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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86 : 가야의 역사 4 (가야 역사 개관 3) 본문
한국의 역사 186 : 가야의 역사 4 (가야 역사 개관 3)
가야 사람들
가야의 패망후 가야인들은 신라사회에 편입하면서 성공과 좌절을 경험하며 정치와 군사, 문화에서 활약을 하였다.
금관가야의 왕족인 김씨 일족은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지만 경원시되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김구해(金仇亥)의 손자 김무력(金武力)은 관산성 전투에 참전하는 등 신라 장군으로 활약하였고 그 아들 김서현을 거쳐 김유신과 김흠순대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하면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맻는 등 두각을 나타내었다.
김유신은 사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증되어 신라왕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이후 그 후손들이 천문관을 하는 것과 같이 토착 진골로부터의 차별을 받고 6두품으로까지 떨어졌다.
가야의 김씨일족은 김해 김씨를 중심으로 한국의 주요성씨의 뿌리가 되었다. 대가야는 그 외손인 문노가 화랑으로 활약했지만 이후 4두품으로까지 전락해 그 후손이 분명치 않다.
단재 신채호선생의 본관인 고령신씨가 그 후손이다는 설이 있다. 고성 김씨의 선조는 고사포국 왕실의 후예라고 한다.
문화에서는 음악부분에서 신라로 망명한 우륵이 가야금을 전수시켜 그의 음악이 신라의 중요 궁중음악이 되었다.
6가야
가야를 완전히 병탄한 뒤 신라는 창녕 일대의 하주정(下州停:比子伐停)을 다라국이 있던 합천으로 옮겨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했고 통일후에는 강주와 삽량주를 설치했다.
신라말기에 전국에 군웅이 할거하자 옛 가야땅에도 토호들이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옛 가야의 소국들의 후예임을 자처했는데 뜻밖에도 이전 가야와 무관했거나 이전에 가야에는 속하지 않았던 고령군과 벽진군의 가야인 공동체까지 거주지역에서 새로운 가야 소국을 세워 일어섰다.
이 "후가야"는 이총언이나 왕봉규등의 두각을 드러낸 인물들도 있었음에도 중심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채 개별적으로 존재하다가 후백제와 고려에 흡수되어 고려 전기까지 자치세력으로 해당지역을 지배해 나갔다.
후삼국 통일 후인 940년 고려 태조는 통일한 영토의 행정체제를 제편하는 과정에 이 "후가야"세력을 위해 가야연맹의 금관가야를 제외하고 5가야의 명칭을 개정했는데 옛 안라국인 아라가야, 함창일대의 고령가야, 반파국이었던 대가야, 벽진군의 성산가야 또는 벽진가야(일명 비화가야), 옛 고사포국이었던 소가야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중에 고령가야와 성산가야는 지역상 원래의 가야소국들과는 무관하지만 가야유민 세력을 중심으로 가야의 후예임을 자처했고 그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더해 금관가야까지 가야연맹은 삼국유사등을 통해 6가야로 와전(訛傳)되어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재 가야라 하면 엉뚱하게도 이 6가야가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가야 소국의 변천
가야소국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6가야가 아닌 최소 10개 이상의 소국들의 집합체였다. 위지 동이전에 수록된 변한 소국의 수는 12국이다. 하지만 3세기에 금관가야에 반기를 들었던 포상팔국이 문자그대로 8개국이었고, 그중에 소위 6가야는 1개였음을 생각하면 훨씬 많은 나라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남은 최후의 가야소국은 대략 10국이다. 한편 우륵의 12곡의 10개 지명등의 일부 지명은 일본서기의 임나 4현(縣)이라는 표현에서 처럼 소국이었다기보다는 대가야의 직할영지든가 단순한 지명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가야의 문화
낙동강 유역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가야 문화가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에 속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한(漢)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고, 또한 인접 지방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의 문헌 《삼국지》〈위지〉 동이전의 구야한국(狗耶韓國)도 이곳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고유의 문물(文物)로 가야금도 이 나라에서 비롯되었으며 작곡가 우륵(于勒)도 가락국의 유민이다.
일본과의 관계
가야는 형성기에 일본 기타큐슈 지방의 왜와 관계가 가까웠다. 가야와 왜의 관계에 대해 일본의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아직도 논쟁을 계속하고있다. 일본서기에서는 가야(일본어로 미마나)가 왜의 속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기록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고 고고학적으로도 당시 가야는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다양한 마구와 판갑을 이용·활용한 조직적인 군대를 운용한 선진 군사문화를 이룬 반면 왜는 6세기 초까지 제련로를 만들지 못하였으며 무기도 단도와 얇은 양날창 등 초보적인 무기가 활용되어 조직적인 군대 운용의 흔적이 없는 시기였으므로 대부분의 학자는 이런 설을 부정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가야와 왜는 가까운 관계이나 지배관계는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다.
4세기 가야는 왜와 연합하여 함께 신라을 공격하는데 광개토대왕이 신라을 구원하였다. 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왜는 가야 연맹에 한부분이었거나 4세기 이전 가야에서 분리된 세력이라는 추정되기도 한다. 고대 일본의 건국 신화의 구조는 가야 신화와 동일하며 왜계 유물이 가야지방에서 많이 출토되었고 고대 일본 왕조의 배경인 구지후루봉이라는 지명이 김해의 구지봉과 흡사하여 가야와 왜는 매우 밀접한 세력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가야와 왜는 한반도 고대 종족 예족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예족은 고대 고구려 시대에는 한반도 중부에 위치해 있었지만 고구려의 팽창과 함께 한반도 남부와 일본으로 건너가 가야와 왜가 되었다고 한다. 예족의 예의 발음이 왜라는 발음의 단초였다는 견해도 있다.
임나
임나는 미마나(彌摩那), 밈나로도 불린다. 임나가야(任那伽倻)의 줄임말로 창원,또는 고령에 있었다는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의 이름에서 어원을 찾기도 한다. 가야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라고도 하고 다른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가야가 임나일 경우 이는 외국에서 지칭한 이름일 뿐 그 자신은 어디까지나 가야(伽倻)나 가라(加羅)라고 불렀다.
가야 외의 지역을 이르는 이름이라는 설에 대해서는 소위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설이 부분한데 한국쪽에서는 심지어 일본열도 어딘가로 비정하기까지하고 일본에서는 어떻게든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단을 지배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사실인양 인식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바 가야지역에서 이를 입증할 유적이 없는 참에 최근에 옛 침미다례(영산강 지역 일대)지역에서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비슷한 장구형무덤 등의 유적이 나오자 전남지역을 임나로 비정하며 일각에서 임나일본부가 사실인양 이야기하기도 한다.
실제로 심지어 당대에 침미다례지역에서 나온 인골의 유전자 조사결과 그 구조가 현대 일본인과 같다는 뜻밖의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했지만 고대 일본인과는 또 전혀 틀렸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한반도 지역이 고대에 문화, 인종적인 면에서 고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결과는 될 수 있어도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임을 증명할 증거는 될 수 없다.
임나가야 국왕
- 이리구모왕(爾利久牟왕)
- 용주왕(龍主王)
- 좌리왕(佐利王)
- 풍귀왕(豊貴王)
- 모유지왕(牟留知王)
대표적인 유물들
가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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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시대 | 변한 · 가야 · 포상팔국 |
6가야 | 본가야(금관가야) · 반파국(대가야) · 성산가야 · 안라국(아라가야) · 고령가야 · 고사포국(소가야) |
기타 소국및 관련지명 | 골포국 · 탁순국 · 다라국 · 사물국 · 칠포국 · 사이기국 · 걸손국 · 곤미 · 기문 · 섭라 |
우륵의 12곡 | 달이 · 사물 · 물혜 · 하가라도 · 하기물 · 상가라도 · 거열 · 사팔혜 · 이사 · 상기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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