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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14 : 발해의 역사 17 (제10대 선왕 대인수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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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214 : 발해의 역사 17 (제10대 선왕 대인수3)

두바퀴인생 2011. 4. 16. 03:34

 

 

한국의 역사 214 : 발해의 역사 17 (제10대 선왕 대인수3)

 

 

 

제10대 선왕 대인수 3

 

 

제 10대 선왕(宣王, ?~830년, 재위: 818년~830년)은 발해의 제10대 이며 는 대인수(大仁秀)이다.

 

선왕은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현손(玄孫)이며, 연호는 건흥(建興)이라 하였다.

 

선왕은 발해의 영토를 크케 확장시켰는데, 이때 발해의 영토는 남으로 신라와 접하고, 서로는 소고구려를 합병하여 요동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고구려부여 등의 옛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또한 북쪽의 흑수말갈 등 발해에 대항하던 말갈의 부족들도 복속시켰다.

 

선왕은 발해 중흥의 대업을 이룬 중흥군주(中興君主)로서 이때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당과 밀접한 외교를 하여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여 행정구역을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개편하고 학술을 진흥시키는 등 발해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가족관계

참고

 

 

 

 

 

선왕 대인수의 지배체제 강화(계속)

 

발해의 중심지가  읍루 또는 숙신 지역이었다는 사실과 숙신 계승의식은 무관하다. 그리고 고구려 계승의식이 전기처럼 두드러지지 않은 점은 발해의 영역확장 과정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발해의 초기 영역은 동모산 일대와 압록강, 혼강 일대의 옛 고구려 지역이었다. 서쪽으로 안동도호부 그리고 남쪽으로 신라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발해의 영역 확장은 동북방면으로 나갈 수밖에 없엇다. 그리고 지배 대상은 이곳에 산재한 말갈제부였다.

 

고구려 유민과 고구려 세력권에 속했던 말갈족이 건국집단을 구성하였던 발해는 대내적으로 고구려가 말갈을 지배하였다는 측면에서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일본에 대해서도 고구려와 일본의 선린 관계를 상기시키기 위해서 표방하였다. 즉 발해 초기에는 신생국가가 갖는 지배체제 미비를 고구려의 권위에 의존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선왕대 이후로 지배체제가 완비됨에 따라 더 이상 고구려의 권위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발해가 몇 차례 천도 끝에 상경에 정착한 것은 발해의 지배층이 국가의 발전방향을 동북방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초기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복방동이제족 통합의식으로 흡수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대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잠시 발해의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과정과 그 의미를 동시기의 신라의 경우와 대비하여 살펴보자.

 

756년 안사의 난 이후 당에서 율령제가 붕괴되어 가는 데 반해, 발해와 신라는 당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발해는 739년부터 759년까지 고구려의 지명을 사용하는 도독, 자사 등의 직함이 등장하며 762년부터는 정당성 좌윤 같은 당의 관제를 모방한 중앙 정치기구가 등장하였다. 한편 신라는 757년 12월 9주의 명칭을 한문식으로 개정하였고, 이어 2년 뒤인 759년 정월에는 중앙 관직의 명칭도 당의 관제를 모방하여 개정하였다.

 

그런데 발해에서는 문왕 사후에 방계인 족제 대원의가 즉위하면서 25년간 내분기에 돌입하게 되었다. 신라에서는 경덕왕의 뒤를 이어 일단 적자인 혜공왕이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혜공왕 12년 776년에 백관의 명칭을 복구하였고, 4년 뒤 혜공왕은 반란의 와중에 피살되고 이후 신라는 왕위를 둘러싸고 격심한 권력투쟁이 발생하였다.

 

발해와 신라가 8세기 중반에 당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결국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확립을 지향한 것이었다. 그 이후 신라에서는 진골 귀족의 반발, 발해에서는 건국집단 출신의 기득권 세력이 반발을 초래하여 일정 기간 내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런데 발해의 경우 25년 동안 내분기를 지나 선왕과 대이진대에 '유년칭원법'을 사용하였으며, 당에 학생을 파견함으로써 당의 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한편 신라의 경우에도 원성왕 778년 독서삼품과를 제정하여 국학 출신자들의 관직 진출을 제도적으로 보장하였고, 소성왕은 국학에 녹읍을 지급하였다. 애장왕 6년 805년에는 다시 관직명이 일부 한문식으로 바뀌었으며, 흥덕왕 대에는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개칭하는 등 당의 율령제를 모방한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흥덕왕 사후 당시 왕위 쟁탈전이 발생하였다.

 

이처럼 8세기 중반 이후 남북국의 정치적 전개과정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이후 신라는 쇠퇴기로 접어드는데 반해, 발해는 해동성국으로 불릴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897년 발해 사신은 당 조정에서 국력의 차이에 따라 신라의 사신보다 상석에 앉을수 있도록 요구할 수 있었다. 

 

발해는 선왕의 즉위로 내분기를 극복하고 정국이 안정되어 해동성국을 구가하게 되었다. 발해의 영역과 3성 6부 등 중앙통치기구 및 5경 15부 62주 등 지방 통치제도가 대체로 선왕.대이진 시대에 완성되었다. 이는 왕권을 쟁점으로 하는 통치체제 확립을 의미한다. 발해의 유적을 발굴한 결과 상경성의 확대와 함께 외성이 설치된 것도 그 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동경 시대에 계획된 외성이 이때 비로소 실현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궁성도 확대되고 그 아래 황성이 새로이 설치되는 등  내성의 구조도 바뀌었고, 그 바깥의 시가지를 정연한 도시 계획에 따라 배치하였을 것이다. 이울러 내성 구조의 변화에 상응하여 궁성내에 새로은 궁전 즉 제1.2호 궁전도 이때 세워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발해인들은 자신들이 남긴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상경성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그런데 발해의 문물제도는 당의 그것을 모방한 점이 많고, 상경성의 경우도 그 구성이나 배치가 당 장안성과 매우 유사하다. 즉 상경성의 궁성과 황성이 좌우대칭으로 구획된 도시계획이 그것이다. 특히 당의 장안성은 통치형 황제가 남면하는 구조로, 3성 9시 등 모든 행정기관은 모두 궁성 남쪽의 황성에 집중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