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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95 : 가야의 역사 13 (철의 제국 가야 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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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95 : 가야의 역사 13 (철의 제국 가야 8)

두바퀴인생 2011. 3. 28. 03:37

 

 

 

한국의 역사 195 : 가야의 역사 13 (철의 제국 가야 8)

 

가야를 평가한다.

 

가야의 500년 역사

철기문명과 그에 따른 민족대이동의 결과로 동아시아에서는 유목세력의 대표주자인 흉노 제국과 농경세력의 대표주자인 진나라와 한나라가 충돌했다. 이러한 민족대충돌은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격변으로 이어지면서 제1차 민족대이동을 촉발했다. 이 와중에 한나라에 흡수된 흉노족 일파는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흉노 왕자 김일제의 후예로 추정되는 왕망(김왕망)에 의해 신나라가 세워졌으며 , 한나라의 후예인 후한의 반격을 받게 되자 나라가 멸망당하면서 주요 집단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여 현지 토착세력과 연대해 가야를 건설했다. 신생 가야는 캄차카 반도 출신으로 추정되는 석탈해 집단을 배격하는 대신, 아유타국에서 보주를 거쳐 양자강을 따라 도래한 허황옥 집단과 힘을 합쳐 새로운 문명의 건설에 나섰다.

 

한반도의 토착세력, 흉노족 후예 출신의 김수로 집단, 남아시아 출신의 허황옥 집단이 이른바 유라시아적 융합을 이룬 가야연맹은 철기문명을 바탕으로 유라시아 대륙 최동단의 문명국으로 떠올랐다.

 

가야는 단순히 문명 차원에서만 제국이 아니라 국제정치적 차원에서 그런 수식어에 부족함이 없는 제국이었다. 가야는 꾸준히 신라를 압박한 끝에 한때는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기도 하였으며, 가야가 야마대국이라는 분신을 일본 규슈에 세웠는지는 아직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일본과 연합을 주도하면서 대륙의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가야는 백제와도 연합하여 신라를 압박하기도 하였으나 고구려군의 남하로 전기 가야연맹이 멸망하고 후기 가야연맹이 탄생하는 시련도 겪었다. 이렇게 하여 가야는 한반도 남단과 일본 서남부를 하나의 벨트로 하는 독자적인 세계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야의 운명을 위협하는 요인이 점차 잉태되고 있었는데, 가야 건국 이전이 기원전 29년부터 시작된 한랭기로 인해 동아시아에서는 목초지가 사라지자 북방의 유목민족들이 중국 변경을 침탈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같은 유목민족의 남하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함에 따라, 유목민족들이 북중국에서 5호 16국 시대를 열고 한족은 양자강 쪽으로 남하하여 밀려내려가는 양상이 나타났다. 동아시아 제2차 민족대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 틈을 타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 등은 도약의 발판을 갖춘 데 비해 가야는 연맹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중앙집권화를 기하지 못해 국력을 집중하지도 못하고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고구려의 가야 정벌로 전기 가야연맹에 사라지고 후기 가야연맹이 나타났으나 주변국의 침탈을 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새로운 흐름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된 가야의 운명은 5호 16국 시대에 뒤이은 남북조 시대에 결판이 났다. 중국의 분열이 남북조의 대립으로 나타남에 따라 서진의 길이 막힌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추구함에 따라 백제와 신라가 가야를 압박하였고, 가야는 결국 신라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현해탄 중심국가

가야는 최초이자 최후의 현해탄 중심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현해탄에 인접한 국가들 중에서 가야처럼 현해탄 양안의 자원을 통합적으로 동원한 제국은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첯째, 대륙과 일본 열도가 그처럼 순조롭게 연결된 시기는 가야시대밖에 없었다. 가야 멸망 이후 일본은 대륙과 연계를 고민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한반도가 일본을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교류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5세기 바닷길이 개척되기 전까지 일본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일본에서 왜구가 많아진 것은 한반도 및 대륙과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가야의 멸망이 한일 갈등의 출발점이었다. 가야 멸망 이후 일본 열도는 살아남기 위해서 대륙과의 교류를 희망하였지만, 한반도의 방해로 대부분 좌절되고 말았다.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의 교류를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13세기에는 세계 최강 몽골 제국과 함께 일본 침략을 시도했다. 이와 같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만성적인 대립관계로 악화된 데는 두 지역의 평화로운 매개자였던 가야의 멸망이 주요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가야와 일본의 관계가 가야 유민들에게 탈출구를 제공했다. 가야 멸망 후에 유민들이 일본 열도에서 새로운 보금 자리를 찿을 수 있었던 것은 가야가 현해탄 중심 국가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유라시아적 융합을 통해 형성된 가야 문명은 현해탄 중심 국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열도에 자신의 문화적 분신을 남길 수 있었다.

 

 

죽고나서 더 질긴 가야의 혼

가야는 무려 520여 년간 존속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가야라는 나라가 결코 쉽게 죽지 않고 끈끈하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기 562년에 신라에 의해 가야가 멸망하였다고 하지만,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점에서 볼 때 가야의 생명력은 그 후로도 단절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첯째, 망국 가야의 후손들은 점령국 신라에서 신속하게 기반을 잡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 왕권까지 장악했다.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대가야 멸망으로부터 17년밖에 되지 않는 579년에 모계 가야 혈통을 이어받은 '문노'가 제8세 풍월주에 취임한 것과 제10세 풍월주 '미'생 때에는 가야파가 화랑도 내에서 주요 파벌로 성장했다. 제17세 풍월주 '염장' 이후로는 화랑도의 주도권이 가야파에 넘어갔다. 한편 부계 가야 혈통을 이어받은 '김유신'은 612년에 제15세 풍월주에 취임했다. 이같은 가야파의 성장은 필사본 '화랑세기'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이렇게 가야 유민들이 신라에서 급성장 할 수 있었던 것은, 철기문명을 보유한 이들이 신라의 성장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춘추와 김유신의 결합은 김알지 이후 신라 땅에 정착한 김일제의 후손과 가야 멸망 이후 신라에 편입된 김일제의 후손과 결합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김유신 동생과 김춘추 사이에서 태어난 문무왕은 모계와 부계 모두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가야는 비록 멸망했지만 가야 세력은 신라라는 새로운 틀 안에서 계속해서 정치적 성장을 이어나갔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거쳐 대동강 유역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인과 가야인의 역량이 결집된 결과였다.

 

둘째, 신라 후대 해상왕 장보고는 가야의 명맥을 이어 받아 중국 대륙, 일본,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무역 거점을 청해진에 설치하여 무역 상단을 방해하고 신라인 노예 무역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신라 조정의 승인을 받아 1만 군사를 양성하여 해적을 소탕하여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는 노예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해적들에게 부모를 모두 잃고 노예로 팔려 다니면서 방황하다가 당나라로 가서 피나는 노력 끝에 당시 당나라는 이사도의 난으로 산동반도 일대가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편성한 무령군에 들어가서 많은 무공을 세워 무령군 소장까지 승진하였던 뛰어난 무장이며 탁월한 혜안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당나라에서 20년을 보낸 후 당나라 무령군 소장의 군복을 벗고 신라인 상단의 행수가 되어 신라로 돌아와서 조정의 승인을 받아 무역 거점인 청해진을 건설했다. 왕성한 무역 활동으로 벌어들인 많은 재원은 신라 조정의 밑바침이 되었고 당시 기울어져 가던 신라 조정은 장보고의 지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의 강력한 청해진 군대는 결국 평소 많은 도움을 받았던 전 시중 출신인 김우징의 반정에 동원되었고, 5천여 명의 장보고 군대는 10만 관군을 물리치고 무진주-달구벌을 거쳐 황도에 입성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신무왕(김우징)이 등극하게 된다. 그래서 장보고는 신무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무소불위의 권력과 군사력을 보유하는 집단이 되었다. 그러자 신라 조정의 귀족들은 장보고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장보고는 벼슬도 마다하고 반정 후 바로 군대를 이끌고 청해진으로 돌아와 오로지 무역업에만 전념하려 하였으나 신라 조정의 분열과 혼돈은 장보고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즉 신무왕이 즉위 6개월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어린 신무왕의 아들이 등극하였으나 조정은 귀족들의 전횡으로 혼란을 거듭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귀족 중 '김영'이란 자가 장보고를 제거하기 위해 장보고의 숙적이며 뛰어난 무장이었던 '염장'이란 자로 하여금 청해진으로 찿아가 장보고를 살해하도록 밀명을 내린다. 그래서 내려간 염장은 오랜 친구였던 장보고와 술을 한잔 하면서 독대하면서 염장이 장보고의 무혈 투쟁을 자제하도록 요청했지만 장보고는 단호한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염장은 숨겨온 비수(삼국사기에는 장보고옆에 있던 장검)로 단칼에 장보고를 살해해 버린다. 그러자 김영은 바로 대기하고 있던 군대로 하여금 청해진을 공격하여 장보고 군대를 제압하고  해체시켜 버린다. 이렇게 하여 가야를 이어 신라 후대 거상 이며 해상왕이었던 장보고란 인물이 아깝게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국가의 미래보다 권력 탐욕에 눈이 멀었던 신라 귀족들이 이런 행동이 망국의 씨앗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셋째, 오늘날 한반도의 대한민국이 경제적인 부흥을 이루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포항, 울산, 부산, 거제도, 광양, 여수, 목포, 군산, 평택, 인천 등 남서해안에 밀집한 많은 제철소와 선박 건조 조선소, 콘테이너항 등 물류 중계항들이 밀집하여 세계 10대 무역국으로 성장하였고 제철과 조선업도 세계적인 신화를 이룬 것은 바로 가야인들이 삶의 목표로 하였던 현해탄 중심국가의 이상을 실현하는 결과가 되었다는 점이다. 한반도는 해양과 대륙을 잇는 중간지역이다. 또 기후가 온난하고 강우량도 적절하며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는 풍부한 곡물 생산과 더불어 살기좋은 땅으로 중국, 동남아, 일본 등 해외로 연결되는 해상 교통로의 중간 지역으로서 물류거점으로 성장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는 가야가 꿈꾸었고, 그리고 장보고가 그리던 이상을 실현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가야의 혼은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오늘날 이룬 위업이 바로 가야 혼이며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미래는 한반도는 안에서 안주하면 망하고 해외로 진출하면 반드시 흥한다는 것을 가야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가슴깊이 새겨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넷째, 오늘날 한국인의 10분지 1은 김수로의 후손인 김해 김씨다. 이미 1500년 전에 왕통이 끊긴 김수로의 후손들이 한국의 최대 혈통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김해 김씨는 본관을 분리하지도 않고 단일 성씨로 내려오고 있다.  물론 조선 후기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김해 김씨의 족보에 편입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김해 김씨들이 대한민국 인구의 10%를 차지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유라시아적 융합에서 상징되는 가야의 다양성과 포용력이 반영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김수로를 시조로 하는 족보가 국민 상당수의 집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은 김수로의 가야 생명력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가야는 비록 1500년 전에 멸망했지만, 가야 혼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 철의 제국 가야는 살았을 때 못지 않게 죽고 나서도 더욱 강하고 질긴 혼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