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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94 : 가야의 역사 12 (철의 제국 가야 7)

두바퀴인생 2011. 3. 27. 04:12

 

 

 

한국의 역사 194 : 가야의 역사 12 (철의 제국 가야 7)

 

2차 민족대이동과 가야 제국의 멸망 

 

 

기후의 반역과 유목민족의 남하

가야가 건국 되기 71년 전인 기원전 29년부터 중국의 기후가 한랭기로 접어들었다. 이는 중국 주변에 있는 몽골 초원이나 한반도에도 상응하는 기후 변화가 발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원전 3000년 이후 기후 변화를 통해 제1,2차 한랭기로 표현하였다.

 

기후 변화로 인한 기온의 하강은 동아시아 여러 지역 중에서도 특히 유목민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지구 기온의 하강이 당장 목초지의 감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농경지의 감소가 이농현상을 초래하듯이, 목초지의 감소는 이목을 불러왔다. 이목은 자연스럼게 유목민족의 남하로 이어졌다. 후한(25~220) 때부터 흉노족.갈족.선비족.저족.강족 같은 유목 혹은 반농반목의 민족들이 중국 영토로 들어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기후의 변화와 목초지의 감소에 기인한 것이었다. 여기서 갈족은 흉노족의 일파이고, 선비족은 터키계라는 설이 있으며, 저족과 강족은 타베트계였다.

 

유목민족의 남하는 동아시아 농경민족들에게 분명히 해일 같은 것이었다. 그로 인한 농경민족들의 피해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대비하느냐에 따라 피해 규모를 최소화 할 수는 있었다. 즉 유목지대로부터 농경지대를 보호하는 방파제 같은 역활을 하는 중국(당시 후한)이 유목민족의 남하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 후한은 그런 역활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되엇다. 왜냐하면 제국의 정치 시스템이 급격하게 해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한 중엽 이후 지방 호족들이 대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무장 세력을 갖춤에 다라 후한이라는 나라는 일종의 신경마비를 겪고 있었다. 지방이 독자적으로 행정.군사.경제를 장악함에 따라 중앙의 명령이 제대로 지방 곳곳에 전달되는 말초신경이 손상된 것이었다.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했던 제국이 이처럼 정치적 약체화가 진행되자, 서북방 유목민족들이 대거 남하하기 시작했다.

 

후한이 약해진 틈을 타서 중국 영토로 서서히 들어온 유목민족들은 후한과 삼국시대를 지나 진나라 말기에 들어 결정적 기회를 잡았다.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8명의 황족이 각축을 벌인 소위 '팔왕의 난(290-306)' 때 각 세력이 병력 증강을 위해 유목민족들을 대거 용병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렇게 유목민족들이 중국 영토에서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자 무능한 왕조에 대해서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반정을 일으켜 제거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 땅에는 4세기 초반부터 이른바 5호 16국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다섯 이민족, 즉 흉노.갈족.선비족.저족.강족이 304년부터 439년까지 북중국에 열여섯 나라를 세우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로써 북중국은 유목민족들의 손에 넘어가고 한족 정치세력은 남쪽으로 밀려가게 되었다. 양자강 유역이 개발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유목민족들의 남하로 황하 유역을 빼앗긴 한족들이 아래로 내려가 양자강 유역을 개발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베트남인들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월족은 이로 인해 양자강 유역을 빼앗기고 훨씬 더 남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철기문명의 확산 이래로 두 번째로 동아시아가 민족대이동을 겪은 것이다.

 

당시 한민족 국가 중에서 이런 기회를 가장 잘 이용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가 요동의 지배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5호 16국의 혼란에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대외 팽창을 단행한 결과였다. 오늘날 북경 일대인 유주를 통치하도록 고구려에 의해 임명된 유주자사 진에게 13명의 한족 출신 태수(군수)들이 찿아와 하례하는 벽화가 있는 북한 남포특급시 소재 덕흥리 고분과 관련하여, 이것이 404년에 고구려가 북경 일대를 점령하고 이 지역을 간접적으로 지배하였음을 보여주는 연구결과가 나온 것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고구려의 전진은 5세기 중엽에 접어들면서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하면서 멈추게 되었다. 고구려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던 중국의 혼란이 북위에 의해 진정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서진은 이렇게 해서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자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추진하게 되는데, 바로 신라. 백제. 가야에 대한 공격이었다.  

 

 

고구려 장수왕 독트린

중국의 5호 16국 시대에 고구려와 더불어 가장 인상적인 성공을 거둔 나라는 백제였다. 그 중심에 선 군주가 요즘 KBS 인기 드라마로도 방영되고 있는 백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이었다. 근초고왕은 마한 지역을 복속시켜 남해안에 도달하는 한편, 재위 26년(371)에는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재위 331-371)의 목숨을 빼앗았다.

 

요동 지배자인 고구려의 입장에서 볼 때 요동을 방어하는 남쪽 경계선은 압록강이 아니라 대동강이었다. 압록강은 2차적 관문에 불과하였다. 훗날 당나라와 신라가 신라의 삼한통일 후 벌인 나당전쟁에서 대동강을 경계로 세력균형을 이룬 것처럼 요동 지배자는 요동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대동강을 경계로 해야만 마을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서진정책을 추구하던 고구려가 남쪽의 백제가 평양성을 위협하는 현실에 극도로 공포심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압록강을 경계로 할 경우에는 언제 압록강을 넘어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중원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요동 세력은 먼저 한반도 쪽으로부터 안정시켜 놓아야 했다. 왜냐하면 한반도를 그대로 두고 중원으로 진출할 경우에는 배후에서 기습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거란,여진,몽골족,만주족이 고려와 조선을 침공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백제의 근초고왕 당시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여유가 있었다. 서쪽의 분열과 혼란으로 남에서 백제가 치고 올라온다고 해도 양쪽을 동시에 상대가 가능했다. 그러나 북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탁발부의 모용선비에 의해 대륙의 혼란 양상이 수습되기 사작하였고 북위는 계속 성장하여 439년에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사에서는 이때를 기점으로 5호 16국 시대의 종결점인 동시에 남북조 시대의 시작으로 잡고 있다. 북중국의 유목민족 출신 국가와 남쪽의 한족 국가가 대립하던 시기로 남북조 시대라고 부른다.

 

북중국의 힘이 북위로 집중되자, 고구려의 장수왕은 현실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북위가 버티고 있는 중원쪽보다 남북조 사이에 균형 외교를 통해 전선을 안정시키고 실리를 챙기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장수왕은 서쪽의 중국의 남북조와 균형 외교로 상대하고 남쪽의 한반도는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을 '장수왕의 남진정책' 또는 '장수왕의 독트린'으로 명명하기로 한다. 

 

장수왕의 적극적인 남진정책으로 고구려는 남양만-죽령까지 확장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손실을 입은 나라는 백제였다. 백제는 한성이 함락되어 개로왕이 전사하고 475년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거시적으로 보면 백제 못지 않게 신라도 북으로 고구려, 서로는 백제, 동으로는 왜국, 남으로는 가야에 둘러싸인 나라였다. 이런 여건에서 신라는 한순간에 나라가 산산조각 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제26대 성왕 때부터 전성기를 회복하기 시작한 백제는 다시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천도하고 정치제도 정비와 불교 진흥 등 내부를 단속하는 한편,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일시적으로나마 한강 유역을 다시 확보하기도 하였다. 신라는 법흥왕 시대를 맞아 율령을 반포하고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군사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국가 체제 확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진흥왕 시대에는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확보함으로써 이후 신라가 대동강 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성공하였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나타난 백제와 신라의 반작용은 가야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가야의 멸망이었다.

 

 

 

백제.신라의 공세와 가야의 운명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맞서 백제와 신라가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정세 속에서 누구보다도 곤경에 빠진 것은 가야연맹이었다. 그런데 가야연맹에 있어서 진정한 곤경은 새로운 시대를 맞을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중국 5호 16국 시대 백제와 신라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데 비해, 가야는 그마저도 해놓지 못했다. 그래서 가야는 주변국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기야는 제1차 민족대이동 시기만 해도 토착세력과 김수로 집단, 허황옥 집단의 결합으로 세계사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민족대이동 시기에는 연맹의 지도자인 금관가야는 중국의 5호 16국 시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이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 즈음인 5세기 초에는 연맹에 대한 지도력까지 상실하고 말았다. 400년 백제,가야,일본이 합동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간 상태에서 신라의 요청으로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 5만이 신라를 지원하여 가야는 종발성까지 빼앗기며 고구려군에 대패하는 바람에 금관가야의 지도력에 결정적으로 타격을 주었으며 전기 가야연맹의 해체로 이어졌다. 금관가야의 뒤를 이어 5세기 후반에 연맹을 복원하고 후기 가야연맹을 이끈 것은 대가야였다.

 

가야는 연맹체에서 중앙집권국가로 도약하지 못했다는 점 외에도 가야의 발목을 잡은 또 다른 문제는 세포분열이었다. 처음 토착 9촌을 6가야로 재편했던 가야는 응집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더욱 분열되어 후기 가야연맹 맹주였던 대가야가 최종적으로 멸망한 건국 521년(562)만인 당시에는 10가야로 바뀌어 있었다. 또 우륵 12곡에 따라 가야가 12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이론도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가야의 내부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는 상태에서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압박을 견뎌내기 위해서 가야를 통합하여 국력을 키우는 방안을 선택했다. 그래서 6세기 초에는 백제의 압박이 거셌다. 백제는 일본과 협의하여 가야의 4개 현을 빼앗았다. 그래서 일본과의 모든 무역 거래는 백제가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가야를 차지하게 된 것은 신라였다. 먼저 가야 건국 491년(532)에 신라는 전기 가야연맹 맹주였던 금관가야를 흡수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마지막 국왕이자 김유신의 증조부인 김구해는 자신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신라에 투항했다. 이로써 김수로의 직할이었던 금관가야는 건국 491년 만에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금관가야의 멸망은 나머지 가야연맹과 왜국의 연대를 더욱 강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라가야(안라국)와 대가야(가락국)를 비롯한 가야연맹 소속국의 대표자들이 임나일본부 소속의 길비신과 함께 백제 성왕에게 가서 가야의 부흥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일역사공동위원회는 2010년 3월 22일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의 야마토 정권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을 수는 있지만, 임나일본부라는 공식 본부를 설치하여 지배활동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공표했다. 임나일본부란 한계의 표현대로 임나 주재 왜신의 사무소 정도로 이해하는 게 타당하리라 본다.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무역 대표부나 대사관 같은 곳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가야의 하락세와 신라의 상승세는 바다 건너 왜국이 저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야 건국 521년(562)에 가야연맹 주체인 대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함으로써 500년 가야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가야에 대해 앙금을 가질 수 밖에 없엇던 신라는 결국 가야 500년 역사를 종결짓는 터미네이트의 역활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