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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91 : 가야의 역사 9 (건국, 철의 제국 가야 4) 본문
한국의 역사 191 : 가야의 역사 9 (건국, 철의 제국 가야 4)
허황옥 일행의 도래
김수로의 국혼
가야 건국에 참여한 세력으로 토착세력인 9간과 외래세력인 김수로 집단 이외에 또 다른 그룹이 있었는데, 허황옥 일행이 바로 그들이다. 바닷길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의 최동북단에 상륙한 허황옥 일행은 기존의 두 집단과 함께 신생 가야를 건설하는 데 참여했다. 그 시작은 김수로와 허황옥의 국혼이었다.
가야 건국 7년(48년) 7월 27일로부터 시작한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이날 토착세력인 9간이 김수로를 찿아와 혼인을 제의했다. 자신들의 딸 중에서 하나와 결혼해달라는, 이른바 혼인 동맹의 제안이었다. 정상적인 대부분의 경우라면 외래 군주가 토착세력의 혼인 제의를 수락하는 게 상례였지만, 김수로는 "경들은 염려 말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처럼 김수로는 자신의 혼인을 하늘의 뜻에 맡기겠다며 토착세력이 제의한 혼인 동맹을 거부했다.
가락국기의 기록된 정황을 볼 때, 김수로는 9간의 제의가 있었기 이전에 이미 자신의 혼인을 은밀히 준비했던 듯하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가야 해안에 출현한 허황옥이 김수로에게 '금년 5월부터 부모님의 꿈에 상제가 나타나 당신과 결혼을 명령했다."고 말한 점을 볼 때, 김수로가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사전에 허황옥과 혼인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김수로는 특사를 보내 비밀리에 허황옥과 혼인 문제를 협의하였고 가야 땅으로 초청한 것이다.
9간과 회동 이후 국혼 작업의 마무리에 돌입한 김수로는 유천간과 신귀간을 각각 김해 앞 바다쪽에 있는 망상도와 승점으로 보내 왕후를 맞이하도록 했다. 신귀간은 승점에서 망상도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다가 궁궐로 와서 신속히 보고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과거에는 오늘날 김해시 남쪽 경계가 바다와 맞닿아 있었고 궁궐 인근의 승점이 내해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망산도까지 바다로 이어져 있었다.
"왕후가 바다에서 올 것이니,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라는 다소 황당한 명령을 받은 유천간은 망상도로 가서 배를 기다렸다. 망상도에서 기다린지 며칠, 붉은 돛과 붉은 기를 단 배들이 가야 해안으로 다가온 것은 허황옥 일행이었다. 이 배에 탄 20여 명은 망산도에서 유천간 등이 보낸 횟불 신호를 보고 뭍으로 올라왔다. 김수로의 왕후가 될 허황옥 일행은 그렇게 가야 역사, 아니 한국사에 출현하였다.
그런데 상륙 후 가야 측과 허황옥 일행은 의전 문제로 실랑이를 벌였는데, 신랑이 나오지 않고 장관격인 9간을 보낸 것에 불쾌감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결국 타협하여 김수로가 궁궐 서남쪽의 산기슭에 임시 궁궐을 차려놓고 대기하고, 허황옥이 그쪽까지 좀 더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김수로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무게감을 가진 여인이었다.
타협을 본 허황옥 일행은 다시 배를 타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별포 나루터에 배를 대고 상륙하였다. 20여 명이 탔던 배에는 갖가지 비단과 옷가지는 물론이고 많은 보석들이 살려 있었다. 주로 중국제 물건이 많았다.
그곳 언덕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허황옥 일행은 이상한 의식을 벌였는데, 산신령에 대한 제사를 올리고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제단에 바쳤다. 처녀가 바지를 벗는 것은 결혼을 위한 통과 의례로 해석한다.
허황옥은 누구인가?
임시 궁궐에서 첯날밤, 침실에 들어간 뒤에야 신부는 처음으로 신랑과 통성명을 했다. 허황옥은 자신은 16세라 했다. 가락국기에 나오는 년도는 실제와 맞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며 김수로의 나이가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
허화옥이 자기 고향이라고 소개한 곳이 아유타국이라 했다. 많은 사람들이 허황옥이 인도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실제 가야의 파사 탑의 원석이 인도 여러 곳에 있는 돌과 비슷한 성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런 인식은 오래 전부터 존재하여 왔는데, 자료로 조선 인조 24년(1646년)에 허목이 쓴 '보주태후릉비음기' 등을 근거로 비석 뒷 면에 새긴 글을 이야기 한다.
비문 내용에 따르면, 아유타국의 정체를 두고 인도의 남천축국이냐 아니면 서역의 허구.허황지국이냐 하는 논란이 오래전부터 존재하여 왔다. 이런 견해들을 종합하면 아유타국은 인도나 중앙아시아의 나라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구체적인 위치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수로왕릉의 쌍어문 문양이나 언어적인 유사성 등을 고려할 때 아유타국은 인도에 실제 존재했으며, 그곳이 가야 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구지봉의 수로왕비릉의 비문에는 보조태후 허씨릉이라고 새겨져 있다. 보주라는 이름이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연구자들에 의하면 보주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추적한 결과 중국 사천성 안악현의 옛 이름이 보주라 했다는 사실을 밝혀 내고 허씨 집성촌도 존재한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 지역은 중국 중경의 서쪽에 있는 도시로 그 지명은 북주 때 처음 생겼으며, 보주태후란 명칭은 그 이후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애초 허씨 가문 일행이 국제 정세의 변동에 따라 이동하였는데, 기원전 1세기 경에 서북쪽의 쿠산족 침략을 받아 특권층으로 있던 허씨 일족은 인도의 아요디아를 떠나 동쪽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들은 중국의 보주로 갔다. 안악현 허씨 집성촌인 서운향의 우물 앞 암벽에 쌍어문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는 우물인 신정의 유래를 설명하는 글귀가 있는데, "후한(동한)초 허씨의 딸 황옥이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가 남달랐다."는 내용이 나온다. 가야 건국과 겹치는 후한 초기에 허황옥이란 여인이 이곳에 살았다는 증거이다.
허씨 일족은 후한 광무제 시절 보주를 포함한 그 지역 일대에서 신생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소수민족 반란이 발생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 그들은 강하, 즉 오늘날의 무한으로 강제 이주당했는데, 무한은 보주와 상해의 중간 쯤 되는 곳이다. 이때 보주의 일족도 이 이주 집단에 끼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김수로와 허황옥은 후한에 대한 반체저 저항 운동이 만들어 준 인연이었다. 김수로 집단은 후한에 의해 멸망당한 신나라 왕실의 일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집단은 신나라가 멸망한 후 서기 23년 이후에도 여전히 군사력을 보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후한에 대한 반체제 활동을 전개하면서 김수로 일족은 동쪽에서, 허황옥 일족은 서쪽 지방에서 반체제 활동을 전개하면서 김수로 일족이 허황옥 일족과 연대하였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서로가 대등한 관계에서 연대가 있었기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락을 주고 받으며 연결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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