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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7 : 발해의 역사 10 (제3대 문왕 대흠무 2) 본문
한국의 역사 207 : 발해의 역사 10 (제3대 문왕 대흠무 2)
제3대 문왕 대흠무 2
왕권의식의 고양과 대일외교 갈등
발해는 727년 외교적 고립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때 발해가 보낸 국서에는 '무예가 아룁니다'로 시작하여 일본 군주를 대왕으로 호칭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은 고구려 때와 같은 우호관계를 회복하자는 취지에서 답서를 보냈다. 서두는 '천황이 삼가 발해 군왕에게 안부를 묻는다'는 식으로 시작하듯이 발해에 대해 우위를 드러내었다. 당시 일본은 율령제 수립과 함께 천황제 국가를 표방하였다. 그들은 신라와 발해를 자신들에게 조공해 오는 번국으로 생각하였다.
739년 발해는 문왕의 즉위를 알리면서 우호관계의 유지를 천명한 두 번째 국서를 보냈다. 여기서는 이전과 달리 천황으로 표현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발해의 첯 국서를 '왕서'라고 한 데 반해 이번에는 '왕계'라고 하였다. 대왕에서 천황으로 정식 명칭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며 외교의례상 낮은 자세를 취하면서도 실제로는 대등한 관계를 견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753년 발해의 세 번째 사신이 귀국할 때 보낸 국서에서 불만을 표출하였다. 일본은 <고려구기>를 인용하여 과거에는 형제.군신 관계를 내세우며 원병을 청하고 진하사를 보냈는데, 지금은 신하의 이름을 칭한 표문을 올리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던 것이었다. 세 번째 발해 국서에 '무예가 아룁니다', '흠무가 아룁니다'라고 하지 않고 '발해왕은 말한다'라고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발해는 759년 일본의 불만을 고려하여 '고려국왕 대흠무'로 시작하는 국서를 보냈다. 이후 발해가 국왕 명의의 표문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일본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유는 759년-762년 사이에 일본은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이른바 '신라정토계획'을 추진하였는데, 발해의 협조 내지 지원이 절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762년 문왕이 발해국왕으로 승진 책봉되었듯이 발해는 대당관계가 안정됨에 따라 당과 연결된 신라를 공격하자는 일본측의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일본의 신라정토계획은 무산되었다.
발해는 거부 의사를 밝힌 후 10년이 지난 후에야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발해 국서가 '전례에 어긋나고 무례하다'며 질책하고 선물도 돌려보냈다. 일본의 강경한 자세에 발해 사신은 문제가 되는 부분을 수정하고 왕을 대신하여 사죄까지 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앞으로 발해 사신은 입국 경로를 '구례'의 예를 통해 '축자도'로 경유하라는 조치를 취하였다.
발해 사신은 그때까지 출우, 월후, 월전, 능동 등 대부분 일본 열도의 북륙지방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구례'는 발해 이전의 고구려를 가리킨다. 이때 고구려는 고구려 패망 후 신라 땅에 거주하던 안승의 고구려 부흥세력을 가리킨다. 이렇게 지시한 배경은 축자국에는 교섭을 담당하는 대재부가 위치하고 있어 앞으로 이곳을 경유하도록 한 것이었다. 다시말해 발해를 조공국으로 취급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8세기에 일본은 천황제 국가를 표방하면서 신라와 발해를 조공국으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발해의 문왕은 즉위 이후 대당관계가 원만해짐에 따라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추진하였다. 결국 발해 국서를 둘러싼 양국의 외교적 갈등은 대내적으로 자배체제의 성립에 따라 고양된 왕권의식을 그대로 외국에 적용시킨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바다 건너 한 가운데 있으면서 대륙 국가에 일일이 시비를 걸며 천황국임을 자처하였고 조공국으로 인식하려 하였던 것이다.
지방세력의 편제
문왕 초반에는 대외적으로 주변 말갈제부로 영역 확장과 함께 대내적으로 당례와 율령의 수용을 통한 체제 정비가 추진되었다. 그리고 756년 상경 천도 이후 제도적 정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래서 문왕은 지방체제의 정비도 아울러 추진하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발해가 698년에 건국되었고, 피지배층인 말갈과 구별되는 토인(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을 가리키고 있으며, 발해의 지방통치가 도독.자사 휘하에 수령이라는 현지의 유력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도독과 자사는 대소로 구별되고, 도독.자사와 수령은 상하로 구분되어 있으며 도독과 자사는 통속 관계가 아니라 촌락 규모의 차이 즉 세력의 크기에 따라 구별되었던 것이다.
당과 국교 수립부터 문왕 초반(741)까지 당에 파견된 발해 사신은 왕족과 신하, 그리고 수령이었다. 이 가운데 수령은 당으로부터 제수받은 관직을 보면 왕족 및 신하와 구별된다. 왕족과 신하는 대부분 대장군이나 장군을 제수받은 데 반해 수령은 그 하급 직책인 '절충'이나 '과의'를 제수받았다. 왕족과 신하는 발해 왕이 파견한 주체로 기록되어 있으나, 수령은 파견 주체 없이 그냥 내조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왕족과 신하와 수령이 당으로부터 제수받은 관직이 구별된 점은 파견 주체가 다른 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수령은 중앙의 지배층이며 도독.자사 휘하의 수령과는 격이 다른 존재로, 오히려 도독.자사에 비견되는 인물들이었다고 판단된다. 즉 도독.자사가 토인이며 지배층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말갈제부는 수십 개의 하위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역확장 과정에서 중앙의 지배층으로 편입된 지방의 유력자가 문왕대의 체제정비 과정에서 세력의 크기에 따라 도독이나 자사에 임묭되자, 그 휘하의 유력자가 새로이 수령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문왕의 둘째딸 정혜공주와 넷째딸인 정효공주의 묘지명을 보면, 정해공주의 무덤은 발해의 첯 수도였던 동모산 부근에 위치한 '육정산'에서 발견되었고, 반면 정효공주의 무덤은 그 다음 수도였던 현주 즉 중경으로 비정되는 '길림성 용두산'에서 발견되었다. 두 공주 모두 남편이 먼저 죽어 나중에 남편의 무덤에 추가로 묻혔다.
따라서 정혜공주는 건국의 발상지에 묻혔다는 것은 그 남편이 건국집단에 속하는 핵심 지배층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정효공주는 중경에 위치하여 있다. 이곳에는 중앙과 결부가 강한 인물을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아 왕의 부마가 파견되었고 정효공주도 남편의 부임지에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발해는 732년 현주로 천도하였고, 756년 상경, 그리고 785년에는 다시 동경으로 천도하엿다. 발해 전반기에 이처럼 빈번하게 천도한 것은 그만큼 지방에 대한 지배력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국가의 수도가 되려면 그 지역의 유력자들이 복속되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이들 지방세력이 중앙에 편입되어야 지방의 거점으로 기능할 때 다른 곳으로 천도할 수 있다. 792년 36세의 나이로 사망한 정효공주는 756년 상경으로 천도한 후 태어나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문왕은 비록 상경으로 천도하였지만 현주 출신으로 중앙 지배층에 편입된 세력에게 정효공주를 시집보냄으로써 이 지역의 지속적인 지배를 도모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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