼며 온전한 미래를 위해 맞설 용기를 가져야 한다. 말만 앞세우기보다는 자기부정과 무욕의 결단을 내리는 도덕적 엘리트가 공론과 실천의 최전선으로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로 칼럼을 쓴 내용을 소개한다.
눈내린 범바위
선(善)의 침묵
서민과 중산층의 생활고가 무겁다. 불어나는 가계 빚더미 앞에 과거는 죽어가고 미래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있다. 중산층이 점점 더 무너져 가고 사회계층이 양극단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가난’ ‘빈곤’ ‘소외’ ‘포기’ ‘자살’이라는 말들이 일상적 사회용어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이런 양극화 해결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는 이 시대의 정신이고 화두다.
심각한 것은 이 상황이 개선될 기미도 없고, 개선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탐욕에 눈이 먼 기득권층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이기주의와 자기 보신에 사로잡힌 거대자본과 지식인, 그리고 고위공직자는 ‘내려놓음’과 ‘나눔’, ‘긍휼’의 정신을 상실했다. 있다 해도 면피용 생색내기요, 이름 알리기요, 전시적이어서 사랑과 감동이 없다.
올바른 문제해결과 상생의 방안을 제시해야 할 정치인은 자기 성찰의 노력이 없다. 공천과 대권, 지역구의 이익에만 매달려 있다. 정론을 이끌어야 할 언론도 자신의 성향과 구미에 맞는 것에 보도와 편집이 편향돼 보인다.
지금 시민들은 꿈틀거리는 그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 정체가 뭔지 아직은 잘 모를 수 있다. 거대자본과 권력에 줄을 서서 아부하는 지식인들은 우리 사회를 짓누르며 다가오는 그 무엇의 실체와 파괴력을 안다.
그 누구도 해결을 위해 선뜻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기득권층의 무능과 탐욕, 인내의 한계를 넘는 시민들의 불만, 그리고 용기 있는 선비들의 등장과 호소가 일치하는 순간 임계점을 넘어 그 무엇은 빅뱅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이와 함께 시민들은 이 사회와 역사의 진정한 주인으로 소용돌이를 이끌어 갈 것이다. 과연 보수는 다가올 변혁의 시대를 맞아 눈부신 성공만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생존할 수 있을까? 보수는 진보와 정면으로 싸우기에는 비겁하고 도망치기에는 너무 뚱뚱하지 않은가? 서민과 중산층에게 포식자(eater)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통합하고 나누는 온전한 미래의 창조자(maker)로 거듭날지를 결단해야 한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실종된 정의, 감금된 자유, 그리고 껍데기 평화가 우리 사회에 나뒹굴도록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때를 아끼며 온전한 미래를 위해 맞설 용기를 가져야 한다. 말만 앞세우기보다는 자기부정과 무욕의 결단을 내리는 도덕적 엘리트가 공론과 실천의 최전선으로 나와야 한다. 감세정책으로 회사 청소부들의 과세율이 자신보다 높아짐을 수치스러워한 워런 버핏과 같은 기업가가 감동을 전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무엇보다도 가족, 공동체, 종교와 같은 전통적 지혜에 의존하여 정의와 자유를 고취시킨 에드먼드 버크와 같은 지혜와 덕의 신중함이 새롭게 싹터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갈망을 우리는 직시하고 역사를 밀고 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을 게을리한다면 역사는 오늘을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라고. 마틴 루서 킹의 이 말이 오싹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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