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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92 : 가야의 역사 10 (건국, 철의 제국 가야 5) 본문
한국의 역사 192 : 가야의 역사 10 (건국, 철의 제국 가야 5)
철기문명의 확산과 민족 대이동
한반도 남쪽 끝단 가야 땅에 단순히 외국인 세 명이 이민 온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세 집단이 가야 땅에 도래했다면, 이들을 가야 땅으로 움직이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 같은 인적인 흐름의 배경에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배경이 있다는 점은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가야 건국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이전의 동아시아 민족대이동의 원인을 살펴야 할 것이다. 김수로, 석탈해, 허황옥, 박혁거세, 김알지 집단이 가야와 신라 땅에 도래한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려면 이들 집단을 가야와 신라 땅으로 끌어들인 원동력을 먼저 규명해야 할 것이다. 그 원동력이란 직접적으로는 동아시아 민족대이동이었다.
민족 대이동이 발생하려면 크게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인접한 민족들 간의 충돌(민족충돌)과 정치적 경계의 이완(경계이완)이라는 조건이다. 민족들 간의 상호 충돌로 특정 집단이 기존 영역을 상실하고, 거기에 이 집단의 이동을 가능케 할 정도로 정치적 경계가 이완되었을 때 민족대이동의 발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철기문명의 등장
세계 주요 지역에서 철기가 청동기를 대체할 수 있었던 데는 철기의 우수성이라는 요인 외에 다른 요인도 있었다. 청동기의 재료인 구리나 주석에 비해 철기의 재료인 철광석은 보다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재료에 대한 접근성 측면에서 청동기보다 철기가 유리하였던 측면이다.
인류가 최초로 철을 사용한 흔적은 고대 이집트 제4왕조(기원전 2613-2500)의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철을 가열할 고온의 노가 개발되지 않았고 철광석의 채집도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철기문명이라고 할 만한 단계는 아니었다.
철기문명의 단서가 된 것은 목탄의 접목이었다. 철을 목탄과 접목시켜 가열하고 두드려 탄소와 화합시킴으로써 비로소 강인한 철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술이 개발된 것은 기원전 15세기경이었다. 오늘날 터기 지방에 해당되는 소아시아 서부지역과 터키와 이란의 중간 지역인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이런 신 기술이 처음 선보였다.
이 신기술은 소아시아와 시리아 북부에서 활동한 히타이트족의 손을 거쳐 기원전 13세기경에는 세계 주요 지역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필두로 12세기에는 이집트 지역, 기원전 10세기에는 인도 지역, 기원전 9세기에는 이탈리아와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철기문명이 전파되었다. 중국의 경우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476년)에 철기문명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철기문명이 중국 등 동아시아지역에 전파된 것은 이란계 유목민족인 스카타이족의 공헌에 힘입은 바 크다. 남부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을 무대로 동서양의 문화 교류에 공헌한 스카타이족의 기동력이 없었다면 철기문명의 보급은 그만큼 늦었을 것이다.
철기문명의 파괴력
철기문명은 엄청난 환경파괴적 괴력을 가져왔다. 기존 체제를 두들겨 깨뜨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체제를 건설했다. 흥미롭게도 철기문명을 보급한 쪽보다 철기문명을 받아들인 쪽에서 상대적으로 더 크게 나타났다. 이는 유목사회보다 농경사회에 그 파급 효과가 엄청났다.
철기문명이 유목사회나 농경사회의 군사력 질적 향상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유목사회가 더 우위를 점하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유목사회보다 농경사회에 더 큰 변화를 가져왔다. 농경사회는 우수한 농기구를 만들어 냄으로써 식량생산의 증대를 가져왔고 이는 국력의 증대로 이어졌다. 농기구를 사용한 심경은 농업의 용이성, 식량증대, 잉여농산물 확보로 이어지면서 종래의 씨족 공동체 협업에서 가족 단위의 농경이 가능한 사회변화를 가져왔다.
잉여 농산물의 증대는 계급 분화의 촉진을 가져왔고, 기족 협업의 등장은 국가 권력의 강화로 이어졌다. 국가 권력이 굳이 씨족 공동체와 굳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개인.가족의 접촉이 그만큼 더 용이해졌다는 점이다. 국가와 개인. 가족의 중간에 있던 공동체가 무너짐으로써 국가 영향력이 그만큼 더 증대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철기문명은 농경사회를 더 불평등하고 더 중앙집권적인 새로운 사회로 탈바꿈 시켰던 것이기 때문에 환경파괴적이라고도 하겠다.
새로운 사회와 사상의 태동
철기문명이 등장함에 따라 사회 성격이 급속하게 바뀌었고 기존의 가치관이 몰락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점차 공동체 유대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고 서로 비슷한 농업 생산에서 심경이 도입되면서 빈부의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공산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이었다. 공동체의 해체에 따라 개인과 가족에게 성큼 다가온 국가 권력은 세상이 무서워지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시대의 개념이 나타나면서 기원전 6세기경에 세계 도처에서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는 사상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석가모니.공자.노자.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맹자.장자 등의 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고전의 창시자들이었다. 이들은 철기문명이 보급되면서 새로운 문화현상이 나타나자 이를 통찰하고 해석해주는 새로운 철인들로 나타났고 철기문명을 어느 정도 경험한 이후에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며 등장했다. 그들이 환영받은 것은 새로운 문명에 맞는 이념을 제시하였으며 동시에 대중의 공감을 얻어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난공불락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인류가 아직 철기문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의 세기는 내적 준비, 즉 사상적 무장의 기간에 해당된다. 이러한 내적 준비에 뒤이어 외적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강력한 집단이 등장하면서 주변 세력을 통합하려는 정치적.사회적. 경제적. 지리적 통합 활동이었다.
통합, 그리고 충돌
내적 사상적 무장을 끝낸 동아시아는 외적 활동에 돌입하였는데, 바로 대표적으로 중국에서 전개된 전국시대(기원전 5세기-3세기)였다. 전국 7웅으로 대표되는 전국시대가 진나라와 한나라에 의해 통합되었던 것이다. 요동에서는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출현하였고 북쪽 유목지역에서는 흉노라는 대제국이 나타났던 것이다.
통합 운동은 먼저 중국에서 나타났는데,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의 중국 통일이었다. 진시황제는 통일을 이룬 다음 흉노를 자극함으로써 북방 유목지대의 통일이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이란계 스카타이족 등이 유라시아 초원의 서부와 시베리아의 서부를 지배하고 있을 때 시베리아 동부에서 가장 위력을 떨친 세력이 투르크-뭉골계인 흉노였다. 이 흉노는 아주 오랜 옛날에는 '훈육' 또는 '호(胡)'라 불리다가 기원전 9-8세기경에는 '험윤'이라고 불리었으며 로마나 이란에서는 '훈(Hun)'이라고 부른 종족과 유사한 명칭을 지녔던 민족이었다. 흉노니 훈육이니 험윤이니 하는 표현은 한결같이 '험상궃은' 인상을 풍긴다. 흉(匈) 이나 노(奴)는 한눈에 뵈도 안좋은 글자이며 흉흉한 글자로 그들의 작학상을 표현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흉흉한 불량집단을 상대로 전면전을 펼친 쪽은 진나라였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기원전 221년 오르도스(지금의 중국 삼서성 지역 일대) 지방에 대한 팽창 정책을 시도했다. 이곳은 황하강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지역으로 유목지대와 농경지대의 경계지역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장악한 쪽이 동아시아 패권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오르도스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흉노에 대하여 진나라는 장군 몽염(?-기원전 209년)으로 하여금 선제공격을 시도하여 오르도스를 점령하고 흉노족을 700리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농경지대에서 출현한 최초의 통일제국이 유목민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그러나 이것은 항구적인 점령이 되지 못했다. 진나라는 내부적인 역량을 충분히 키우지 못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팽창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진시황제는 지방 세력을 충분히 제어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무리한 중앙집권정책을 시도하였고 지방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인 것이 군현제였는데,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어 그 아래 현을 설치하여 군에는 군수(태수), 현에는 현령을 두고 이들은 중앙 황제가 임명한 관료였다. 황제가 지방까지 직접 손길이 미치도록 만든 제도였다.
당시 지방세력이 불만을 품었다는 것은 사기의 유방본기를 보면 유방이 패현(강소성 서남부)에서 패공으로 추대되었다가 한수를 낀 관중 지방에 들어간 후에는 한왕으로 추대된 사실이나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겟느냐?"라는 말로 유명한 진승.오광이 옛 초나라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초나라를 발전시킨다'라는 의미의 '장초'라는 국명을 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진나라의 중앙집권체제에 대해 반발하는 움직임이 지방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흉노의 묵돌선우는 흉노족 내부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아버지인 두만선우를 죽이고 흉노의 선우가 된 다음 대대적으로 진나라에 대한 역공을 펼치기 시작하였던 인물이다. 선우에 즉위한 묵돌은 동쪽의 동호(선비,거란족 조상)를 격파하고 서쪽의 월지도를 점령하면서 동아시아 유목지대를 통일하여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중국의 진.한 교체기를 이용하여 통일을 이룬 다음 중국 농경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면서 약탈과 방화,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는 등 변경지역을 혼랍스럽게 만들었으며 전한 한무제가 흉노정벌전쟁을 도모하기전까지 중국측의 조공을 받으며 우월적인 세력을 과시하였다.
진나라를 멸망 이후 삼국시대를 거쳐 중국을 통일한 유방(기원전 202-195)은 흉노족과 평성에서 40만의 흉노군과 한나라 30만 병력이 대치하여 크게 일전을 벌였다. 평성은 지금의 산서성 대동(산시성 다퉁)으로 북경에서 서쪽 방향으로 직진하면 만리장성과 만나는 지점이다. 대동은 장성 안쪽에 있는 도시로 중국 최대 석굴사원인 운강석굴이 있는 곳이다. 이 전투에서 흉노 기병 40만은 유방의 30만 군을 백등산에 몰아넣고 포위하였는데 성공하였다.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유방은 흉노 선우인 묵돌의 부인에게 뇌물을 써서 묵돌의 마음을 돌려 겨우 살아나온 전쟁이었다. 조건은 한나라 공주를 시집보내고 매년 막대한 조공음 물론 변경에 관시(시장)을 열어 매년 옷감과 음식 식량을 제공하기로 약조하였다. 한마디로 한나라 유방이 모든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항복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한무제의 등장과 대흉노토벌전쟁
한고조 때 형성된 흉노와 한나라 관계는 흉노가 우위를 점한채 약 100년 정도 유지되었다. 이런 구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한나라 제7대 황제인 무제(재위:기원전 141-87년)의 등장 이후였다. 한고조 이후 흉노족에게 평화를 구걸해온 굴욕적인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한무제는 노예 출신인 위청. 곽거병 장군을 등용하여 흉노족에 대한 대대적인 압박을 재위기간 중 약 50년 동안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창업 초기, 한나라는 한고조의 부인 여태후의 독단으로 인해 초기에는 혼란을 거듭하였으나 제5대 문제, 제6대 경제를 거치면서 '문경지치'를 이루었고 한무제의 경제정책 성공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한 것이었다.
흉노족에 대한 무제의 공략은 성공적이었는데, 한나라의 군사적 압박에 밀린 흉노족이 고비사막 넘어로 근거지를 옮겨 장성 부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나라도 많이 지쳤고 양쪽은 소강 상태로 한나라<흉노 구도에서 한나라=흉노 구도로 정착시킨 것만 해도 한나라 입장에서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이러한 소강 상태를 이용하여 한무제는 주변 정복에 나섰는데, 중국 남부와 베트남에 해당하는 남월, 중국 서남부에 해당하는 서남이를 평정한데 이어 동북방의 고조선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남월에 9개 군, 서남이에 7개 군, 고조선에 4개 군 등 각 지역에 군이라는 행정 단위를 설치하였다.
이때 설치한 군은 변군으로, 중국 내지에 설치된 내군과는 성격이 달랐는데, 징세, 징병의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한나라의 법률도 강제하지 못했다. 형식적인 군수(태수)를 파견하는데 그치고 실질적인 통치는 토착세력에게 맡겼다.
변경 세력을 무력화시킨 다음에 한무제는 흉노를 고립시키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장건(?-기원전 114년)을 서역에 파견하여 대월지국, 오손, 대완국 등과 동맹관계를 맺으려 했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아프카니스탄 북부의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탄 등과 영토가 겹치는 나라들이었다. 이들 나라들을 끌여들여 흉노를 양쪽에서 협공하겠다는 것이 한무제의 전략이었다.
무제의 협공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중국은 대신 중앙아시아와 연결되는 '오아시스길(비단길)'이라는 새로운 경로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이 길은 유라시아 대륙의 교통로인 초원길이 유목민족에 의해 장악된 상태에서 비단길의 개척은 농경민족이 유목민족에게 대항 할 수 있는 문화적 경로를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기여했다.
이후에도 한나라는 정면승부와 이간책을 구사하면서 흉노족의 힘을 서서히 약화시켜 나갔다. 전한에 이어 후한(25-220년)은 흉노족의 분열을 이용하여 남흉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고, 북흉노의 영향력이 미치던 서역에 반초(33-102년)의 원정군을 파견하여 수차레에 걸친 공략으로 흉노를 격파하여 서쪽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일명 '훈'족으로 서쪽으로 밀려나면서 동유럽 지역으로 침공해 들어가서 자신들의 터전을 확보하였다.
민족대이동의 대풍랑
한나라 주변 세력들이 분열 또는 멸망의 과정을 거치면서 각지의 지배층이 세력을 이끌고 동아시아 각지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인간과 상품의 이동을 막던 강력한 정치권력들이 붕괴되면서 그만큼 이동이 자유스러워진 측면도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민족대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양상은 북방에서 남방으로 민족이동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에 '천손강림' 유형의 건국 신화가 많아 등장하는 것은 천(天), 즉 북방으로부터 유목민족들이 대거 남하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유라시아 대륙의 최동단이자 한반도의 최남단인 가야 땅 역시 그러한 시대적인 흐름으로부터 예외일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격변속에서 가야 땅에 세 외래 집단이 도래하였고. 그 중 두 집단이 토착세력과 더불어 가야 문명의 건설에 참여했다. 이런 점에서 가야의 건국은 철기문명의 등장과 연계된 일련의 인과관계가 낳은 역사적인 산물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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