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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89 : 가야의 역사 7 (건국, 철의 제국 가야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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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89 : 가야의 역사 7 (건국, 철의 제국 가야 2)

두바퀴인생 2011. 3. 22. 04:21

 

 

한국의 역사 189 : 가야의 역사 7 (건국, 철의 제국 가야 2)

 

 

가공할 철기문명 세력인 김수로 등장

가야 토착세력과 김수로 집단의 만남을 가락국기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년 3월 계욕일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무리 이삼백명이 이곳에 모였다. 사람의 소리 같기도 했다. 형체를 숨기고는 소리만 내며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라고 물었다. 9간 등은 "우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라고 했다. "구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하늘이 내게 명한 바는, 이곳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는 것이다. 이에 일부러 내려왔느라."라고 하였다' 

 

의문의 존재는 하늘의 명을 받고 가야 땅에 내려 오게 되었다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뒤이어 그는 무리에게 노래하고 춤출 것을 명한 뒤에 하늘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공개했다. 가야의 토착세력들은 의문의 존재가 시키는 대로 노래하고 춤을 추며 의식을 거행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자색줄이 내려오고 그 줄끝에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이 있었는데, 금합을 열어보니 왕금알 여섯이 들어 있었다. 수로왕을 비롯하여 가야 건국의 주역 6명은 그렇게 등장했다.

 

이렇게 가야 땅에 등장한 여섯 알은 12시간이 지나자 어린아이로 변했고, 다시 10여 신혼, 즉 10여 일이 지나자 장성한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음력 3월 15일이 되자 그중 첯째인 김수로가 왕위에 올랐다. 이 이야기대로라면 김수로는 생후 12일 만에 왕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신화는 김수로의 등장을 미화시키기 위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가락국기의 김수로의 탄생은 문자적인 출생이 아닌 김수로의 출현을 의미하고 상당한 성숙한 나이 상태에서 즉위하였다고 보면된다. 김수로 집단이 강력한 철기문명을 가진 집단으로 가야 땅에 들어와 토착세력을 제압하고 양쪽의 정치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에 왕으로 즉위하였을 것이다.

 

가락국기에 나타난 건국 과정을 보면 외래세력과 토착세력이 타협을 통해 나라를 세우면서도 외래세력의 입장이 훨씬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김수로 집단은 강력한 철기문명을 가진 무장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건국 과정에서 9촌이 6국으로 개편되었고, 김수로의 국혼 과정에서 9간의 의견이 무시되었다. 건국 7년(48년)에 9간이 김수로에게 국혼을 제의하였으나 김수로는 하늘의 뜻대로 하겠다며 '염려하지 말라'며 건의를 묵살했다. 그리고 9간의 명칭도 촌스럽다며 자신이 정해준 명칭으로 바꿔 부르게 했다. 

 

 

가야 땅을 6등분하다

김수로가 세운 나라는 중앙집권적인 나라가 아닌 김수로가 다스리는 본가야(나중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5가야가 연맹하는 형태의 국가였다. 삼국유사의 오가야에 따르면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가 포함된다.

 

김수로와 같이 등장한 5가야 왕들은 한국고대사 연구자인 문정창씨에 의하면 김수로의 친족들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수로와 비슷한 지위의 사람들로 서로 혈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이 세운 나라가 오래도록 연맹체를 유지한 것을 보면 이들 사이에 끈끈한 유대가 있었고 크게 지위도 다르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김수로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것은 '하늘'은 바로 '북방'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한국의 고대 신화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하늘에서 온 세력들은 모두 북방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수로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그의 등장을 신성시 하고 그가 북방에서 왔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판단된다.

 

 

김수로 집단의 출신지

가락국기에서 김수로 집단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 것은 그들이 흉노족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연구자 문정창은 '가야사'에서 '김수로는 흉노족'이라고 주장했는데, 한나라 무제는 노예 출신인 곽거병. 위청 등을 등용하여 장기간 흉노토벌전쟁을 벌였는데, 흉노 본거지까지 깊숙히까지 공격하였던 곽거병에 의해 흉노 왕자 김일제를 붙잡아 왔는데, 그는 한나라 궁중에서  마부일을 하면서 무제의 눈에 들어 등용되고 나중에는 무제의 최측근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50년 이상 한나라를 통치하던 무제가 죽기 직전에 김일제 등 세 충신들을 불러 후사를 당부하고 죽는다. 그후 김일제는 한 조정에서 막강한 실권자로 군림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죽고 그의 후손들도 한 조정의 중추적인 핵심 역활을 하게 된다. 그의 후손 중에 왕망(문정창씨의 표현은 '김왕망')이란 인물이니 나타나 강력한 외척으로 등장하여 한나라를 뒤업고 신나라(8~23)를 창업하게 되지만, 한고조 유방의 9세손인 광무제 유수(재위 25~27)에 의해 신나라가 망한 뒤에, 김일제의 후손들이 광무제의 탄압을 피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해 가야를 건국했다고 주장했다.

 

문전창씨가 주장하는 근거는 '반고'가 지은 <한서>를 들고 있다.

 

"김당(金當)의 어머니는 남(南)이다. 즉 왕망의 어머니다. 공현군은 같은 뱃속의 동생이다."라는 해석이다.

 

김당은 흉노족 김일제의 증손이다. 그런 김당의 어머니와  왕망의 어머니가 같다는 것은 김당과 왕망이 같은 아버지를 두었다는 이야기이므로 왕망 역시 흉노족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문정창씨의 주장이다. 문정창은 <한서>의 저자 반고가 왕망이 흉노족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망(莽)의 성도 바꾸고 망의 조상들도 제대로 표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물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아버지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 점을 알려주는 기록이 없고, 막강한 가문의 부인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는다는 것도 용납이 되지 않기 때문에, 김당의 어머니와 왕망의 어머니가 동일인인 게 사실이라면 '왕망이 흉노족일 것'이라는 추정은 고도의 설득력을 갖게 한다.. 

 

그러나 문정창씨가 원문에 구두점을 잘못 찍는 바람에 김당의 어머니와 왕망의 어머니를 같은 어머니로 해석했지만, 저자 김종성씨의 주장은 구두점을 찍지 않은 원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김당(金當)의 어머니인 남(南)은 왕망의 어머니인 공현군과 같은 배에서 나온 동생이다."

 

이렇게 되면 김당의 어머니와 왕망의 어머니가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며, 또 김당의 아버지와 왕망의 아버지도 서로 다른 사람이 된다. 따라서 김당의 어머니가 왕망의 어머니와 동일인일 것이라는 전제하에 왕망을 흉노족이라고 판단한 문정창씨의 논리는 사료의 오독에서 기인한 실수라고 평가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왕망이 흉노족이라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한서나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왕망이 흉노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다음과 같은 이유로 왕망이 흉노족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첯째, 한무제 이후로 한나라에서 권세를 잡은 핵심 가문은 곽거병 가문과 김일제 가문이다.그렇기 때문에 별다른 계기도 없이 왕씨 외척이 갑작스럽게 실세 가문으로 등장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곽씨 가문과 김씨 가문은 한무제 이후 대대로 실권을 공유하다가 제8대 한소제 및 제9대 폐주 창읍왕을 거쳐 제10대 한선제 재위기의 초반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한선제 때에 이르러 곽씨 집안이 권력을 독식하기 위해 쿠테타를 일으키려 했다가 기원전 66년에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다. 이로써 기원전 66년 이후에는 김일제 후손들이 단독으로 한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처럼 김씨 일족이 권력을 독차지 하고 있던 시기에 왕씨 집안 출신인 효원왕후의 부친과 형제들이 모두 원제.성제 때 제후에 봉해지고 요직을 독차지 하고 국정을 보좌하는 일은 발생될 수가 없다. 여기서 효원왕후도 김씨이고 왕망도 김씨라면 이 모든 의문은 사라진다. 야만족 흉노족이 한나라 황실을 차지한 데 이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반고가 '사관으로서 양심'보다 '한족으로서의 충성심'을 우선시했다고 이해하면 그런 의문점은 해소될 것이다. 

 

둘째, 왕망은 김일제 가문의 후사를 염려했다. 왕망이 전권을 장악한 뒤인 제14대 한평제 때 일이다. 김일제가 갖고 있던 투후라는 지위는 김일제의 직계 후손이나 김일제의 동생인 김윤의 후손들에게 계승되었는데, 그때에 가서 후사를 낳지 못해 가문의 대가 끓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가문의 위기를 왕망이 나서서 해결하게 되는데 김당과 김흠으로 하여금 투후의 지위를 잇도록 함으로써 김씨 일문의 지배력을 지켜주었고 김당의 어머니를 태부인으로 책봉하고 김흠의 아들인 김천을 제후로 봉하는 데 힘을 쓴 사람도 왕망이었다.

 

셋째, 왕망과 김씨 가문이 중국사에서 동시에 사라졌다. 신나라는 후한 광무제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이때 대부분의 왕망파가 죽거나 축출된 것이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다른 나라로 피신을 갔을 것이다. 그래서 이때 김일제 후손들도 한나라를 떠나고 왕망의 후손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한나라를 떠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묘하게도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하면서 왕망 일족과 김일제 후손들도 권력층에서 모두 사라졌다는 것은 왕망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왕망의 혈통을 검토하는 것은 문정창의 주장을 일부 검증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요약하면, 한나라에 붙잡힌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나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뒤, 그들 중 왕망이란 자가 나타나 신나라를 세웠다가 후한 광무제에게 나라가 망한 뒤에 중국을 떠나 한반도 남부로 이동해 가야를 세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망이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단정적으로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을 판단해 볼 때 왕망이 흉노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김수로는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

가락국기에서는 김수로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했다. 그러나 김수로의 12대 손인 김유신의 전기를 담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김유신은 일반적인 신라인들과 마찬가지로 황제, 즉 헌원씨의 아들로서 동이족의 수장이 된 소호금천씨의 후손이었다. 소호금천씨와 자신들 사이에 흉노족 김일제가 있었다고 인식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고대사 연구자인 권덕영씨에 의해 발견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이라는 비문에서 확인되었다. 이 비문은 1954년에 중국 섬서성 서안시 동쪽 교외에서 출토되어 현재는 서안시 비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비문이다. 묘비의 주인공은 당나라에 살던 신라인 김공량의 딸인 김씨 부인의 묘비이다.

 

이 비문에 따르면, 김씨 부인의 시조는 소호금천씨이고 중간 시조는 김일제로 흉노 도성과 조정이 있었던 용정에서 귀순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용정에서 귀순한 김일제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조상이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내용은 682년에 건립된 '문무왕릉비'비문 내용과도 일치하는데, 비문에 따르면, 경주 김씨인 문무왕은 화관-투후왕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금인을 만들어 제천의식을 지낸 투후의 후사가 7대를 이어가면서 신라 김씨의 성립과 연결되었다고 하였다. 문무왕릉비문에는 최초의 조상이 염제 신농씨라고 했으나 중간 조상은 김일제로 동일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위의 내용에서 보듯이 신라의 김씨들은 자신들이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의 조상인 김수로와 신라 김씨 혈통이 같다고 했다. 이는 김수로 역시 김일제의 후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수로가 가야 땅에 나타나기 전부터 김씨 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가락국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야가 성립된 서기 42년 이전에 동아시아에서 김씨 성을 가진 집단은 김일제 후손들뿐이었다.

 

신나라가 서기 23년에 멸망하였으니, 서기 42년 당시 동아시아에서 나라를 세울 만한 역량을 보유한 채 유랑할 만한 집단은 김일제의 후손들이 유력하다. 시간적으로 보나 지리적으로 보나 서기 42년의 김수로 집단과 연결할 만한 집단은 김일제의 후손들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가 가야를 세웠다고 판단하는 게 기록이나 정황으로 보아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 될 것이다.

 

신나라를 건국한 집단이 가야 땅에 수백 척의 배를 타고 철기무기로 무장한 채 무리를 지어 가야 땅에 도착했으니 토착세력들은 낯설고 가공할 만한 집단으로  비쳐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건국 초기에 토착세력들은 외래집단인 김수로 집단에게 일방적인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