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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88 : 가야의 역사 6 (건국, 철의 제국 가야 1) 본문
한국의 역사 188 : 가야의 역사 6 (건국, 철의 제국 가야 1)
건국
한국 고대왕국들의 건국 형태
한국 고대왕국들의 건국에서 나타난 공통점은 외래세력과 토착세력의 결합을 통해 나라가 세워졌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건국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먼저 고조선의 단군 건국 신화에서 환웅 집단이 무주공산에 나라를 세운 게 아니라 토착세력과의 결합을 통해 나라를 세운 것이다. 북방 세력인 환웅 집단은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과 연합했다.
고구려의 경우 고주몽이 동부여의 금와왕의 장남인 대소의 위협을 피해 졸본천으로 달아나, 그곳의 토착세력과 정략결혼을 통해 현지에 정착하고 고구려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경우는 왕을 찿기로 결의한 6족장이 알천 언덕에 올라 흰말이 남긴 붉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는 건국 신화이다. 흰말은 북방 이주민족의 세력을 가르킨다. 이는 신라도 외래세력과 토착세력이 연합하여 나라를 세웠음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도 온조가 마한 왕의 배려로 땅을 할양받아 나라를 세우게 된다는 이야기다. 토착세력의 역활은 미미하지만 이주세력인 온조가 자력으로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와같이 한국 고대왕국들의 건국 과정에서 토착세력이 외래세력과 연대하여 나라를 세우거나, 토착세력이 와해되지 않고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북방 유목민족이 남하하여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나타난 이같은 현상은 요동과 한반도의 토착세력이 북방 외래세력에 의해 소멸되지 않고 여전히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토착세력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았으며 백제를 제외하고 토착세력이 외래세력이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가야도 마찬가지 외래세력인 김수로와 허왕후에 의해 토착세력이 결합하여 가야를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9간이 지배하던 사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시점인 고려 인종 23년(1145년)으로부터 60~70년 전,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한 시점인 고려 충렬왕 7년(1281년)으로부터 대략 200년 전인 1075년~1084에 고려 금관주 지사가 <가락국기>를 편찬했다. 가야 건국에 관한 한 이 책은 가장 상세하고 신뢰할 만한 기록이다. 현존하는 사료 중에서 가야시대와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가락국기의 편찬자가 대략적으로 밝혀진 것은 10세기 말이다. 고종 15년(1878년)에 왕명으로 수로왕릉의 침묘를 개축했는데, 개축 후 그곳을 숭선전으로 개칭한 뒤에 그곳에 '김해숭선전도비'라는 비문을 세웠는데, 그 비문에 가락국기의 편찬자 이름을 추론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금주는 오늘날 김해를 가르키며 금관주였다. 그려 문종시대에 김양감이라는 인물이 금관주 지사였고 그가 수로왕릉 사무를 처리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금관주 지사 김양감이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김해숭선전신도비'는 가락국기가 편찬한 때로부터 약 800년 뒤에 제작된 것이라서 그 내용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국왕의 명을 받아 비문을 썼다면 고증은 충분히 거쳤을 것이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가락국기 편찬자는 김양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락국기 전문은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에는 요약된 내용만 전한다.
건국 이전이 가야 땅 지배자들
가락국기의 서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개벽 이후로 이 땅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고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건국 이전의 가야 땅에는 나라라고 할 만한 정치집단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군신관계나 정치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고려 문종의 명령을 받아 제작한 '납릉비명'이다. 납릉이란 김수로의 무덤을 말하며 김양감이 그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김해숭선전신도비' 에 따르면, 고종 15년 당시에는 비석은 마멸되었지만 비문의 내용은 따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비문의 내용이 김해 김씨의 족보에 수록되어 있다.
'태초가 비로소 열리니 이안이 처음으로 밝아졌다. 인륜은 비록 생겼지만 군위(君位)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륜이 있었다는 것은 사회 질서가 존재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다른 선진 지역에 비해 뒤졌을 지는 몰라도 건국 이전에 가야에도 일정 수준의 사회 시스템 또는 정치 시스템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 땅에는 '100호 7만 5,000명'의 백성들이 9간, 즉 아홉 추장의 지배를 받았다고 했다. 역사 속에서 인구 숫자는 통상 여자와 남자 소년, 남자 노인을 제외했는데,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 당시 가야 지역의 인구는 그 배가 넘는 숫자로 볼 수 있다. 1호의 개념은 지금의 가족 단위가 아니라 특정 형태의 사회집단을 볼 수 있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그들 9간 중에서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아도간'이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가야 건국 당시 6가야의 왕이 될 여섯 알을 자기 집으로 데려간 사람은 아도간이었다.
9간 시대의 종말은 당연히 김수로의 등장 시점과 일치한다. 김수로의 등장 시점을 가락국기에서는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 즉 서기 42년이라고 했다.
그러면 9간 시대의 시작 시점은 언제일까? 고대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 관계로 가락국기에서는 "개벽 이후로"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문헌의 한계로 고고학적 발굴 성과 중 청동기 시대의 지표 중 하나인 고인돌(지석묘)를 자료로 대략적이나마 9간 시대의 시작 시점을 추정하는 수 밖에 없다.
현재 한반도에는 3만 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다. 그에 비해 유럽 전역에서 조사된 고인돌은 5만 5,000여 기에 불과하다. 중국의 경우는 요양 지방에서 316기만 발견되었고, 일본의 경우도 한반도와 가까운 구슈 지역에 500여 기만 발견되었다. 인도나 동남아 지역은 통털어 200여 기 미만에 불과하다. 이 정도면 한반도 특히 남부 지방에 얼마나 많은 고인돌이 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한반도가 '고인돌의 왕국'이라 불릴 만하다.
고인돌은 가야 영역인 경남에서도 많아 발견되었다. 고인돌은 철기시대의 군장의 무덤이 아니라 청동기시대 군장의 무덤이다. 김수로 등장 이전의 가야에 철기문화가 전혀 도입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본격적인 철기문명이 시작된 것은 김수로의 등장 이후부터였다. 따라서 9간 시대는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며, 9간 시대의 지배자들은 고인돌에 묻혔을 것이다.
고인돌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학설을 종합하여 볼 때 9간 시대는 대략적으로 기원전 6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최근의 학설에 따르면 기원전 11세기~10세기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9간이 한꺼번에 나타난 것은 아닐 것이며 사회 집단이 성장하면서 서서히 각 집단에서 집단을 대표하는 9간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토착세력의 위기
가야 땅의 정치 질서는 김수로 집단의 등장과 함께 9간 시대에서 6왕 체제로 바뀌었다. 외래세력의 등장과 함게 정치 질서가 순식간에 바뀌었다는 점, 9간 체제에서 9왕 체제로 바귄 것이 아니라 9간 체제에서 6왕 체제로 바뀌었다는 점은 강력한 김수로 집단의 등장으로 토착세력이 굴복하여 단순히 왕조 수립이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사회.경제 전분야에 혁명적인 변화가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면 왜 가야는 무력하게 외래집단에 굴복하여 그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 즉 철기문명의 확산과 그에 따른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가야의 위기가 닥쳐왔다는 것이다.
첯째, 철기문명의 확산 이래 가야 땅은 위기에 직면했다.
중동의 오리엔트 지역(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기원전 15세기 경에 개발된 제철 기술은 기원전 13세기경부터 힛타이트 제국이 등장하면서 주변국을 무너뜨리면서 정복하였는데, 그들은 철기 문명을 이용한 무기들(칼, 창, 전차)로 무장한 강력한 군대로 철기문명 제국으로 등장하였다. 이 제철 기술은 민족 이동 경로를 통해 세계 주요 지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철기문명은 기원전 9세기까지는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중국에는 춘추시대에 전파되었다.
세계적인 첨단 문명인 철기문명이 동진에 동진을 거듭하는 동안 가야 땅은 경제.사회.군사적 측면에서 오랫동안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철기문명이 가야 지역까지 전파된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고조선이라는 강대국이 중국과 한반도 교류에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철기문명이 확산되어 농기구는 물론이고 병장기까지 철기로 대체되는 가운데 가야 땅은 위와 같은 지리적.정치적 요인으로 오랫동안 세게 주류 문명과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하나는 철기문명의 확산이 민족대이동과 겹치면서 가야는 위기에 직면했다. 기원전 3세기 이후 유목국가와 농경국가의 대충돌을 계기로 동아시아 국제 질서가 거센 파도처럼 요동침에 따라 철기문명을 보유한 정치세력들이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단순히 소식이 아니라 외래세력의 말발굽 소리와 함께 북쪽으로부터 들려오니, 가야의 토착세력들은 공포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고조선이 한무제 시대에 멸망함에 따라 대륙풍이 별다른 제약없이 한반도로 불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가야의 토착세력은 북방 외래세력의 위협에 보다 직접적으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이와같이 김수로의 등장 이전에 기야 토착세력들은 철기문명의 남진이라는 문명사적 위기와 함께 그 철기문명을 보유한 정치세력의 남진이라는 민족대이동의 위기를 동시에 맞이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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