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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08 : 발해의 역사 11 (제3대 문왕 대흠무 3) 본문
한국의 역사 208 : 발해의 역사 11 (제3대 문왕 대흠무 3)
내분기의 왕위계승
체제정비 과정의 갈등과 동경 천도
문왕대에 체제가 정비되며 주변의 말갈제부로 확대된 영역에 대해서는 중요 거점의 지방세력이 중앙의 지배층에 편입되어 국왕의 이름으로 도독과 자사가 파견되는 형태를 띠었다.
그러나 지방세력의 기층 단위인 촌락까지는 아직 중앙의 직접지배가 곤란하였으므로, 지방세력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이를 매개로 지방지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지방세력이 수령으로 표현되는 존재인데, 이들은 전통적인 지배질서를 그대로 인정받고, 지방통치제도의 정비에 따라 점차 부-주-현 등의 관리가 되면서 지배세력으로 편입되어 갔다.
그런데 문제는 지방통치에서 지방세력을 어떻게 중앙의 지배로부터 이탈되지 않도록 통제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발해는 이와 관련하여 일본과 교류에서 군사적 성격에서 탈피하여 경제적 교류로 변하고 사신단의 규모가 대규모로 변한 점이다. 발해가 일본과ㅡ교섭을 시작한 727년부터 759년까지 다섯 처례 파견된 사신은 주로 무관들이었으나 문왕이 발해국왕으로 승진 책봉된 726년부터 주로 문관들이 파견되었다. 파견된 규모는 무관들은 23-24명이었으나 문관들이 파견된 시기에는 23, 40, 65,187,325명이었으며, 779년에는 최대 359명까지 파견되었다.
사신단이 대규모로 파견된 것은 말갈제부의 정치적 통합 과정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중앙의 발해왕권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일종의 교역단을 조직하여 국가적 사절의 일원으로 대외통교에 항상적으로 참여시켰으며, 이 시기의 대일 외교는 말갈제부를 지배체제에 통합하려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방통치가 강화될 수록 기존의 지방 토착 세력들의 반발도 나타났다. 일본에 파견된 철리말갈인이 중앙의 파견관에게 대들면서 갈등이 나타난 점이 있었다. 이처럼 대외관계에서 지방세력의 독자성이 드러나는 것은 한편으로 지배통합 전략의 한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발해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지방통치방식을 놓고 어떤 식으로든지 논란이 발생하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후 발해의 지방 지방지배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보여 주는 사료는 없다. 다만 문왕 말기 785년 무렵에 동경으로 천도한 사실이 주목된다. 동경 용원부는 발해 5도 가운데 일본으로 통하는 길이자 동시에 신라 방면으로의 중요 경유지라는 점에서 대외교류의 요충지였다. 또한 영역 확장 의미에서 볼 때, 동경 천도는 솔빈 지방으로의 진출을 의도하여 행해진 것이었다. 특히 이 지역의 특산물인 '솔빈의 말'은 당의 평로치정절도사 이정기(733-781)와의 교역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정기는 고구려 후예로 절도사에 올라 나중에는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에 충격을 준 인물이었다. 그 당시 신라인 장보고가 토벌군인 당나라 무령군에 입대하여 이정기의 군대를 토벌하여 무령군 소장 직위까지 올랐던 것이다. 따라서 대외교류의 요충지인 동경으로의 천도는 중앙에서 대외교통망을 장악함으로써 지방세력의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발해는 전기에 구국(698)-현주(732년 전후)-상경(756년 무렵)-동경(786년 무렵) 순으로 세 차례 천도를 단행하였는데, 각각의 도읍 기간이 30년이라는 점은 천도가 의도적으로 행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런데 상경 도읍기에 당례와 율령의 수용을 통한 체제정비를 추진하였으면서도 결국 동경으로 천도한 것은 지방통치에 있었서 지배체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수도가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천도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문왕 사후 1년 남짓 재위한 대원의를 거쳐 즉위한 성왕은 곧바로 상경으로 환도하였다. 이 점은 문왕 말기에 동경 천도를 둘러싸고 상경을 고수하려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경 천도를 둘러싸고 지배세력간에 갈등과 대립이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동경으로 천도한 이후 연호가 보력에서 대흥으로 복구되었음이 확인되었는데, 양자는 서로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왕은 처음 대흥 연호를 사용하였다가 상경으로 천도한 후 774년(대흥 38)에 보력으로 개원하였다. 그 의도는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체제를 강화 내지 완성하려는 것이었다. 연호가 통치방침의 상징적 표현이라면 대흥으로 연호 복구는 통치방침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도는 통치방침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따라서 문왕은 동경으로 천도하며 연호도 대흥으로 복구하였던 것이다. 특히 연호 복구에 대해서는 종래 왕권 강화의 표현으로 보았지만, 통치방침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상경 천도 이후 추진된 체제정비에 대한 지배층 내부의 반발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문왕대의 체제정비는 왕권 강화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왕권 강화는 필연적으로 지배층의 기득권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건국 초기에 해당하는 고왕.무왕대에 발해의 지배층은 건국집단이 중심을 이루었을 것이므로 왕권 자체는 그다지 강력했다고 할 수 없다. 무왕대에 외교노선을 놓고 친당파와 반당파가 분열된 것은 왕위 계승 문제까지 내포하고 있었으므로, 무왕으로 대표되는 반당파에 의한 친당파의 숙청은 다른 한편으로 왕권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반당파 또한 기본적으로 건국집단 출신이므로 왕권 강화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왕 후반에 정국을 주도한 반당파 계열의 건국집단은 문왕대에도 지배층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문왕 초반까지의 영역 확장은 이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영역 확장이 일단락된 이후에는 당례와 율령의 수용을 통한 체제정비가 추진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왕권 강화와 맞물리며 지배층의 기득권을 축소하게 될 때, 이들은 미온적일 뿐더러 불만을 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체제정비와 왕권 강화를 수행한 것은 어떤 세력이었을까?
이 점에서 문왕 즉위와 함께 친당파가 사면된 점이 주목된다. 당례와 율령을 비롯한 당의 문물제도를 수용하는 데, 이들이 주도적이었을 것이다. 문왕대에는 대당관계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무왕대와 같이 외교노선상 친당과 반당의 격렬한 대립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왕 때 숙청되었던 세력이 다시 등장하여 왕권 강화를 수반하는 체제정비를 주도해 나감에 따라 향후 지배세력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762년 당으로부터 승진.책봉을 받게 됨에 따라 왕권 강화는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다시 보력으로의 개원을 통해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왕권 강화를 수반하는 체제정비는 지방세력의 통제에 한계를 드러내면서, 이를 계기로 건국집단 출신의 기득권 세력이 반발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문왕 말기에 정국을 주도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 동경 천도와 대흥으로의 연호 복구였다.
그러나 문왕대에 추진된 체제정비는 이미 거스럴 수 없는 추세였다. 동경 도읍기에 주목되는 것은 방리제에 입각한 도성제가 계획되었던 점이다. 이는 문왕대의 체제정비를 주도한 세력에 의해 시도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새로운 도성의 건설 계획은 양자간의 정치적 대립의 격화를 의미한다. 이는 문왕의 사망을 계기로 권력투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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