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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97 : 가야의 역사 15 (정치,사회,경제,문화) 본문
한국의 역사 197 : 가야의 역사 15 (정치,사회,경제,문화)
정치체제
여러 가야 소국의 연맹체의 상황, 연맹장의 권한, 신라 부체제(部體制)와의 비교
가야의 정치체제가 어떤 수준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가야에는 국(國)을 칭하는 10여 개의 정치체, 즉 소국(小國)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기 분립되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고, 그들 사이에는 하나의 맹주국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聯盟體)라는 통합된 질서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고, 그 맹주국이 하나가 아니라 3~4개 있어서 몇 개의 소지역연맹체(小地域聯盟體)를 이루고 있었을 뿐이라는 견해도 있고, 백제나 신라와 같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이루었다는 견해도 있다. 모든 견해는 각자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야의 여러 소국들은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4세기 이전의 전기 가야연맹 시기에, 변한 소국의 지배자인 거수(渠帥)들 사이에는 세력 크기에 따라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濊), 살해(殺奚), 읍차(邑借)라는 다섯 등급의 호칭이 있었다. 이는 변한 소국들 사이에서 상호간의 규모와 서열에 따라 일정한 차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 구야국 신지[拘邪秦支]와 안야국 축지가 가장 서열이 높았으며, 다른 소국들은 대외 관계에 있어서 그들의 결정을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발굴된 1~4세기의 유물과 유적이 함안보다는 김해 지방에서 훨씬 더 풍부하게 출토된 점으로 보아, 안야국(安邪國)보다는 구야국(狗邪國)이 더 우월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변한 12국은 김해의 가락국(=구야국=가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전기 가야 소국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5세기 이후의 후기 가야연맹 시기에는, 가장 많을 때는 20개 소국, 적을 때는 10개의 소국들이 고령의 대가야국(=가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소국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의 소국들의 지배자는 크기나 규모에 따라 호칭이 달랐으나 대체로 ‘한기(旱岐)’, 또는 ‘군(君)’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맹주국의 지배자는 ‘왕(王)’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시기에 고령의 대가야국(大加耶國)만이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나, 540년대 이후로는 함안의 안라국(安羅國)도 왕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어서, 가야의 여러 소국들이 그 내부에서 남북 이원체제(南北二元體制)를 이루고 있었던 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맹장의 권한으로는, 소속국에 대한 세금 징수, 인력 동원 또는 징발, 소국 사이의 분쟁에 대한 조정, 전쟁과 같이 연맹 전체에 영향이 미치는 중요 대외정책의 결정, 연맹체의 결정에 불복하는 소국에 대한 징계 등이 있을 것이다. 반면에 연맹장은 소속국 수장의 지위를 보장해 주고, 소속국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다만 가야 연맹장의 권한은 때로는 강하게 발휘되기도 하였으나, 주변 정세의 변동이나 내분 등의 요인에 의하여 약하게 발휘되기도 하는 유동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고령의 대가야국만은 휘하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신라와 같은 부체제(部體制)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부체제’란 현대의 연방제 국가와 비슷하게, 그 내부에 여러 소국들이 있어서 그들의 자치권이 인정되나, 외교권은 왕권에 의하여 통제되어 외부적으로는 단일한 국가 이름을 사용하고 대외관계의 창구가 단일화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부체제를 이루었다면, 이는 이미 중앙집권체제를 이룬 고대국가 초기 상태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에 대한 증거가 너무 미약하여 인정하기 어렵다.
계급구조
가야 소국의 사회 구조, 제정일치적인 면모와 그 한계성, 귀금속을 선호하는 귀족 계급의 존재 여부
2~3세기 당시에 변한, 즉 전기 가야 12국은 각기 2,000호(戶), 인구 1만 명 정도를 지배하는 독립 세력이로되 상대적인 규모의 차이가 존재하는 상태였으며, 이러한 상태는 마한 50여 국이나 진한 12국의 경우에도 대략 비슷하였다. 지금의 경상남북도에 41개 시(市), 군(郡)이 있는 것에 비하여 당시에는 진변한 합쳐서 24개의 소국이 있었으니, 하나의 소국이 차지하는 지역 범위는 지금의 군(郡) 2개 정도를 아우른 정도였다.
각 소국들은 국읍(國邑) 하나와 다수의 읍락(邑落)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국 내부의 권력이 국읍에 집중되어 있지 못하고 그를 포함한 다수의 읍락에 분산되어 있어서, 국읍의 주수(主帥)가 각 읍락의 거수(渠帥)들을 잘 제어하지 못하였다.
또한 국읍 내에는 정치적 기능을 담당하는 주수와 달리,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天君)이 따로 있었다. 그러므로 소국 지배 권력은 초기 왕권의 신권적(神權的), 또는 제정일치적(祭政一致的)인 단계보다는 발전하였으나, 아직 천군(天君)의 종교적 권위를 초월하지 못한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전기 가야 소국들은 내부 구조의 면에서 일단 권력자가 출현하고 정치적, 종교적 권위가 분화되어 있었으나, 아직 사회경제적 계급의 분화, 관료제의 제도화, 중심 세력에 의한 권력 독점 등의 요소를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후기 가야 소국들도 하나의 국읍과 몇 개의 읍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본적인 지배 권력은 각 소국 한기(旱岐)에게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가야, 안라, 다라 등 일부 소국은 그 발달이 미약하나마 내부에 관등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후기 가야 소국들도 기본적으로는 전기 가야 소국들과 거의 비슷한 내부 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나, 맹주국이나 그에 버금가는 소국들의 경우에는 그보다 발전된 면모가 인정된다.
또한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삼한 사람들은 구슬을 보배로 여겨 몸에 치장하였지만 금은(金銀)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고고학적인 유물로 보더라도, 2~4세기의 김해 양동리나 대성동 고분군 등에서 화려한 구슬 목걸이들은 다량 출토되었으나, 금은 제품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보아 가야 지역에서 구슬을 많이 이용하여 화려한 장신구를 소유하는 귀족 계급이 늦어도 2세기 후반에는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사치품에 대하여 왕성한 욕구를 갖지 못하고 구슬만을 선호했다는 것은 어떤 주술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것일 수도 있으므로, 귀족 계층이라고 해도 아직은 사회경제적으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상태라고 하겠다.
그러다가 5세기 이후로는 가야의 여러 나라들에서 관(冠), 귀걸이, 목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와, 대도(大刀), 마구(馬具), 관(棺) 등의 소품들도 구슬뿐만 아니라 금, 금동, 은과 같은 귀금속으로 장식하여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5~6세기에는 가야 사회에 사회 경제적인 부(富)에 바탕을 두고 귀금속을 선호하는 귀족 계급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충분히 논할 수 있다.
다만 4세기 이후로는 가야 지역의 여러 고분 내부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의 사후(死後) 세계의 시중을 위하여 시종들을 순장(殉葬)한다든가, 여러 고분군들 사이에 규모나 유물의 질 등의 면에서 우열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로 보아 가야 사회의 구조는 2세기 이후로 6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계층화되어 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제
가야시대의 경제를 농경, 방직, 어로, 철 생산과 유통, 토기 생산과 유통, 수공업 등으로 나누어 설명함
가야의 경제도 우리 고대 경제의 발전단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채집과 어로에 의존하던 신석기시대에서, 농경의 시작으로 식량생산의 단계로 돌입하는 청동기시대를 거쳐, 원거리의 교역을 통해 다른 지역이나 정치집단과 물자를 교역하는 철기시대로 발전해갔다. 청동기시대에 시작된 농경은 정착생활을 보장해주었다. 더 이상 식량을 구하기 위해 떠돌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마을이 생겨나고 지역이나 집단에 따른 구별도 나타나게 되었다.
농경에서 축적되기 시작한 잉여생산물로 마을 사람 모두가 식량채집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토기,옥,구슬,청동기 등의 생산에만 종사하는 전문가 집단도 등장하게 되고, 이런 물품을 필요로 하는 특수한 계층도 형성되었다. 철기시대가 되면서 가까운 지역은 물론 원거리 교역도 행해지게 된다. 지역 간에 다른 물자가 교환되고 수입된 선진문물은 보다 진전된 정치사회로의 진전을 재촉했다. 선진문물의 교역권을 장악한 계층은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삼국지>>가 전하는 변한 12개국은 이렇게 형성된 소국(小國)이며, 가야제국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종교
남방 불교의 유입 여부, 가야의 불교 수용 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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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지역의 사상에 대해서는, 김해에 전해지는 파사 석탑(婆娑石塔) 및 수로왕릉 안의 쌍어문(雙魚文)과 관련하여, 인도 지역의 남방 불교가 이 곳에 직접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중국 북방 불교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 불교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파사 석탑은 서기 48년 김해 가락국 건국 초기에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올 때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여 싣고 왔다는 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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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불교로서 이해되지 못하였고, 서기 452년에 호계사(虎溪寺)를 창건하여 파사 석탑을 안치하였다는 것이다. 그 해에 질지왕은 왕후사를 창건하여 허왕후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또한 수로왕릉 안의 납릉정문(納陵正門) 공포에 새겨진 쌍어문(雙魚文)은 불교가 매우 성행하였던 인도 아요디아 시의 문장(紋章)으로서, 허왕후 때부터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미약한 형편이다. 신라는 눌지 마립간(417~458) 때 고구려에서 묵호자가 와서 포교를 하였다고 하니, 452년 당시에 신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금관국에도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면 이 때의 불교는 남방 불교가 아니라 북방 불교였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당시에 남방 불교, 또는 북방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하더라도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있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편 가야의 멸망을 전후한 시기에는 여러 모로 가야 사회에 불교가 수용되었을 정황이 충분하다. 우선 고령 대가야의 성문을 ‘전단문’이라고 하는바, 그 '전단'은 불경에 자주 나오는 향나무의 일종이다. 둘째로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의 천정에 그려져 있는 연화문(蓮花文)은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과 상통한 양식의 것이며, 이는 대가야가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방증 자료가 될 수 있다. 셋째로 대가야 시조인 이진아시왕의 어머니 이름이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의 하나인 ‘정견(正見)’이고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道設智王)의 별명이 불경에 나오는 ‘월광태자(月光太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삼아 좀더 적극적으로 추정해 본다면, 마지막 시기의 대가야는 불교를 잘 알고 있었으며, 약화된 왕권을 다시 세우는 명분으로 이를 이용하였을 수도 있다. 결국 이는 모두 실패하였으나, 이 때 성립된 대가야 마지막 시기의 불교 문화는 훗날 합천 가야산에 해인사(海印寺)가 세워지는 인연으로 작용하였다.
해상교역
3세기 이전에 가야의 해상교역은 주로 일본의 북구주(北九州)와의 사이에 이루어졌고, 3세기말 이후로는 일본의 기내(畿內)를 포함한 일본 각지와 중국 북방으로 확대되었으되, 중국 북방의 문물은 해당 지역 주민들의 해상을 통한 이주의 산물이다.
중국의 사서(史書)인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東夷傳)의 변진 조(弁辰條)의 유명한 기사(記事), “나라에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두 군(二郡)에도 공급하였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 영남(古代嶺南) 지역은 일찍이 삼한시대부터 철을 매개로 사방의 여러 지역과 교역을 행하였다. 위 기사에서 보이는 교역의 대상 중, 특히 예와 왜, 낙랑,대방의 이군(二郡)과의 교역은 해로(海路)를 이용하였음이 틀림없다. 즉, 해상교역이었다.
그러나 시기에 따라 교역의 대상과 성격도 미묘하게 다르다. 먼저 당시의 일본열도와의 교역을 살펴보면,
삼한시대에 변한의 대(對)일본 교섭의 대상은 주로 북부 구주(北部九州)에 한정되었다. 이는 김해 양동리(良洞里) 유적에서 북부 구주 특유의 의기(儀器)인 광형동모(廣形銅矛), 북부 구주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방제경(倣製鏡) 등이 발견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반면에 이들과 같은 시기의 일본 「킨키」(近畿) 중심의 특징적인 의기(儀器)인 동탁(銅鐸)은 변진의 땅에서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이때의 해상교역은 북부 구주의 왜인(倭人)들이 변한의 철을 입수하는 대가로, 그들의 특산품, 이를테면 각종의 해산물과 쌀 등의 식품과 위의 광형동모,방제경 등과 같은 북부 구주 지배자들의 상징적인 물품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역은 어디까지나 경제적인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그런데 3세기말에 금관가야가 성립한 후, 대(對)일본열도 교역의 대상지도 확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성격도 달라지고 있다. 즉, 기왕의 북부 구주 외에도 일본열도의 광역권으로 교역의 대상지를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시기의 낙동강 하류역―금관가야에서 발견된 「하지키」(土師器) 계통의 토기 중에, 북부 구주계의 것뿐만 아니라, 동해(東海)에 연한 산음계(山蔭系)를 비롯하여 멀리 북륙계(北陸系)의 것도 있다는데서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이 넓어진 해상교역 대상지에서는, 철을 입수하는 대가로 해산물, 쌀과 같은 특산물 외에, 노동력도 제공된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 발견의 일본계 토기중, 3세기말~4세기초의 것들은 일본제의 「하지키」들임에 비해, 4세기 전반부터는 일본제 「하지키」들은 거의 확인되지 않고 모두 가야에서 만든 일본계 토기, 즉 「하지키」계 토기들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로 보아, 가야로부터 철을 얻는 대가로 3세기말~4세기초에 노동력으로 제공된 왜인들이 가져온 토기들이 이 시기의 일본제「하지키」이며,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들 왜인 1세대와 그 자손들이 가야에서 만든 것이 4세기 전반 이후의 「하지키」계 토기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4세기 전반 이후 가야에서 여전히 「하지키」계 토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노동력으로 제공된 왜인들과 그 자손들이 가야사회로 편입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왜계가야인(倭系加耶人)일 공산이 크다. 이는 이들의「하지키」의 영향이 이때부터 소형의 광구호(廣口壺)와 기대(器臺) 등의 가야토기에 꽤 강하게 반영되고 있는 데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다만 「하지키」계 토기는 가야토기의 주류도 아니었고 수효도 극소수일 뿐이며 대형 고분군에서는 출토되지 않는다.
한편 가야의 땅에서 일본제「하지키」가 가야제(加耶製)의 「하지키」, 즉 「하지키」계 토기로 전환할 무렵에 당시 일본열도 지배자들의 전유물도 가야에서 확인된다. 김해 대성동 13호분 발견의 파형동기(巴形銅器)와 녹색응회암(綠色凝灰巖)제의 석제품들이 그것이다. 특히 파형동기는 일본열도 중심부인 기내(畿內)에서 발견되는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가야의 대(對)일본 교섭의 대상이 이 지역까지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역에 정치적인 색채도 가미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물자의 교류만이 아니라 일본열도로부터 노동력이 제공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3세기말 낙동강 하류역에 중국 북방의 문화가 대거 유입되면서 금관가야가 성립된다고 하는 견해가 고고학에서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따라서 이 무렵의 교역의 성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무렵 북방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물질문화」인 최초의 도질토기 양이부단경호(兩耳附短頸壺)와 「정신문화」인 순장(殉葬)이다. 이들 북방문화가 고구려 등이 있었던 한반도 북부와 백제가 위치하였던 한반도 중부를 생략한 채, 한반도의 최남단인 낙동강 하류역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입의 경로는 육로가 아닌 해로(海路)임이 분명하다. 이 해로는 여러 가지 고고학적 증거로 보아 동해안의 「루트」였다. 그런데 한반도 북부와 중부를 생략하고 있는 점, 북방의 물질문화와 함께 정신문화도 동반되는 점 외에도 그 밖의 명확한 고고학적 증거들에 의해서 볼 때, 이들 북방문화는 단순한 교역의 산물이 아니라, 그 문화를 지닌 특정 북방주민들의 해상을 통한 이주(移住)의 소산물이다. 이는 다른 해상교역과는 커다란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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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역사를 마무리하며......
이상, 가야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발해의 역사로 넘어 갑니다. 가야의 역사는 사료의 부족으로 미흡하지만, 가야의 역사에 대해 개괄적인 내용만 알아보았습니다.
가야의 역사는 삼한에 가려 제대로 한국사에 자리메김도 못지 못하였고, 전설로만 전해오던 가야사가 김수로 집단, 허황옥 집단 등의 외래세력과 9간의 토착세력이 합하여 나라를 건설하였다는 점과 최근 가야 지방에 대한 각종 고분 발굴을 통해 가야의 역사가 매우 독창적이었으며 강력한 철의 제국으로 현해탄 해상왕국을 건설했다는 점을 이번 가야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많은 것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야는 비록 500년 만에 멸망하였지만 신라의 역사속에 가야인의 혼이 면면히 살아 남아 계승되었다. 신라의 장보고가 그 꿈을 이루려 하였으나 본의 아니게 정치 권력다툼에 휘말리는 바람에 실패하였으며, 문노, 김무력, 김유신을 포함한 가야의 후손들이 신라 정치.사회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삼한통일의 위업까지 달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야인의 혼은 무역대국을 지향하고 있는 오늘날까지 한반도에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다는 느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가야는 우리 한반도가 살아가기 위한 미래를 미리 예견하고 내륙왕국이 아닌 해상왕국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가야인들은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연방제로 국가를 유지하면서 절치부심하면서 나라를 500년 가까이 유지하였으나 결국 결집력의 부족으로 주변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주변 다른 국가들에 비해 일찌기 찬란한 현해탄 해상왕국의 문명을 꽃피웠던 가야가 결국 망하게 된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분산된 힘을 결집하여 외적의 칩입에 대처하지도 못했고 연방 소국들의 분열로 자체적으로 내분을 겪는 바람에 외세를 불러들였고 결국 침입을 허용하고 멸망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야의 멸망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가야가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으도 나라가 내부적으로 결집력이 없다면 주변 강대국들에게 결국 힘의 논리에 의해 멸망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세계무역 10대국으로 성장하였지만, 아직도 한반도는 주변 강대국들과 북한의 위협아래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 사회가 주변 4대 강대국들과 세계적인 불량국가인 북한 김씨 왕조 세습체제를 앞에 두고 좌와 우, 부와 빈, 자유와 억압, 정의 와 불의, 이상과 현실의 양분법적인 흑백논리에 빠져 계층간, 지역간, 무리간, 정당간 갈등을 조장하고 파벌싸움만 일쌈고 있다면, 또 그런 가운데 국가 정치.경제.사회는 무너져 간다면 가야의 멸망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것은 오늘의 현실을 생각할 때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판단될 것이다. 국론과 힘을 결집하여 국제적인 정치.경제의 거센 파고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이번 일본 열도 대참사처럼 언제 강력한 쓰나미가 한반도를 휩쓸어버릴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이다.
우리는 정치. 경제.사회 등 내부적인 개혁이 진실로 절실한 상황이다. 정신세계가 무너졌고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진지 오래다. 정의.자유.평등.공정이 사라졌고 사회 각 분야에서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고 있는 상황이다. 출산율이 최저이며 노인층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경제는 뒷걸음치고 중산층은 이미 무너졌고 서민들은 삶의 의미를 잃은체 노예처럼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사는건 사는 게 아니다. 취업을 못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끓고 있으며 양극화는 날이 갈루록 심화되고 있어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의욕이 상실된 채로 죽지 못해 살고 있다. 막장 드라마가 판을 치고 언론과 방송은 연일 막장 뉴스로 도배를 하고 있다. 노숙자가 늘어나고 행복하던 가정이 수도 없이 연일 파괴되고 있다. 개천에서 용나기는 옛말이고 젊은이들의 꿈도 미래도 상실되어 버렸다. 매일 골방이나 PC방에서 게임과 오락, 도박에 빠져 아까운 귀중한 세월을 허송하고 있다. 무너져가는 사회를 이끌어 나갈 양심있는 사회 지도층과 선각자, 지식인들도 자본이라는 마약에 마취되어 조용히 침묵하고 있다. 각종 개혁의 의미는 정치논리로 퇴색되었고 정치집단 간의 권력에 대한 정신병자 같은 무한집착은 사회를 더욱 갈등의 심연으로 몰아가고 있다. 대자본가들, 언론가, 정치가, 권력층들이 벌이는 추악한 불륜 드라마가 국민들의 관심사가 되어 나라는 관음증 사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들의 꿈이 무엇인가? 나라가 반듯하고 정의롭고 공평하고 자유롭고 공정하다면, 그리고 모든 경쟁에서 자신의 실력에 따라 인정받는 사회라면 그리고 국론이 결집되어 어떠한 외부의 위협에 대해서도 정부와 군이 현명하고 단호하게 대처하여 튼튼한 안보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리고 경제적으로 누구나 박탈감을 느끼지 않고 퇴근길 소주 한 잔에 하루의 시름을 달래며 자신의 내일을 꿈 꿀 수 있다면...... 우리는 미래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이런 상태로는 국민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꿈을 이룬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며 대양으로 나가지 못하면 우리는 반도 안에서 스스로 자멸하고 말 것이다. 정치.사회 지도층과 국가 경영의 시스템은 무능하고 부패하여 나라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며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요소이다. 자본가들에게 초과이익공유제를 강압적으로 강요한다고 그들이 순순히 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일 것이다. 편향적으로 변질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개혁하고 정치.경제.사회.안보 시스템도 단호하게 개혁해야 한다. 영구적인 안보를 위해 국방개혁을 과감하게 실현하고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중립국을 지향하며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고 강력한 핵방위군을 양성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동북아 군사협력체를 만들던지 재난 협력군을 만들던지 아니면 안보협력체를 만들던지 동북아 평화정착을 위한 다각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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