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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90 : 가야의 역사 8 (건국, 철의 제국 가야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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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90 : 가야의 역사 8 (건국, 철의 제국 가야 3)

두바퀴인생 2011. 3. 23. 10:45

 

 

 

한국의 역사 190 : 가야의 역사 8 (건국, 철의 제국 가야 3)

 

 

 

석탈해 집단의 출현과 축출

석탈해의 출현

가락국기에 석탈해가 나타나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갑자기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임신을 하였는데,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알이 사람이 되었다. 이름을 탈해라고 했다. 바다로부터 왔는데, 신장이 3척이요, 머리 둘레가 12척이었다.'

 

석탈해가 완하국 출신으로 바다를 경유하여 왔다고 했다.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알을 낳아 석탈해가 태어낫고, 그가 고향을 떠나 한반도 가야 땅에 나타낫다는 것이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점 때문에 석탈해는 함달왕에 의해 쫓겨났다. 즉 부인이 외도로 석탈해를 낳았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탈해왕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의 나라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에는 '여국'이라 했고 삼국유사에는 '적녀국'이라 했다. 또 아버지의 나라는 가락국기에는 '완하국'이라 했으나 삼국사기에는 '디파나국', 삼국유사는 '용성국'이라 했다. 그러나 어느 이름이 정확한지는 알 수가 없다. 가장 나중에 저술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따라 '용성국'으로 보자.

 

석탈해가 태어난 나라가 1075~1084년 사이에 저술된 가락국기에는 위치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1145년에 저술된 삼국사기나 1281년에 저술된 삼국유사에서 똑같이 '왜국 동쪽 1천 리'라고 했다. 이는 석탈해에 대한 사실을 왜곡할 만한 이유가 없는 고려 사관들이 고증을 거쳐 삼국사기에 기록하였을 것이며 136년 뒤 나중에 저술된 삼국 유사의 일연도 그 표현을 그대로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석탈해의 출신지는 기록에서 용성이나 용왕 같은 표현들이며 해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으로 왜국 동쪽 1천 리에 있는 해양지역에서 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캄차가 반도의 난생 신화

석탈해의 출신지와 관련하여 역사인류학자 김화경씨는 석탈해의 출신지를 왜국 동쪽 1천 리를 북아시아 최동단에 있는 캄차카 반도 일대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물론 일본 열도와 캄차카 반도의 거리는 1천 리가 넘는다. 하지만 고대 역사기록에서 먼 거리를 말할 때는 막연하게 천이나 만 같은 숫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일본 열도 동쪽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김화경씨는 캄차카 반도에 사는 코라크족을 포함하여 북아시아 민족들 사이에서도 석탈해 신화와 유사한 난생 신화가 존재한다는 점을 제시했다. 그리고 고대로부터 유라시아 대륙 동북쪽의 해양이 활발히 이용되었고, 해류를 따라 문화를 전파하는 경로가 이곳에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 석탈해는 캄차카 반도 출신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탈해는 자신의 고향에 용왕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무리가 붉은 용의 호위를 받으면서 바다를 통해 가야로 왔다는 것은 이들이 용왕 숭배신앙을 가진 어로 집단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훗날 신라에 정착한 뒤 석탈해는 자기 자신을 대장장이의 후손이라 했다. 이를 근거로 석탈해 집단을 철기 기술자 집단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야를 거쳐 신라로 들어간 석탈해는 호공이라는 사람의 집을 빼앗을 목적으로 그 집 옆에 숫돌과 숯을 묻어놓고 그 집을 빼앗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서 삼국 유사에서는 이 행위를 '궤계', 즉 '위계'라고 기록했다는 점은 실제로 대장장이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도 논리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그런 논리로 순순히 집을 내 놓을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인가?  아마 호공이란 사람이 석탈해의 집단에 집을 양보해주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처지를 불쌍히 여겨 그에게 집을 내 주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중에 석탈해는 호공이란 사람을 통해 신라 조정에 등용되어 중용되며 그 지혜가 뛰어난 인물이라 나중에는 왕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김수로와 석탈해의 대결

가야 해안에 상륙한 석탈해 집단은 처음에는 가야에 있다가 김수로왕과의 담판에서 가야를 떠나 신라로 이동한다. 신생 가야 수도를 건설한 직후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가야에 출현한 석탈해는 김수로와의 대결에서 패한 뒤 신라로 넘어가 나중에는 그곳 왕이 되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가야에서는 짧게 신라에서는 자세하 다루고 있으나 가락국기에는 가야에서의 행적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석탈해가 들어간 궤가 해안에 도착하지 금관가야(본가야, 가락국) 사람들이 이를 이상히 여기기만 하고 데려가지 않았다고 햇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석탈해가 가야 해안에 도착하자 김수로가 백성들과 함께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었다고 했다. 또 가락국기에는 '기쁨 속에서 대궐로 가서' 김수로를 만났다고 했다.

 

어쨌던, 가야 해안에 도착한 석탈해 집단이 처음에는 가야 민관으로부터 상당히 후한 대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석탈해 집단이 단순히 동정을 구한 표류민 집단이 아니라 가야인들의 주목을 끈 선진적 해양 집단인데다가 신비감을 주는 이방인으로 비쳤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 집단은 배 한 두척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 최소한 수백 척 이상 대규모의 집단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김수로가 배 500척을 동원하여 석탈해 집단을 내쫓았다는 기록을 볼 때 이 집단이 전문적인 군사 조직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규모의 선박을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석탈해가 김수로에게 면전에서 왕위를 요구했고 대결을 제의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은 좀 과장된 느낌이 든다. 이방인이 나타나 이미 나라를 건국한 왕에게 왕위를 요구했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며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무력으로 정복한다면 모르겠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또 대결을 함에 있어 둔갑술로 서로 실력 대결을 겨루었다는 대목도 미화시키거나 꾸민 이야기로 판단된다. 아마 석탈해는 김수로에게 자신들을 받아줄 것을 요구했을 것이고 김수로는 석탈해 집단을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하에 거절하면서 무력 퇴출을 시도했을 법하다. 이에 김수로는 500척의 배를 동원하여 석탈해를 추방했으며 석탈해가 신라 경내로 들어가자 가야 수군은 할 수 없이 철수했다. 김수로가 석탈해를 추방한 시점은 가락국기를 기준으로 하면 가야 건국 3년(44년) 2월 이후부터 가야 건국 7년(48년) 7월 276일 이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석탈해 집단이 가야에 머문 것은 대략 3~4년이다.  그동안 석탈해는 자신들의 역량을 선보이면서 가야인들의 민심을 교란시키자 이에 대해 김수로가 대응에 나서기까지 걸린 시간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도시 건설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가야 해안에 도착한 석탈해 집단 때문에 잠시 위기를 겪은 김수로는 석탈해 집단을 신라 쪽으로 쫓아냄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가야 문명의 건설 초기에 이 문명에 동참하려고 한 석탈해 집단은 먼저 정착한 김수로 집단과의 경쟁에서 밀려 신라라는 새로운 개척지를 향해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판단된다.

 

 

석탈해가 만든 가야와 신라의 인연

삼국사기에 따르면, 가야에서 쫓겨난 석탈해는 신라 제1대 박혁거세 39년(기원전 19년)에 신라에 출현하여 제2대 남해차차웅 5년(8년)에 왕의 부마가 된 데 이어 같은 왕 7년(10년)에 사실상 정권을 장악하고, 제3대 유리이사금(재위 24~57년)의 낙점을 받아 57년에 제4대 신라 이사금으로 즉위했다. 여기서 삼국사기의 삭탈해 출현 년도와 삼국유사의 년도, 그리고 가락국기의 년도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기록의 부실로 확인이 불가하다.

 

석탈해가 가야의 이웃인 신라로 도주한 사실은 이후 가야와 신라의 관계를 환층 더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첯째, 신라와 가야를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가야에 배척당한 집단이 신라의 정권을 장악했으니 훗날 신라와 가야가 적대관계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가야는 신라와 끓임없이 다투다가 결국은 멸망하는 결과까지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김일제 후손들의 신라 진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김일제의 후손인 김알지를 받아준 사람은 석탈해였다. 석탈해로서는 원수를 은혜로 갚는 통 큰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셋째, 훗날 가야인들이 신라를 잠식하도록 만드는 데 기여했다. 석탈해와 가야의 인연은 석탈해와 김알지의 인연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인연은 가야 멸망 후에도 가야인들이 신라 정계의 일부를 차지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물론 신라인들이 가야의 철기문명을 활용하기 위해서 가야 엘리트들을 우대한 점도 있지만, 석탈해와 김알지의 인연이 신라와 가야의 관계 심화에 기여한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문노나 김유신 등은 그런 인연을 바탕으로 신라의 화랑도 그룹이나 정계에 우뚝 설 수 있었으며 김알지 후손들과 김수로 후손들이 혼인으로 결합하였고, 태종무열왕 이후부터 후반기 이전까지는 신라의 왕권까지 차지했다. 가야의 핏줄이 신라의 왕권까지 차지했으니, 석탈해는 자기 자신이 신라로 도주한 게 아니라 가야의 혼을 이끌고 신라로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