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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87 : 가야의 역사 5 (시대별 역사) 본문
한국의 역사 187 : 가야의 역사 5 (시대별 역사)
가야시대
가야시대란
가야시대란 김해에 가야의 나라가 있었던 시대이다. 삼국시대라는 이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고대 한국에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야사가 소외되는 시대이름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바르고 빠짐 없는 한국 고대사의 복원을 위해서도 반드시 고쳐져야 할 시대이름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말하는 가야시대가 삼국시대를 대체할 수 있는 시대 구분의 이름은 아니다. 주체적 역사관으로 가야의 나라가 있었던 시대라는 뜻으로 가야시대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야시대는 가야의 여러 나라가 경상남도 일원에 기원 전 후부터 532년 김해 대가락(大駕洛)과 562년 고령 대가야(大加耶)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대개 600여 년 간의 역사를 말한다.
가락국(駕洛國)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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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의 가야에 대한 이름은 실로 다양하다. 가야인 자신의 기록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백제나 신라인에 의해 기록된 것이 후대의 역사서에 다르게 채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해의 가야인 스스로가 내세웠던 나라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삼국유사』에 채록된 「가락국기(駕洛國記)」는 『삼국사기』보다 일찍 편찬되어 김해의 가야사를 전하는 가장 오래된 문자기록이다. 「가락국기」는 가락국의 역사를 기록하겠다는 의식에서 편찬되었던 역사서였다.
<가락국기>가 김해의 가야를 가락국으로 칭했던 의미는 단편적 사실 속에서 여러 이름을 전하는 다른 역사서와 큰 차이가 있다. 수로왕(首露王)은 나라를 세우고 대가락(大駕洛)이라 하였다. 대가락은 가라(加羅)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자존의식을 잘 나타내는 뜻으로 김해의 가야인들이 주장하고 사용했던 이름이다. 『삼국사기』는 김해의 가야를 가라(加羅), 가라인(加羅人)으로도 표기하였다. ‘나라의 말씀’이 ‘나랏말씀’이듯이, ‘가라의 나라’는 ‘가락국’이었다. 가락국 마지막 왕의 증손인 김유신(金庾信)의 비문에도 수로왕 이전의 김해가 가락구촌(駕洛九村)으로 불려지고 있다.
김해의 가야는 가락국(駕洛國)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 금관가야(金官伽耶)는 수로왕도 몰랐던 이름이다. 금관(金官)이란 지명은 신라가 가락국을 통합하면서 생긴 이름이었다. 금관(金官)은 가락국의 철(金)을 관리(官)하겠다는 정복자 신라의 의지가 담긴 이름이지 금관(金冠)이 아니다. 고려시대의 행정구역명이 금관주(金官州)였다. 금관주에 있었던 가야라는 뜻으로 고려시대에 지어진 이름이 금관가야이다. 수로왕은 물론 가락국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었던 이름이었다. 김해의 가야국을 가리키는 올바른 이름은 금관가야가 아니라 가락국이라는 사실을 알아야겠다.
가락국의 사회발전단계
가락국의 사회발전단계를 시기구분, 문자기록, 고고자료와 같이 표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이 될 수 있다.
가락국의 성립
가락국의 성립
가락국의 성립은 가락국 건국신화의 중심인 구지가(龜旨歌)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김해지역의 고고자료가 고인돌(支石墓)에서 널무덤(木棺墓)·덧널무덤(木槨墓)으로, 청동기문화에서 철기문화로 교체되는 시기와 내용을 대입하여 복원할 수 있다. 「가락국기」가 전하는 구간사회의 통합과 가락국의 성립은 구간집단과 수로왕의 교체, 지도자(Leader)에서 통치자(Ruler)로의 변신, 부족연합에서 군장사회로의 전환으로 해석되고, 이러한 해석은 고인돌·독무덤(甕棺墓)·돌널무덤(石棺墓)의 청동기문화에서 널무덤(木棺墓)·덧널무덤(木槨墓)의 철기문화로 바뀌었던 사실과 일치하고 있다.
청동기문화에서 철기문화로의 교체는 가락국 성립의 전환점이었다. 이 단계의 가락국은 『삼국지』의 소국(小國)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성립기의 가락국은 변진 12개국 중 하나로, 전기가야의 여러 소국들과 비슷한 수준에 불과하였다. 『삼국지』에 ‘국읍(國邑)에 주수(主帥)가 있으나, 읍락(邑落)이 잡거해 잘 제어하지 못하였다' 는 것은 성립 후 얼마 동안의 내부통제력이 별로 강하지 못했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의 중심고분군인 양동리고분군과 대성동고분군이 3세기 경까지 서로 대등한 양상을 보이는 것이 이러한 상황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수로왕과 허왕후
가락국을 세운 분이 수로왕이고 수로왕과 짝이 되어 가락국을 완성시킨 사람이 허왕후이다. 가락국의 건국신화는 당시의 역사적 사실이 탄생 → 성인 → 혼인→ 장례라는 사람의 통과의례에 맞추어 탄강(수로왕의 등장) → 성인(탈해의 도전과 극복) → 혼인(허왕후집단과 결합) → 장례(죽음과 수로왕릉)로 기술되었다.
수로왕은 기원전 108년에 한(漢)에게 망한 고조선(衛滿朝鮮, 後朝鮮)의 유민이거나 연나라 망명객으로 아마도 바닷길을 통해 김해에 들어온 성숙한 철기문화인이었다. 선진의 철기를 가지고 당시 청동기문화의 구간사회를 통합하여 기원 후 42년에 가락국을 세웠던 것이다.
허왕후는 『삼국유사』에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49년에 왔다고 전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인도에서 아유타국-야요디야가 성립하는 것은 5세기가 되어야 하고, 더구나 지금까지 김해에서 많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헤아릴 수 없는 유물이 출토되고 있지만 인도의 물건은 단 한 점도 없다. 반면에 서북한 지역과 관련되는 유물은 아주 많아 수로왕의 출신을 증명해 주고 있다. 마침 「가락국기」는 허왕후가 가지고 온 물건들은 한(漢)의 사치스러운 여러 물건들(漢肆雜物)이라 전하고 있다. 그 이전은 알 수 없으나 허왕후의 직접적인 출발지는 중국 내륮지역을 출발하여 서북한 지역을 통해서 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수로왕이 가지고 있었던 철기문화를 내세워 가락국에서 행세하려 했던 탈해(脫解)는 배척되었지만, 수로왕 보다 새로운 선진문물을 가지고 온 허왕후는 수용되었던 것이었고 결혼의 신화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가락국의 성장
가야사의 전개
6가야 설은 고려 초의 전승이고, 실제로는 10여 개국 이상의 가야소국이 있었음
가야사라고 하면 보통 금관가야, 아라가야와 같은 이른바 ‘6가야’의 이름을 떠올린다. 그러면 가야는 6개의 작은 국가(小國)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소국들의 이름이 ‘무슨 가야’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6가야의 이름이 처음 실린 자료는 고려 말에 편찬된 <삼국유사> 5가야 조의 기록입니다. 이를 살펴보면, 실제로는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官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등의 일곱 가야의 이름이 나온다.
이런 이름들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가락국 수로왕 건국 신화에 덧붙여진 6란(六卵) 설화에 덧붙여진 것인데, 그 6가야의 개념은 신라 말 고려 초의 혼란기에 후고구려나 후백제와 같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가야' 형태의 국명은, 그들이 소국으로 존재할 당시의 국명이 아니라, 옛날에 가야연맹 중의 하나인 금관국(金官國), 아라국(阿羅國), 고동람국(古冬攬國), 성산국(星山國,) 비화국(非火國)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신라 말 고려 초의 명칭이다.
고려 초의 인식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나열된 7개의 가야소국 중에서 일부는 옛날에 실제로 가야연맹체 속에 들어 있던 소국이었는지 의심스럽다. 게다가 가야 토기의 출토 범위를 통해서 보면 가야연맹체를 이루는 소국의 수는 6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10개국이 넘는다.
금관가야
금관가야, 가락국, 금관국, 가야국, 구야국 등 가야의 국명 문제
김해 지방의 고대 국명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삼국유사』 '5가야 조'에 나오는 금관가야(金官加耶)이다. '금관가야'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신라에 반대하는 복고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이름으로서, '가야 연맹체 중에서의 금관국'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러면 국가 존속 당시의 김해 지방 국명은 무엇이었을까? 『삼국사기』 김유신 전에 의하면, 수로왕(首露王)이 가락(駕洛) 9촌에서 개국하여 가야(加耶)라 하고,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개국 당시의 국명은 가락 또는 가야였고, 금관은 멸망 당시의 국명일 가능성이 높다.
여러 사료에서 김해 지방 국명을 찾아보면, 가야(加耶, 伽耶, 伽倻), 가라(加羅), 금관(金官), 하가라도(下加羅都), 가락(駕洛), 남가야(南加耶), 임나가량(任那加良), 대가락(大駕洛), 남가라(南加羅), 수나라(須那羅), 소나라(素奈羅), 구야(狗邪), 임나가라(任那加羅), 임나(任那) 등이 있다.
그 중에서 구야, 가야, 가락, 임나가라 등은 4세기 이전 전기 가야시대(前期加耶時代)의 국명을 표시한 것이다. 금관, 수나라, 하가라도, 남가야 등은 5세기 이후 후기 가야시대(後期加耶時代)의 국명을 표시한 것이다.
사료의 원전으로 보아서는, 『삼국지』와 『삼국유사』가 전기의 국명을 나타내고, 『일본서기』가 후기의 국명을 나타내며, 『삼국사기』는 전기와 후기의 국명을 다양하게 나타내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가야국(加耶國)' 중에서 권1, 2의 나해이사금 17년(212) 조 이전 기사에 나오는 가야국만 김해의 가야국이며, 같은 책 권3, 4의 소지마립간 3년(481) 이후 기사에 나오는 가야국은 고령의 가야국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김해 지방의 소국만을 나타낼 때, 가능한 한 전기 가야 시대의 국명은 가락국으로 통일하고, 후기 가야 시대의 것은 금관국으로 통일하고자 한다.
전기 가야연맹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인 김해의 가락국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조'의 기록에 의하면, 3세기 당시에 한반도 남부지역에는 24개의 소국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12개의 소국을 변한(弁韓)이라 하고, 나머지 12개의 소국을 진한(辰韓)이라고 하였다. 김해의 구야국(=가락국)은 변한 12국 안에 들어 있으며, 그 변한 12국으로 이루어진 연맹체를 가야사에서는 ‘전기 가야연맹(前期加耶聯盟)’이라고 부른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서는 4세기 이전의 낙동강 유역에서 김해 가락국의 대표성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맹주국은 김해의 가락국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 자료들을 비교해 볼 때, 1~4세기 당시 가야지역의 문화 중심은 김해, 부산, 창원을 둘러싼 경남 해안지대였고, 그 중에서도 김해 지방의 출토 유물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인 우월성을 보이고 있다.
전기 가야 소국들은 상당한 통치 체제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비슷한 문화 기반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이 때 구야국과 같이 지리적으로 해상 교통에 유리하고 비교적 큰 소국이 대외적인 교섭의 대표 역할을 맡곤 하다가, 차츰 소국연맹체가 형성되었다.
가야연맹의 형성 시기는 2세기 후반 정도로 볼 수 있으며, 아무리 늦어도 3세기 전반을 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3~4세기에 변한 12국은 김해의 가락국(=가야국=구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변한 소국연맹체, 즉 전기 가야연맹을 이루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 당시 맹주국인 가락국의 위상은 길이 10미터가 넘는 대형 목곽묘들로 구성되어 있는 김해시 대성동 고분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기 가야연맹 해체는 한반도 전체와 일본의 고대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침
4세기에 가야연맹은 중국 남조, 백제, 왜를 연결하는 국제 교역망 속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신라와 경쟁하였다. 반면에 신라는 고구려에게 후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군사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다. 가야연맹의 대표 세력인 임나가라(김해시)는 대규모의 군대를 맞아 대항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이는 가야사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이것이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고대사에서 파생되는 영향은 매우 컸다.
첫째로, 전기 가야연맹이 해체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결과이다. 가야 소국들이 모두 망한 것은 아니지만, 성주, 창녕, 부산 등 낙동강 동쪽 지역의 소국들이 신라의 수중에 들어가고 낙동강 하구의 주요 세력들이 초토화되었다.
둘째로는 백제가 바다를 통하여 왜와 교역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5세기 들어 영산강 유역의 세력을 지원하면서 이를 통하여 왜와의 교역을 지속해 나갔다고 보인다. 신라는 가야와 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으나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에 한동안 시달리게 되었다.
셋째로는 가야연맹 내의 후진 지역이었던 경상 내륙 지방과 왜가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야의 문화 중심지였던 낙동강 하구의 주민들이 흩어져 경상 내륙 지방과 일본 열도 등으로 이주하면서, 제철 및 철기 제조 기술, 도질토기 제조기술 등이 전수되었다고 보인다. 혹자는 가락국의 지배 세력이 일본열도로 집단 이주한 것을 가야의 쇠퇴 원인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5세기에 가야의 선진 기술이 외부로 파급되어, 고령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이 형성되는 토대를 이루고, 일본 열도에 천황제 정권의 토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에서 천손이 하늘로부터 규슈(九州)의 ‘구시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 즉 구지봉(龜旨峰)에 하강한다는 내용은, 김해 세력의 파급과 관련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후기 가야연맹
고령 지방을 중심으로 새로이 복구된 후기 가야연맹
경상북도 고령 지방에는 본래 큰 세력이 없고 안정된 농업 생산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5세기에 들어 야로(冶爐) 철광을 개발하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고령 지방에 4세기 이전의 고분 유적이 거의 없다가 5세기 이후에 지산동 고분군과 같은 대형 고분군이 나타나는 것은 그를 반영한다.
그리하여 고령의 반파국(伴跛國)은 5세기 후반에 대가야(大加耶)를 칭하며 대두하여, 13개 소국을 거느린 맹주국이 되어 후기 가야연맹(後期加耶聯盟)을 형성시켰다.
대가야는 479년에 가라왕(加羅王) 하지(荷知)의 이름으로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 보내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칭호를 받기도 하고, 481년에는 신라를 공격하는 고구려의 군대를 백제와 함께 가서 막아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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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가야연맹은 540년대에 고령의 대가야국과 함안의 안라국을 중심으로 한 남북 이원체제로 분열되었다. 그러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가야연맹 전체의 독립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550년 경에 백제에게 반(半)복속되었다. 가야연맹은 554년에 백제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관산성 전투에 나섰다가 신라에게 대패하였으며, 562년에 신라 군대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가락국의 쇠퇴와 멸망
가락국의 쇠퇴
가락국은 칠포국(柒浦國, 칠원)·고사포국(古史浦國, 고성)·사물국(史勿國, 사천) 등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도전을 받게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 가락국이 가지고 있었던 해상교역권에 도전했던 포상팔국의 침입을 독자적으로 물리칠 수 없었다. 신라에 왕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6천 여 가락국 인민이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이 전쟁을 계기로 이전의 해상교역권은 위축되었을 것이다. 더욱이 313∼314년에 고구려가 낙랑·대방군을 축출하면서 가락국의 선진문물 공급원이 차단되었다. 이제 낙랑·대방군과 일본열도 사이의 중개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은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후 가야사의 중심이 북부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도 이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유사』가락국기의 표현대로 가야시대의 김해는 여뀌 잎같이 좁아서 농업으로 부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 시기가 되면 신라는 울주의 달천광산을 개발하게 되고 가락국의 철생산을 능가하게 되었다. 가락국은 더 이상 철의 왕국일 수도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가락국의 쇠퇴를 단 한번의 광개토왕의 남정(南征)에서 구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선진문물 공급의 차단과 철생산 능력의 역전과 같은 변화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중원고구려비>(448년)의 토내당주(土內幢主)와 『일본서기』웅략8년(464)의 전마(典馬)의 기술과 같이, 광개토왕의 남정 이후 고구려는 신라 영토 내에 군대를 주둔시키게 되었고,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신라는 울산을 통하여 장산국(獐山國, 장산 일대)·거칠산국(居柒山國, 황령산 서북∼동래)과 같은 가야계 소국을 병합하고 동래방면으로 진출하였다. 5세기 전반∼중엽이 되면 동래 복천동 고분군에서 신라색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이, 낙동강 이동지역은 이미 신라의 영향력 하에 편입되었다.
가락국은 낙동강을 경계로 고구려를 업은 신라와 대치하게 되면서 동요하게 되었고, 더 이상 가야사의 중심일 수도 없게 되었다. 고령·합천·함안·창녕지역 등과 달리, 김해지역에 마운드가 높은 무덤-고총(高塚)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4세기말부터 만들어지는 고총은 김해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미 가락국 왕권이 고총고분의 축조능력을 가지지 못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락국의 멸망
5세기 중엽까지 동래와 양산의 가야소국을 병합한 신라는 낙동강을 건너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475년에 웅진(熊津, 공주)으로 남하 한 백제도 『일본서기』현종3년(487)의 기록과 같이, 섬진강 수계를 따라 동진 또는 남진하면서 서부의 가야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백제는 6세기 초에 남원 등의 가야소국을 통합하고 529년에는 하동까지 남하하였고, 섬진강을 건너 아라국(安羅國, 함안)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직면한 가야제국은 독립유지를 위해 연대하기도 하고, 백제와 신라 사이의 외교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서 가락국의 움직임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6세기가 되면 가락국은 이미 신라의 영향에 들게 되는 것 같다. 529년에 아라국에서는 신라·백제·가야·왜의 사신들이 모여 임나부흥(任那復興)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에 임나란 남가라, 즉 가락국이었다. 『삼국사기』는 가락국의 멸망을 532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직 망하지도 않은 나라를 부흥시키겠다는 모순적 기술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3년 뒤 가락국의 구형왕(仇衡王, 仇亥王)이 신라에 투항하는 것은 최종 멸망의 형식을 갖춘 것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가락국은 대가야(大加耶)나 아라국(安羅國)과는 다르게, 자진 투항하였다.
신라는 무력과 회유의 수단을 병행하여 가야제국을 통합해 나갔다. 가락국의 왕족에게 진골의 신분을 주고 우대하였던 것은 회유책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 신라는 가락국의 구형왕에게 김해지역을 식읍(食邑)으로 인정해 줌으로써, 아직 통합되지 않은 가야제국에 자진 투항을 권유하는 본보기로 활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구형왕의 증손인 김유신이 복속국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신라 조정에서 최고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가락국 멸망원인
700년 이상 지속되었고 풍부한 고분 문화를 남긴 가야가 왜 멸망하였는가?
1970년대 이후로 경상남북도 지역에서 많은 가야 고분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풍부한 문화 유물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가야 문화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낙동강 유역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기원후 2세기 무렵에는 12개의 소국이 나타났고, 3-4세기에는 김해 가락국 중심의 전기 가야연맹이 번성하였으며, 5-6세기에는 고령 대가야국 중심의 후기 가야연맹이 이어졌다.
이처럼 700년 이상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신라와 대등하게 발전하던 가야가 어째서 멸망하였을까? 가야의 멸망 원인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가야 지역의 소국들은 농업 및 해운 입지조건이 서로 대등한 상태에 있어서, 소국 간에 비교적 고른 문화 축적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그 중의 어떤 하나의 나라가 결정적으로 탁월해지는 것을 서로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둘째로, 4세기의 국제정세 변동을 거치면서, 4세기 말에 고구려의 군대가 낙동강 유역까지 쳐내려왔는데, 이는 가야가 발전하는 맥을 한동안 끊어놓았다.
셋째로, 가야는 주변의 백제나 신라에 비하여, 기존의 맹주국이 주변 소국들을 일원적으로 영도해 나가는 중앙집권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늦었다. 그래서 대외관계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넷째로, 가야의 힘은 철 생산 능력의 우월성에 있었으나, 5세기 이후에는 왜국이 철광산 개발에 성공하고 백제가 왜와 직접 통교하기 시작하면서 왜에 대한 상대적 우월성이 약해졌습니다.
위에 말한 네 가지 요인은 상호 연관을 가지면서 가야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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