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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96 : 가야의 역사 14 (역대왕, 대외관계)

두바퀴인생 2011. 3. 29. 03:50

 

 

한국의 역사 196 : 가야의 역사 14 (역대왕, 대외관계)

 

 

 

역대 왕

 

현재까지 남아있는 자료에서 가락국 당대의 인물들은 『삼국유사』에 주로 왕실세계(王室世系)를 중심으로 그 행적이 남아 있다. 물론 다른 기록에서 가라의 인물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삼국유사와 같은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가락국은 기원 42년부터 532년까지 10대에 걸치는 왕들이 490년간 김해지역에서 세력을 영위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시조(始祖)는 수로왕(首露王)인데, 42년 3월 알에서 태어나 즉위하여 이후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금빛 알에서 나왔으므로 성이 김씨였고 왕비는 허왕후(許王后)이다. 김수로왕은 석탈해로부터 왕권을 도전 받기도 하였으나 이를 술법으로써 물리쳤으며 신라 파사왕의 요청에 따라 음즙벌국과 실직곡국 간의 분쟁을 조정해주기도 하였다.

 

2대 거등왕(居登王)은 수로왕과 허왕후의 아들이다. 199년에 즉위해서 55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며, 왕비는 허왕후를 따라온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부인(慕貞夫人)이다.

 

3대 마품왕(麻品王)은 259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딸 호구부인(好仇夫人)이다.

 

4대 거질미왕(居叱彌王) 또는 금물(今勿)은 291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아궁(阿躬) 아간의 손녀 아지부인(阿志夫人)이다.

 

5대 이품왕(伊品王)은 346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부인(貞信夫人)이다.

 

6대 좌지왕(坐知王) 또는 김질왕(金叱王)은 407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도령(道寧) 대아간의 딸 복수부인(福壽夫人)이다. 왕이 처음에 종살이하던 여자[傭女]에게 장가들었는데 그 여자의 무리를 벼슬에 두게 되니 나라가 어지러웠다. 이때 신라가 꾀로서 가락국을 치려하니 박원도(朴元道)란 신하가 왕에게 간했다. “점괘에 의하면 소인을 제거하면 군자(君子)인 벗이 와서 합심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사과하고 종살이하던 여자를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

 

7대 취희왕(吹希王) 혹은 김희(金喜)는 421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진은(眞恩) 각간의 딸 인덕부인(仁德夫人)이다.

 

8대 질지왕 혹은 김질은 451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김상(金相) 사간의 딸 방원부인(邦媛夫人)이다. 452년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가 수로왕과 결혼한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우고 밭 10결(結)을 바쳤다.

 

9대 겸지왕(鉗知王) 혹은 김겸왕(金鉗王)은 492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의 딸 숙부인(淑夫人)이다.

 

10대 구형왕(仇衡王) 혹는 구해왕(仇亥王)은 521년에 즉위하였고, 왕비는 분질수(分叱水) 이질의 딸 계화부인(桂花夫人)이다. 532년 탈지(脫知) 이질금을 나라에 남겨두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卒支公)과 함께 항복해 신라로 들어갔다. 그의 아들로는 세종(世宗) 각간, 무도(茂刀) 각간, 무득(茂得) 각간이 있다.

 

 

 

 

대외관계

 

시대 순으로 살펴 본 가야와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

가야의 나라들은 통일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대외교섭의 주체나 창구도 하나는 아니었고, 복잡한 대외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가야제국은 문화적으로 서로 비슷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독립적이었다. 먼저 가야의 나라들 사이에 교섭이 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삼국,중국,일본 등과의 교섭을 살펴야 한다. 외국과의 관계도 단순치는 않다. 백제와의 외교와 같이 가야제국이 함께 교섭을 진행했던 예도 있지만, 수로왕과 신라의 외교와 같이 가락국(김해)이란 한 나라의 교섭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가야의 대외관계는 전쟁과 외교로 진행되었다. 가야의 대외관계를 연대순으로 훑어본다.

 

선사시대 : 가야의 각 지역에서 정치체가 등장한 것은 약 2,000년 전쯤이었다. 그러나 훨씬 이전에도 대한해협을 건너는 교류가 있었다. 무려 4,500~3,000년 전의 김해 수가리 조개무지, 부산 동삼동 조개무지, 통영 연대도 조개무지 등은 일본열도와 교류를 가졌던 신석기문화인들의 마을을 보여 준다. 빗살무늬토기는 큐슈에서 토기 발생에 영향을 미쳤고, 흑요석이라는 큐슈의 화산암은 수입되어 화살촉으로 가공되었다. 약 3,000~2,200년 전의 청동기시대가 되면, 교류의 증거는 보다 확실해진다. 큐슈 북부에서는 우리의 무문토기와 세형동검이 출토되었다. 최초의 금속기인 청동기는 물론 쌀농사까지 전파되었다. 물론 쌀농사가 바다를 건너 일본에 전달되었는데, 큐슈북부에 도착한 청동기문화인들은 고인돌로 무덤을 만들고, 마을까지 똑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울산 검단리와 진주 남강 유적 등에서 발견되는 환호 마을은 큐슈북부의 여러 지역에서도 등장했다. 환호 마을이란 동물이나 사람이 접근하기 어렵게 도랑으로 마을 전체를 두른 유적을 말한다. 일본 사가현 요시노가리 유적은 남해안 지역의 환호마을을 송두리째 옮겨 놓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이다.

 

가야와 낙랑군 : 가야의 여러 나라가 처음 등장했던 것은 남해안지역이다. 남해안에서 가야의 소국들이 먼저 성립했던 것은 바닷길을 통해 철기를 비롯한 선진문물이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108년에 한(漢)은 위만조선을 멸하고 한사군을 설치했다. 남해안 지역과 낙랑군의 교류는 가야사의 시작을 보장하였다. 『삼국지』는 한(韓)의 소국들이 계절마다 낙랑군에 왕래하여 인장과 의관을 받은 자가 천 여 명이나 되었다 합니다. 가야 소국의 군장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진한의 군장이었던 염사치는 변한포(弁韓布) 15,000필을 낙랑군에 가져 갔다. 변한은 가야이다. 등장기의 가야가 낙랑군과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증거가 된다.

 

수로왕과 신라 : 『삼국사기』는 102년 8월, 가락국의 수로왕은 경주에 갔다. 사로국(신라)의 동북쪽에서 일어난 국경분쟁을 조정해주기 위해서였다. 사로국은 국경 분쟁을 스스로 해결치 못해 연로한 수로왕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국경 분쟁을 조정한 수로왕을 위해 연회가 베풀어졌지만, 한기부의 촌장이 참가치 않았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수로왕은 노비를 시켜 그 촌장을 죽이고 가락국으로 돌아 왔다. 가락국은 532년에 신라에게 통합되지만, 초기에는 경주의 사로국 보다 훨씬 강력한 세력이었다. 이러한 김해 가락국과 경주 사로국 사이의 우열관계는 400년경부터 신라가 고구려를 등에 업기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다.

 

해상왕국 :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삼국지』는 가락국을 비롯한 가야의 해상왕국적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일본열도로 가는 바닷길의 중심에 김해의 가야국이 기록되고 있다. 김해,마산,고성 등의 가야는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고대 동아시아의 중개무역항이었다. 김해,창원,고성 등의 가야고분에서 출토되는 중국과 일본의 문물은 이런 사실을 증명해 준다.

 

김해 회현리 조개무지에서는 화천(왕망전)이라는 화폐가 출토되었다. 화천은 10년여 밖에 사용되지 못한 화폐이지만, 평양과 일본열도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3세기 경에 황해도에서 일본열도를 왕복하는 데는 2년 반 정도가 걸렸다. 한번 왕복하는데 2년 이상이 걸렸던 바닷길의 곳곳에 10년 밖에 통용되지 않은 화폐가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 바닷길의 왕래가 얼마나 빈번했던 가를 보여준다. 김해를 비롯한 가야국은 가까운 마한과 진한은 물론, 멀게는 대방군과 일본열도로 철을 수출했다. 가야에서 생산된 철과 중국,일본의 문물이 교환되었고, 가야의 여러 나라는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가야국과의 전쟁 : 바로 이러한 해상교역권에 대한 쟁탈전이 ‘포상팔국의 난’이었다. 창원,마산,고성 등의 포상팔국은 김해 가락국의 주도권에 도전했다. <삼국사기>에는 209~212년까지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포상팔국을 물리치지 못한 가락국은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포상팔국의 군대는 해로로 울산까지 진출했다. 남해안에서 벌어진 최초의 해전으로도 중요하지만, 가야국들이 서로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가락국의 건국신화에 보이는 형제와 같은 사이는 이미 아니었다. 문화적으로는 비슷하더라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전쟁도 불사해야 했던 관계였던 것이다.

 

 

고구려와의 전쟁 : 313년에 고구려는 서북한에서 중국을 내쫓았다. 한민족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남해의 가야국들에게는 그렇지 못하였다. 중국의 선진문물이 더 이상 공급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가야문화의 중심은 북부내륙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계기는 400년에 광개토왕이 파견한 5만의 고구려 군이었다. 가야와 왜의 연합군에게 침략 받던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고구려는 ‘임나가라’(김해, 고령,)의 성을 빼앗고, ‘안라(함안)군’을 격파했다. 이제 남부의 가야는 쇠약해졌고,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신라는 남부가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된다.

 

 

대가야의 등장 : 가야의 새 중심으로 등장한 대가야는 479년에 중국의 남제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다. 가야에서 중국과 직접 외교관계를 가진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남제는 양자강 이남에 있었다. 경북 고령에서 양자강까지 도달했었을 행로를 생각해 보면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령에서 합천으로 내려와 황강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으로 나오면 좀 낫겠지만, 낙동강 하구는 신라에 장악되어 있었다. 그러니 고령→합천→거창→함양→남원(운봉)의 육로를 거쳐, 배를 타고 섬진강을 내려와 하동에서 남해로 나섰을 것이다. 남해를 지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다 황해를 건너고, 다시 중국 연안을 따라 남하해서 겨우 양자강 하구에 도착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때는 고구려도 백제도 왜도 사신을 보내지는 않았다. 대가야는 단독으로 외교사절단을 파견했던 것이다. 전북 부안의 죽막동 유적에서 대가야의 항아리에 가득히 담겨 출토된 유물들은 대가야의 외교사절이 해상의 안전을 기원하면서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다.

 

 

신라의 구원전 : 481년에 대가야는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구원하는 전쟁에 나서게 된다. 대가야는 지금의 흥해에서 고구려와 말갈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러한 대가야의 움직임을 백제의 부용으로 보려는 생각도 있지만, 그렇게 볼만한 적극적인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신라와 백제가 결혼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가야가 자발적으로 신라와 백제의 편에 서서 고구려에 대항함으로써 한반도 세력의 균형과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해야할 것이다.

 

 

가락국의 쇠퇴 : 496년에 김해의 가락국은 신라에 흰 꿩을 보냈는데 화친의 표시였다. 부산 동래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5세기를 경계로 가야에서 신라의 문물로 바뀌고 있다. 이제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 없이도 낙동강 서쪽의 가야를 위협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라의 진출에 직면했던 가락국은 화친제의로 휜 꿩을 신라에 보냈던 것이다. 전기가야의 중심세력이었던 가락국의 쇠퇴를 말해주는 기록이다. 김해지역에서는 수없이 많은 가야고분이 조사되었다. 그러나 고령,창녕,함안에서 보는 대규모의 봉토분은 없다. 이를 고총(高塚)이라고도 하지만, 가야 지역에서는 5세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김해에 이러한 고분이 없다는 것은 고총을 만들기 시작한 단계에는 이미 가락국이 그럴만한 실력을 잃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532년에 신라에 투항한 것은 가락국 멸망의 마지막 절차에 불과했다.

 

 

결혼동맹: 남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려 하자, 대가야는 522년에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었다. 왕실간의 결혼을 통해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려 했을 것이다. 대가야왕과 신라왕녀는 왕자도 낳게 되었지만, 양국의 동맹관계는 529년에 결렬된다. 529년은 서쪽의 백제가 섬진강을 따라 남하하여 다사(하동)를 석권한 해이다. 백제가 하동까지 진출하게 되자, 대가야는 서쪽과 동쪽의 백제와 신라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그래서 신라는 흔들리는 대가야와 동맹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결혼을 통한 대가야와 신라의 동맹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안라국의 외교 : 신라가 김해와 창원 지역을 석권하자 제일 먼저 불안을 느낀 것은 함안의 안라국이었다. 6세기 전반에 안라국왕은 대가야 등의 가야제국과 공동 외교를 전개하였다. 왜국에서 파견된 임나일본부=왜의 사신들을 함안에 주재시키면서 왜의 세력을 이용하려 했고, 신라의 침략에는 친백제외교로, 백제의 진출에는 친신라외교를 통해 신라와 백제를 견제하면서, 가야의 독립을 유지해 보려 했다. 이러한 가야의 외교는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외교는 외교일 뿐이고, 국력이 모자라면 나라를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554년에 대가야는 백제와 함께 관산성(옥천)에서 신라와의 전투에 참가했지만, 백제와 함께 참패를 경험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 전쟁에서 백제와 대가야는 무려 40,000여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었다. 백제의 타격도 컸겠지만, 대가야는 이 때의 충격 때문에 8년 뒤인 562년에 신라에 멸망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