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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12 : 발해의 역사 15(제7~10대 정왕,희왕,간왕,선왕 대인수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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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12 : 발해의 역사 15(제7~10대 정왕,희왕,간왕,선왕 대인수1)

두바퀴인생 2011. 4. 14. 03:41

 

 

 

한국의 역사 210 : 발해의 역사 15 (제7~10대 정왕,희왕,간왕,선왕 대인수1)

 

 

 

제7~10대 정왕,희왕,간왕,선왕 대인수

 

제 7대 정왕(定王, ? ~812년, 재위:809년~812년)은 발해의 제7대 이다. 이름은 대원유(大元瑜)이고 강왕의 아들이다. 연호는 영덕(永德)을 사용하였다.

 

강왕이 죽자, 그 아들 대원유가 즉위 해, 영덕으로 개원했다. 당나라는 중궁(中宮) 원문성(元文成)을 파견해 선왕을 조문함과 동시에, 대원유를 발해국왕에 책봉 하였다.

 

정책면에서는 문왕 대흠무 이래의 정책을 계승해, 당이나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즉위 후 불과 3년만에 병사해 버린다.

 

가족관계

참고

 

제 8대 희왕(僖王, ?~817년, 재위:812년~817년)은 발해의 제8대 이다. 이름은 대언의(大言義)이다. 발해 제6대 왕 강왕의 아들이며 정왕의 동생이다. 연호는 주작(朱雀)을 사용하였다.

 

정왕이 병으로 죽자, 그 남동생인 대언의가 국무를 담당해, 당나라에 사자를 파견해 선왕의 죽음을 알렸다. 그 후 즉위 한 희왕은 연호를 주작으로 정하고, 다음 해 당나라의 내시인 이중민(李重旻)이 와서 그를 발해 국왕에 봉해주었다.

 

재위 5년 동안, 당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냈다. 또 이 시대의 교류의 특징으로서는 불교의 융성이 있다. 813년에는 고예진(高礼進)등 37명을 당에 입조시켜, 발해의 금은의 불상 각 1체를 헌상 하였다. 이것은 왕실의 불교에의 귀의했다는 방증이며, 사실 발해의 유적에서는 대량의 동, 도제의 불상이 출토되었다.

 

또 일본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사신 파견을 실시해, 경제적인 면 이외에도 문화 교류도 활발히 행해졌다. 발해사정사(渤海史正使)의 왕효렴(王孝廉)등의 한시 등은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에 수록되어 현재에 전해지고 있다.

 

가족관계

참고

 

제 9대 간왕(簡王, ?~818년, 재위: 817년~818년)은 발해의 제9대 이다. 이름은 대명충(大明忠)이다. 발해 제6대 왕 강왕의 아들이며 정왕희왕의 동생이다. 연호는 태시(太始)를 사용하였다. 그의 부인은 순목황후(順穆皇后) 태씨로 룽터우산 고분군 M3 묘지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희왕이 병사하자, 그 남동생인 대명충이 즉위 해 연호는 태시로 개원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병사해, 대조영 왕계는 여기에 단절하게 되었다. 왕위는 대조영의 남동생 대야발의 자손인 대인수에 의해서 계승되게 되었다.

 

가족관계

  • 아버지 : 강왕
  • 부인 : 순목황후 태씨(順穆皇后 泰氏)
  • 형제

참고

 

제 10대 선왕(宣王, ?~830년, 재위: 818년~830년)은 발해의 제10대 이며 는 대인수(大仁秀)이다.

 

선왕은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현손(玄孫)이며, 연호는 건흥(建興)이라 하였다.

 

선왕은 발해의 영토를 크케 확장시켰는데, 이때 발해의 영토는 남으로 신라와 접하고, 서로는 소고구려를 합병하여 요동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고구려부여 등의 옛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또한 북쪽의 흑수말갈 등 발해에 대항하던 말갈의 부족들도 복속시켰다.

 

선왕은 발해 중흥의 대업을 이룬 중흥군주(中興君主)로서 이때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당과 밀접한 외교를 하여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여 행정구역을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개편하고 학술을 진흥시키는 등 발해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가족관계

참고

 

 

 

 

 

선왕 즉위와 영역 확장

 

문왕 사후 1년 사이에 폐왕과 성왕 그리고 강왕이 연달아 즉위하고 상경으로 환도하는 등 발해는 정치적 격변기에 빠져들었다. 강왕은 15년간 재위하며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였지만, 그가 죽고 나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파행성이 다시 드러났다. 

 

구당서에 의하면 강왕이 죽고 나서 아들 정왕이 즉위하였다가 뒤이어 희왕, 간왕으로 형제간의 왕위 계승을 거쳐, 결국 왕계를 달리하는 선왕이 즉위하는 과정을 간략하게 전하고 있다. 여기서 각 왕의 재위 기간을 살펴보면, 먼저 정왕은 당이 809년 정월 중관 원문정을 파견하여 책봉하였으므로, 그는 808년 후반 즉위하였다. 마찬가지로 정왕의 아우인 희왕 대언의가 812년 후반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당은 813년 정월 내시 이중민을 파견하여 그를 책봉하였다. 그리고 간왕 대명충의 부고와 선왕 대인수의 즉위는 818년 초반 당에 전해졌으며, 간왕은 즉위 1년 만에 사망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강왕 사후 정왕, 희왕, 간왕의 재위기간은 각각 808년 후반~812년 후반, 812년 후반~ 817년 초반, 817년 초반~ 818년 초반이 된다.

 

이처럼 강왕 사후 10년간 왕위는 정왕, 희왕, 간왕순으로 형제 계승이 이루어졌으며, 재위기간은 정왕과 희왕이 각각 4.5년간이며, 간왕의 경우 1년 남짓으로 몹시 짧았다. 이 세 왕들은 실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고 형제간에 왕위가 계승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문왕의 족손 대화여가 어렸

기 때문에 폐왕 대원의가 즉위 할 수 있었다면, 성왕과 같은 항렬의 강왕도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왕은 10세 전후에 즉위하여 25세 전후에 사망하였으며, 이로 미루어볼 때 그 아들들인 정왕.희왕.간왕 등도 10~15세 무렵에 재위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모두 단명하고, 간왕 사후 왕위는 왕계를 달리하는 선왕 대인수에게 전해졌다는 점에서 순조롭게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체적인 사정을 알 수 없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문왕 사후 이래로 국인 세력과 대원의 지지세력간의 권력투쟁은 왕위계승에 결격 사유가 없는 직계의 왕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은 대외관계에서도 파장을 일으켰다. 정왕은 809년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나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듬해 4월 귀국한 발해 사신 일행 중 수령 고다불이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구체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이는 발해 내부의 정국 불안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815년 흑수말갈이 당과 직접 단독으로 교섭한 사실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정국의 불안정한 모습은 이 시기 세 왕이 당으로부터 받은 책봉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강왕 이후 당의 책봉에서 주목되는 것은, 새 국왕이 즉위하였을 때 전왕보다 낮은 품계의 관직을 알단 제수하였다가 나중에 높은 품계의 관직으로 승진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내분기 가운데 상대적 안정기에 해당되는 강왕이나 내분기를 극복하고 해동성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선왕은 즉위 이후에 관직이 승진된 데 반해, 정왕, 희왕은 재위기간이 4, 5년이나 되면서도 그렇지 못한 점은 역시 정국이 불안정하였기 때문이다.

 

정국의 불안정은 818년 선왕 대인수의 즉위로 알단락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지금까지 왕위가 고왕 대조영 후손으로 계승된 것과 달리, 고왕의 아우인 대야발의 4대손이며 간왕의 종부 항렬인 대인수가 즉위하였다는 사실이다. 고왕계가 간왕의 죽음으로 단절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고왕계가 아닌 대야발계의 대인수가 즉위하였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지위가 상당하였음을 추측케 한다.

 

선왕의 즉위도 그가 방계라는 점에서 폐왕 대원의와 마찬가지로 찬탈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시기 왕권이 미약하고 내분의 상황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찬탈 여부는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의 정치적 지향성이 문제가 된다. 그가 즉위한 이후 대이진 대를 거치면서 당의 문물제도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 해동성국이라고 운위되는 점에서 볼 때, 선왕은 국인세력의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선왕의 즉위에 따른 왕계의 교체는 발해 왕실의 역사 의식도 변화를 끼쳤다. 발해의 건국 시조는 구당서 발해말갈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에 의하면 고왕 대조영이다. 그런데 '오대회요' 발해전과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의 건국을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부터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발해 초기 국호에 대해 구 계통의 사료가 각각 진국(振國)과 진국(震國)으로 달리 표기한 것과 유사하다. 후자쪽 기록은 둘 다 833년 발해를 방문한 장건장의 '발해국기'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특히 신당서 발해전은 구당서 발해말갈전에 없는 발해 내부의 실상을 많이 전하고 있다. 발해국기는 장건장이 직접 발해를 견문한 기록이므로, 여기에는 당시 발해인들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신당서에서 걸걸중상이 등장하는 것은 9세기 당시 발해인에게 걸걸중상이 중시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선왕의 즉위로 왕계가 대조영에서 대야발로 교체된 데 따라, 대야발계로서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조영보다 걸걸중상을 선양하였던 것이다.   

 

선왕 즉위 이후 대당관계가 안정되고 영역이 확장되었다. 구당서, 요사 등을 보면 선왕이 818년 정월 당으로부터 은청광록대부(종3품).겸교비서감(종3품)(홀한주)도독.발해국왕으로 책봉받은 뒤 2년 후 금자광록대부(정3품).검교사공(정1품)으로 승진되었다. 선왕이 해북제부를 토벌하여 크세 영토를 확장하였고, 공이 있어 당으로부터 검교사공을 제수받은 것이다. 따라서 선왕의 승진 이유는 영역 확장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선왕의 영역 확장은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말갈제부를 공략하여 군읍을 설치한 사실과 시간적으로 일치한다.

 

먼저 북쪽의 말갈제부를 살펴보면, 월희.우루와 흑수말갈이 각각 802년 당과 교섭한 적이 있었다. 월희말갈과 흑수말갈은 각각 741년과 752년을 마지막으로 대당교섭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에는 특정 명칭이 아닌 말갈이라는 범칭으로 발해와 함께 당에 입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발해 사신이 발해압말갈사나 말갈도독의 직함을 띠고 있는 사실은 말갈의 대외교섭이 발해의 통제하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반면 발해 내분기에 월희.우루.흑수말갈이 독자적으로 당과 교섭하였던 것은 발해의 통제력이 이완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선왕은 먼저 이들을 복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왕계의 교체에 따른 내부의 모순을 외부로 돌리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선왕 즉위 이후 월희말갈이 더 이상 대당교섭에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 회원부와 안원부가 설치되었다고 파악된다. 반면 흑수말갈의 경우 부.주 같은 발해의 행정구역이 설치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0세기 초에 다시 당과 교섭하였기 때문에 발해가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당은 율령제에 입각한 전반기의 통치체제는 '안사의 난'을 겪으면서 붕괴되어 갔다. 이에 따라 원래 변경 수비를 담당하던 번진이 내지로 확산되어 병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번진의 절도사가 각지에 활거하게 되었다. 이른바 절도사 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특히 안사의 난 말기에 항복한 반란측 무장들에게 당 조정은 절도사를 제수하여 그 세력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번진은 하북 지역에 특히 많았는데,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당 조정을 받들었으나 실제로는 독립적인 지방정권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당 조정에서는 중앙에 순종하여 당왕조 체제에 편입해 들어온 번진을 순지라고 한 데 반해 그렇지 못한 곳은 반란측 지역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당 조정에서는 이들을 통제하여 순지화하려고 하였지만, 이에 대한 반발은 적지 않았다.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였던 것이 천웅.성덕.노룡의 이른바 하북 3진이었다. 당 조정은 775년과 781년, 그리고 809년 세차례에 걸쳐 반란측 지역 번진에 대해 토벌을 추진하였다. 781년 두 번째의 토벌에 대해 2번진들이 연합하여 6년간 반란을 일으켰다.

 

무력 동원을 통한 번진들의 순지화에 일단 성공하자, 당 조정은 확고하게 중앙의 지배력을 관철시키고자 809년과 819년 두 차례에 걸쳐 중요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809년에는 절도사 휘하의 지군이 세금을 절도사에게 보내는 송사를 원칙적으로 금지시켰다. 이로써 번진 권력의 재정기반이 약화되었다. 819년에는 지군의 장관에게 병권을 주어 번진 병력의 통솔권을 분할시켰다. 이러한 번진개혁을 통해 당은 후반기에 비교적 안정을 되찿게 되었다.

 

한편 발해 선왕이 즉위한 시기는 당의 번진개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였다. 817년 9월 당은 회서번수 오원제의 토벌에 성공하였다. 818년 정월 이사도는 휘하의 3주를 헌납하고 아들을 조정에 파견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려고 하였다가 철회하였다. 818년 7월 헌종이 토벌을 명하자, 819년 2월 치정의 도지병마사 유오가 이사도를 죽이고 투항하였다. 이로써 평로치청은 765년 이정기가 자립한 지 55년 만에 멸망하였다. 그런데 평로치청절도사는 발해와 신라를 관장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양국과 활발한 교역을 전개하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났을 때, 평로유후 서귀도나 안동도호 왕현지는 발해에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발해는 이를 거부하였다. 또 안사의 난이 진행중이었던 762년 당이 발해의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승진 책봉하였던 것은 발해와 반란군의 연결을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던 것이다. 따라서 당 조정은 발해를 관장하는 임무도 맡은 평로치청절도사 이사도를 토벌하려고 하였을 때, 안사의 난 때와 마찬가지로 발해의 동향을 주시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이사도가 발해에 지원을 요청하였을지도 모른다. 당 조정이 이사도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신라에 파병을 요청한 사실에서 볼 때, 이사도의 난을 어떤식으로든 발해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따라서 선왕이 공적이 있다는 이유로 승진 책봉된 것은 이사도의 난에 발해가 동조하지 않았거나, 발해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당 조정을 지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선왕은 즉위 직후 내부 모순을 해소하고 이탈의 조짐을 보이던 말갈제부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북방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도 이사도의 난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으로부터 승진 책봉된 것이다. 그리고 서남쪽으로 세력을 뻗쳐 나갔다.

 

이와 관련된 신라측 동향으로 다음의 두 사건이 주목된다.

 

하나는 825년 정월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의 도적 100여 명과 함께 평양에 도읍을 세우려고 북한산주를 공격하였다가 오히려 토벌된 사건과 다른 하나는 이듬해 7월 우잠군 태수 백영이 한산 북쪽의 주군들에서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에 3백리나 되는 장성을 쌓았던 사실이다.

 

헌덕왕대에는 잦은 기근 속에서 도적이 사방에 발생하였고 급기야 822년에는 웅천주에서 김헌창의 난까지 일어났다. 반란은 곧바로 진압되었고 여기에 연좌되어 죽은 김헌창의 무리는 239명이나 된다. 그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은 아들 법문이 후일을 도모할 곳은 신라 중앙의 통치력이 미치기 힘든 북쪽 국경지대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산주로 달아난 법문이 고작 도적 100여 명과 함께 도읍을 세우려고 주친인 북한산주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에서의 왕위계승 분쟁의 여파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북방에서 새로운 위협에 따른 지방의 동요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826년 신라가 1만여 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패강에 장성을 쌓는 대규모 역사를 일으킨 것은 현실적으로 북쪽에서 남진해 오는  발해의 위협을 막는 것임과 동시에 이로 인한 내부의 동요를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장성은 외부세력의 침입에 대한 방어시설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안과 밖을 별세계로서 구별하는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그 내부를 장성 건설자가 지켜야 하는 자기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가시적으로 내외에 표명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잇기 때문이다.

 

요서에 보면 발해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였다는 부분에 대해 신라측 사료에는 이무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발해와 신라간에 군사적인 대규모 충돌은 없었지만 발해가 평양 일대의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는 완충지대까지 진출하여 신라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자 신라에서는 위기감이 고조되어 장성을 쌓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발해가 북쪽의 말갈제부에 대해 토벌후 부.주를 설치하여 적극적인통치를 실시하였지만, 신라 쪽인 남쪽 평양 일대에 부.주를 설치하여 적극적으로 통치하였다는 증거는 기록으로 전해지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