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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93 : 가야의 역사 11(철의 제국 가야 6) 본문
한국의 역사 193 : 가야의 역사 11 (철의 제국 가야 6)
가야 문명의 기초, 현해탄 제국으로 발전
가야 문명의 기초
가야라는 나라가 서기 42년에 세워졌지만 가야 문명의 기초가 놓인 것은 서기 48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토착세력과 김수로 집단과 허황옥 집단이 결합한 때가 바로 48년이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가야 땅에 터를 잡고 살아온 토착세력, 서기 42년에 유라시아 대륙 북방에서 이주해온 김수로 집단, 서기 48년에 유라시아 대륙의 남방에서 이주해온 허황옥 집단, 이렇게 세 집단에 의해 가야 문명의 기초가 놓인 것이다.
물론 세 외래세력 외에 석탈해 집단은 초기에 신라로 넘어갔지만, 석탈해 집단을 제외한 나머지 집단들의 연합만으로 가야 땅에서는 선진 문명이 생겨 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당시 가야라는 땅이 국제적으로 꽤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짧은 기간에 유라시아 대륙 각지에서 외래세력들이 경쟁적으로 밀려든 것을 보면 이곳이 어쩌면 '약속의 땅'은 아니었을까? 철 매장량이 풍부한데도 불구하고 아직 철기문명이 제대로 꽃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동단 중간에 위치곳으로 넓은 농토와 중국,왜,남방,북방을 두루 연결할 수 있는 점이 선진적인 외래세력들의 구미를 당겼을 것이다. 가야의 위치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매개한다는 점에서, 또 유라시아의 남북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탐낼 만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가야 드림' 같은 게 형성될 만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제반 조건을 갖추어졌기 때문에 가야 문명은 유라시아 최동단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상호 이질적인 동시에 상호 보충적인 세 세력이 만난 곳인데다 지리적으로도 대륙과 해양뿐만 아니라 남과 북이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이었기에 가야가 유라시아 대륙 최동단의 최고 문명국으로 성장할 수 잇었던 것이다.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가야사에서 유독 확실하고 명료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가야의 철기문명이다. 가야에서 고도의 철기문명이 발달했다는 것은 굳이 추정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입증할 수 있고 또 쉽게 수긍이 가능하다. 그에 관한 문헌과 자료가 충분할 뿐만 아니라, 정 궁금하면 가야 땅을 파기만 하면 금방 확인이 가능하다.
가야 땅에서 철정(덩어리쇠)와 철기제품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풍부하게 매장된 철을 이용하여 가야인들은 철제 농기구와 철제 무기 등을 제조했다. 가야인들은 일반 목재가 아닌 목탄을 사용하였고, 축력이나 수력을 통한 가풍 시설을 통해 1,250~1,270도의 화력을 만들어내는 한편, 이런 고온으로부터 노를 보호하기 위한 내화재로서 점토를 사용하는 등의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철기문명의 경제적인 효과는 엄청났다. 철제 농기구를 농사에 이용하게 됨에 따라 가야의 농업은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제철업과 더불어 가야 농업의 발전에 기여한 또 다른 요인으로는 기야의 지리적 조건을 들 수 있다. 가야 땅은 낙동강과 섬진강을 끼고 있어서 물 에너지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고, 한반도 내에서도 기후가 따뜻하고 강우량도 풍부한 지역에 속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특히 벼농사가 발달했다.
중국의 삼국지 동이전에도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쌀을 심기에 적합하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가야 땅은 농사에 적합하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제적으로 공인된 사실이었다. 오늘날의 김해평야는 그 시대에는 물에 잠겨 있었지만, 낙동강에서 섬진강 사이 마산, 창원, 함안, 진주,하동으로 이어지는 더넓은 평야는 가야의 우수한 농업환경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같은 농업환경은 1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 가야의 국제경쟁력을 더욱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그런 이유는 당시 동아시아의 기후변화에서 연유했다.
기원전 29년 이후부터 동아시아는 제2차 한랭기에 접어들어 기온이 이미 하강 국면으로 돌입하였다. 한랭기에 접어들면서 농업환경이 전체적으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런 기후환경의 악화와 함께 한반도나 중국의 농업환경도 연쇄적으로 악화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같은 상황에서는 가야처럼 우수한 농업환경을 보유한 나라의 발언권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농업의 발달로 토지 수확물이 많아지면서 이를 원료로 하는 수공업도 연쇄적으로 발달하게 된다. 가야도 마찬가지였다. 철이 많은 가야에서 제철업이 대표적인 수공업으로 성장했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제철업 외에도 견직업이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잔통적으로 견직업은 동아시아의 최대 수공업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가장 비중 있는 산업 중 하나였다. 견직업이 발달하자 비단으로 국제적인 위상도 높아졌다.
또 가야는 바다를 끼고 았어 수산업이 발달하였고 농업과 어업이 발달하면서 자연히 무역도 왕성하게 발달하게 되었다. 가야는 대륙과 해양의 접점에 있었을 뿐만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의 남북을 잇는 위치에 있어서 무역을 하기에도 적합했다. 이러한 입지 조건을 바탕으로 신라와 백제는 물론 중국, 일본과도 화발한 교역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가야는 철과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농업, 수공업, 어업, 무역 등에서 역량을 강화하면서 한반도는 물론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로까지 활동 범위를 벏혀나갔다. 가야는 '철의 왕국'이 아니라 '철의 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신라를 속국으로
신생 가야에 불쑥 나타나 한때 김수로를 위협했던 석탈해가 도주한 곳이 바로 신라였다. 신라는 석탈해를 내쫓기는커녕 그에게 터전을 마련해 주었고 나중에는 그에게 왕위까지 내주었다. 그래서 가야는 신라가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신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측의 대립에서 초기에 우위를 점한 쪽은 가야였다. 우위를 점했다는 표현은 어쩌면 지나치게 사안을 은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가야가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파사이사금이 재위한 지 23년째 되는 해인 서기 102년이었다. 이 시대에 신라에는 여러 소국들이 있었는데, 음즙벌국과 실질곡국도 중 하나였다. 학계에서는 음즙벌국은 오늘날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 실직곡국은 오늘날 강원도 삼척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두 소국은 서로 경계를 놓고 분쟁을 벌였다.
양국은 자기들 선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중앙의 신라에게 재판을 요청했다. 그런데 파사이사금이 두 소국의 눈치를 본 것인지 아니면 두 소국이 파사이사금의 말을 잘 따르지 않았던지는 알 수 없지만, 파사이사금은 어떤 판결도 내리지 못했다. "왕이 난처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파사이사금 입장에서는 어떻게던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문제를 방치하면 자신의 지도력에 흠집이 생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해당 소국들 뿐만 아니라 여타 소국들까지 동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파사이사금이 내린 판단은 '신라에는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신하들이 나름대로 해결방안을 제시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훌륭한 판결을 내리느냐가 아니라, 누가 판결을 내려야 당사자들이 승복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애매모호한 판결로 사태를 무마하기에는 당시 상황이 아주 심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난처해 하고 있던 파사이사금은 '산라에는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파사이사금은 재판관을 데려오기로 했다. 그 재판관은 다름 아닌 "금관국 왕인 김수로"였다. 가야연맹 맹주 김수로가 해결사로 초빙된 것이다.
가락국기의 '김수로 재위 158년' 이야기는 김수로의 실존 가능성을 의심케 하며 금관가야(42-532) 490년의 역사에서 국왕으로 기록된 인물은 고작 10명이다. 한 임금이 평균 49년씩 통치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금관국 김수로"는 초대 국왕 김수로가 아닌 제3의 임금일 것이다. 그래서 "금관국 김수로"라는 표현은 "가야연맹 맹주"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사용함이 타당하겠다. 왜냐하면 이때의 금관가야 국왕은 가야연맹 맹주의 자격으로 신라에 초빙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야연맹 맹주가 신라를 방문한 것을 친조로 해석할 수는 없으나 당시 약소국에 불과했던 신라와의 관계를 위해 외교적 굴욕을 감내하면서까지 가야연맹 맹주가 친조를 단행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야연맹 맹주의 신라 방문은 속국이 상국을 찿아가는 게 아니라 상국이 위협적으로 속국을 찿아가는 성격으로 볼 수밖에 없다.
가야연맹 맹주가 신라를 방문한 파사이사금 23년 이전의 몇 해 동안 가야와 신라 사이에는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파사이사금 15년(94) 2월에 신라 마두성이 가야군에게 포위되었다가 신라 중앙군의 출동으로 구출된 적이 있었고, 17년(96) 9월에는 신라 남쪽의 가성이 가야군의 공격으로 성주 장세가 살해되자 파사이사금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물리친 적이 있었으며, 18년 1월에는 신라가 가야를 침공하려다가 가야의 사죄를 받고 중지한 적이 있다. 이런 정황을 보면 가야와 신라가 이 시기에 대립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파사이사금 18년 1월까지 상호 대립하던 양국 관계는 23년 경에는 조금 이상하게 바뀌게 된다. 신라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야연맹 맹주가 신라를 직접 방문한 것이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전쟁을 하던 사이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파사이사금 18년 1월 이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리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파사이사금 21년 10월 서라벌에 지진이 나서 민가가 붕괴되고 사망자가 발생한 데 이어 22년 2월부터 경주에 월성을 축조하고 7월에 국왕이 그리로 이거한 사실은 연이은 자연재해로 신라 왕권이 동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소국들의 국경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파사이사금 23년 8월 이전에 신라에서는 국가적 불행이 연이어 발생했다. 메가톤급 자연재해가 신라를 잇달아 강타한 것이다. 그것도 신라 수도 서라벌에 천재지변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그런대 이런 일련의 사태는 단순히 자연재해로 끝나지 않고 정치적 문제로까지 연결되어 신라 정부의 권위까지 메마르게 하고 두둘기고 갈라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왕권이 무너지고 권위가 실추되었다. 그래서 가야연맹 맹주가 신라 내부 문제에 개입했다는 것은 일련의 자연재해로 신라 왕권이 추락한 틈을 타서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신라가 속국이 되지 않았다면 가야연맹 맹주가 신라에 가서 사법권을 행사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신라 국왕이 가야연맹 맹주를 초빙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신라 중심으로 기술되었음을 고려할 때 충분히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해결사로 등장한 가야연맹 맹주가 국경 문제를 멋지게 처리했다. 그는 독단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회의를 통해 의견을 구했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것은 그의 권위가 신라 국왕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신라 조정이나 소국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바탕으로 "쟁론 중인 땅을 음즙벌국에 소속시켰다"고 했다. 이 판결에 대해 아무 이의가 없었다는 것을 볼 때, 상국 가야의 권위가 신라인들에게 구속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판결이 난 후 연회를 베푼 자리에서 돌발적인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만족감에 도취된 가야연맹 맹주가 그만 오버를 해버린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국왕이 마련한 만찬에서 다른 부서들처럼 이찬(제2관등)을 내보내지 않고 하급 관리를 내보낸 한기부 책임자를 수하인 탐하리로 하여금 살해해버린 것이다.
신라 정부의 각료를 죽이고 살리는 일은 가야연맹 맹주가 아니라 신라 국왕이 결정할 사안이었다. 그런데 가야연맹 맹주는 독단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처형의 집행마저 신라 정부에 맡기지 않고 자기 수하로 하여금 직접 처리케 한 것이다.
신라 각료에 대한 처형을 명령한 순간에는 가야의 위상이 드높아졌을지 모르지만, 이 사건은 도리어 파사이사금의 리더쉽을 살려주는 계기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는 가야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면서, 파사이사금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분위기가 고조된 것으로 보인다. 파사이사금은 음즙벌국 왕에게 도망친 탐하리의 신병을 요청하였으나 음즙벌국 측에서 이를 거절하자 도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음즙벌국을 굴복시킨 사실을 보면, 파사이사금이 가야연맹 맹주의 실책을 이용하여 자신의 리더쉽을 회복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실직곡국과 압독국 같은 나라들도 스스로 항복해 왔다. 소국들의 국경 경계 문제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던 파사이사금에게 이 사건을 계기로 소국들을 제압하는 계기가 되었고 신라 왕권이 되살아났음을 볼 수 있다.
그로부터 4년이 경과한 파사이사금 27년(106년) 8월에 신라가 가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 신라는 이 무렵에 속국의 지위에서 탈피한 것으로 여겨진다. 파사이사금 21년 10월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사대관계가 성립되었다가 27년 8월 이전의 어느 시점에서 그 관계가 해소되었다면 가야는 최장 6년 정도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현해탄 제국으로의 발전
가야의 대외 팽창과 관련하여 가야가 일본에 야마대국이라는 분신을 건설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그 성격이나 위치에 대하여 일본에서 17세기부터 시작된 논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으며 그들이 임나일본부를 억지 주장하듯이 관련 문서나 기록이 부존하여 명확하게 증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야마대국은 2-3세기 일본의 규슈 혹은 긴키에 존재했다고 하는 30여 소국 연합체로서, 2세기 후반 이후 무녀가 다스린 나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야마대국이라고 하며 야마디이국, 야마이국, 야마일국, 야마태국, 야메다이국,야마타이국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바로 이 나라들이 동시대에 존재한 가야연맹의 분신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고대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점은 일본인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부여나 고구려 같은 북방 기마민족, 즉 유목민족이 한반도 남부를 거쳐 일본으로 진출하였다는 시각이 고고학적 연구 결과와 잘 부합된다는 언급이다. 한반도 사람들이 바다 건너 일본에 나라를 건설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의 국가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암시하는 신화들이 한국과 일본에 똑 같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나 일본 제45대 성무천황에게 바쳐진 '출운국 풍토기'에 실린 '국토 끌어당기기 신화' 등이다. 이러한 한.일 양국의 고대신화를 볼 때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에 나라를 세웠다는 주장이 역사적 사실에 매우 근접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처럼 가야는 철 무역을 바탕으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를 잇는 가교 역활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신라를 속국으로 만든 적이 있고, 나아가 가야.백제.왜국 동맹을 이끌고 고구려.신라에 대항한 적이 있을 정도로 가야가 동아시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끝인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정치.경제적으로 매개하는 역활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가야는 현해탄의 중심 국가라는 찬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제국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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