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비밀과 신비로 가득찬 천년왕국의 역사를 마무리하며... 본문
비밀과 신비로 가득찬 천년왕국의 역사를 마무리하며...
두 달 가까이 신라의 역사를 블로그에 올리면서 신라사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많은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들었다.
역사에 대한 인식도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던 옛날 학창 시절, 시험 준비에만 급급하여 막연하게 암기 과목으로 알고 역대 왕들의 이름을 외우거나 주요 사건 년대를 암기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피상적으로 들었던 이야기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역사란 과거와의 대화라 했던가? 그래서 전혀 교감이 없는 역사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번에 신라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자세하게 다시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고, 그래서 기억이 가물거리는 과거의 시간을 되씹으면서 다시 신라사를 들어다 보니 보면 볼수록 신라의 역사가 매우 신비로운 역사라는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사학자 박영규씨가 '신라왕조실록' 머리에 쓴 글를 인용한다.
신라사는 아직 우리들에게 여전히 낯설고 암담한 무덤 속의 역사로 남아 있다.
"신라인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는가?"
반도의 동남쪽 조그만한 땅에 위만에게 망한 북방의 고조선 유민과 진시황의 지배를 피해 온 연나라 망명객들, 그리고 캄차카 반도 근방에서 이주해온 석탈해 집단 등 외래세력과 토착민들과 서로 만나 정착촌을 형성하면서 6개 부락에서 출발하여 서라벌에 나라를 세우기까지 신라의 건국 신화는 아직도 신화로 남아 있는 신비로운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과 풍속이 특이하여 마한이나 백제, 고구려와는 아주 다른 삶의 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신라인들의 삶을 언급하자면 그 모두가 신비롭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와는 달리 하나의 성씨가 아닌 박, 석, 김 세 성씨가 하나의 왕조를 일군 매우 특이한 국가이다. 아시아의 어느 나라 왕조에서도 찿아 볼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 세 성씨가 하나의 왕조를, 그것도 천 년의 역사를 가진 국가를 유지했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의 극치라 할 것이다.
신라에서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독특한 왕호를 사용하였고, 이 호칭들의 생성 배경과 사용 과정이 또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왕후들이 남편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고, 그 아이가 왕이 된 사실들도 신라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현상이다. 또한 사위가 왕을 잇고, 여왕을 배출한 왕조도 신라밖에 없다.
신라인들은 백성 전체가 서로 성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가족 집단의 성격을 띠고 있다. 말하자면 신라는 거대한 가족 집단인 셈인데, 이는 아주 보잘 것없던 작은 나라 신라가 삼한 통일의 대업을 일궈 낸 힘의 원천이었다. 신라인들의 성 풍속은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특이하고 개성적인 것이었으며, 그에 따른 결혼 풍속은 세계 어디에서도 찿아볼 수 없는 희귀한 문화이기도 했다.
고려의 역사를 보면, 태조 왕건이 자기 자식들을 서로 결혼 시킨 사실을 두고 '콩가루 집안'이니 '불륜의 극치'니 하며 침을 튀기면서 흥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결혼은 신라의 풍속을 이은 것이었다. 그러한 결혼 풍속은 신라 시대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이복 남매끼리 결혼한 것은 물론이고, 아버지가 다른 이성 남매의 결혼, 자매가 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일, 형제가 한 여자를 공유하는 일, 한 여자가 여러 남자를 거느리는 일, 전왕의 후비나 왕비조차도 다음 왕과 관계하는 일, 심지어 자기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양보하는 일도 신라 사회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화랑도가 철저하게 성적으로 얽혀 있는 집단이라는 사실 또한 이채롭다. 또 그들이 인재발굴의 집단이었으며 삼한통일의 주역이 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또 성을 서로 나누는 행위를 전혀 추잡하게 여기지 않았던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 정치에 여성들의 입김이 직접적으로 작용한 것이나 태후나 유력한 왕실의 여자들이 왕을 갈아치우는 일도 신라사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역사이다.
오늘날 신라인들의 역사는 유교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역사학자들의 그릇된 시각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무덤 속에 갇혀 있다.
많은 학자들이 신라사를 조선사의 가치관으로 바라보고, 유교적인 눈으로 해석하고, 20세기 윤리 의식을 잣대 삼아 그 풍속을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앞에 던져진 신라사는 그야말로 껍데기와 알맹이가 모두 변질되어 본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도록 서술되어 있다. 그런 현실이다 보니 신라 통사 한 권이 제대로 만들어 질 수 없었고, 한국인들은 신라시에 대한 거의 백지 상태나 다름없게 되었다.
김유신 장군 동상
거기엔 비단 학자들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머릿속엔 고조선과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에 대한 동경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암암리에 신라의 삼한 통일에 대한 거부감으로 귀결되고 있다. 즉, 신라가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통일하였다면, 우리는 지금 광활한 영토의 주인으로 살고 있으리라는 회한의 역사 의식이 강하다는 의미다. 또한 신라가 당이라는 외세를 끌여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망하게 했다는 원망 섞인 시선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에 비해 지나치게 작아 보이는 한반도 땅, 그것도 지금은 반으로 쪼개진 나라에서 사는 백성들의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신라의 입장에서 헤아려 본다면 생각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지금의 경상도 크기 만한 작은 나라 신라가 북쪽의 강대한 세력인 고구려와 최대의 라이벌인 백제, 끓임없이 침략과 약탈을 자행했던 왜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시엔 지금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는 점도 상기해야 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 별개의 나라로 오직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지상과제였고, 신라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신라가 백제의 땅을 지키지 못하고 신라 땅마저 당나라에 병합되었더라면,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있었을 것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경순왕이 마지막 신라 천년사직을 마감하는 결단의 모습을 보자.
경순왕은 고려에 투항하겠다는 자기의 생각을 백관을 모아 놓고 공포한다.
"사방의 국토가 모두 타인의 소유가 되었고, 국세는 쇠락하여 우리 나라는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하여 이제 우리는 스스로 나라를 보존할 수 없게 되었으니, 고려에 항복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말을 듣고 태자가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린 것이니,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스스로 다지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망할지언정 어찌 일천 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
그러나 경순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의 고립과 위태로운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엇는데, 어떻게 나라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강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나약하지도 못한 탓에 그저 무고한 백성들만 참혹하게 죽이는 것은 차마 할 짓이 아니다."
경순왕은 곧 시랑 김봉휴를 고려에 보내 항복을 알리는 편지를 전하게 하였다. 그러자 태자는 비통한 표정으로 통공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개골산 바위 아래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은 채 풀입을 먹으며 일생을 마쳣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를 마의태자로 불리었다. 비통한 그의 심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솨락의 길을 걷고 있던 신라 왕조를 마의태자가 왕위를 어어받았다고 달라질 것은 없는 상황이었고 흘러가는 역사를 붙들기에는 너무나 늦은 감이 있었다. 태자로써 그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절치부심하여 어느 정도 재기를 도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천년 사직을 함부로 끝낸다는 것은 조상들에게 크나큰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신라 조정은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고 백성들도 신라 조정의 멸망을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경순왕의 비장한 결단은 한편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이미 쇠락할대로 쇠락한 왕조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해 11월, 고려 태조가 대상 왕철 등을 보내왔다. 항복을 받아들이고, 경순왕을 영접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신라 천년사직은 무너졌다.
우리는 지금 신라라는 미지의 세계를 살펴보았지만 아직도 여러 편견에 사로잡혀 그릇된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라인 출신이며 중국에 대한 강한 사대사상에 빠져 있던 김부식의 삼국사기 기술 내용에서 보듯이 대륙 백제의 내용을 모두 삭제해 버리고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원인을 과도하게 부풀리고 신라의 역사 중 치부를 감추었던 점도 고려할 때, 삼국사기의 내용이 모두가 정확한 사실은 아니라는 점도 인식해야 할 것이며,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술되느니 만큼 역사서 내용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최근 드라마 '근초고왕'을 비롯하여 각종 역사 드라마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도 인식해야 하는데, 시청율을 높이고 광고 수입을 많이 벌어야 하는 방송국 입장에서 역사를 왜곡하더라도 재미위주로 제작하는 게 대부분이며 역사적인 사실로만 드라마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또 역사 교육이 갈팡질팡하는 우리 교육 현실에서 청소년들의 역사의식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그것도 일제 식민사관 위주의 학자들이 만든 역사서로 만든 교재로 역사를 교육하고, 그리고 일부 좌편향 사상에 빠진 전교조 소속 교사들에 의해 역사가 왜곡 교육되거나, 식민사학지들에 의해 제공된 자료에 의해 역사 드라마가 만들어지고 교육되고 있는 현실도 하루 빨리 개선해야할 시급한 정부와 역사계의 과제일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과거에서 오늘의 현실을 비견하고 미래를 열어나가는 지혜와 현명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역사를 잊고 살고 있는 민족은 대부분 나라를 잃은 민족이거나 지구상에서 사라진 민족이다.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 종교를 잊어버리고 왜곡된 역사를 교육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역사를 망각하고, 남이 쓰다 버린 유교를 받아들여 허례허식과 공리공론에 빠져 망국의 길을 걸어 왔고, 반도는 남북으로 쪼개져 주변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집어삼키기 위해 군침을 흘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우리 사회 전반은 비리와 부패로 얼룩지고 정치.사상적 편향성으로 내부 갈등이 고조되어 혼란만 거듭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서양의 오염되고 타락한 퇴폐문화를 받아들여 고유의 아름다운 윤리와 도덕이 상실되어 버렸고, 중세 서양에서 종교가 지배하면서 암흑시대를 열었다가 서양에서 쫒겨나고 버림받은 탐욕스런 종교인 기독교,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와 비대해진 권력 집단으로 성장하여 지금은 재산분쟁과 권력다툼에 탐욕의 극치를 달리고 있으며 혹세무민하는 감언이설로 민중을 선동하여 정치, 종교, 사회적인 갈등을 부채질 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생각할 때 미래에 대한 암담한 서글픔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 금융계를 지배하고 노벨상의 30% 이상을 수상하며 2천 년 동안 잃어버렸던 나라를 되찿은 경이로운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이다. 그들 유대인들은 유대 경전인 토라를 통해 모세 5경을 포함하여 유대민족의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모든 청소년들에게 매일 교육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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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저의 블로그를 방문해 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서 신라의 역사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미진하고 어슬픈 내용이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역사를 기술해 보았습니다. 저 스스로도 역사에 문외한이었는데,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가야의 역사를 살펴보고, 발해의 역사로 넘어가려 합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한반도 벌판을 말을 타고 달리는 기분입니다. 역사는 과거와 대화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면서 다시 김해와 고령, 하동, 섬진강 일대로 달려갈 겁니다. 그곳에서 김수로와 허황후를 만나고 그들의 애환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리고 만주 벌판의 고구려 철기병들이 달리던 요하와 요동성, 안시성, 신성을 지나 깊은 숲 속으로 천불령을 넘어 동모산으로 달려가, 대조영, 무왕, 문왕을 만나보고 흑수말갈족이 거주하던 북방 시베리아 밀림을 지나 연해주까지 발해가 말달리던 곳으로 갈 겁니다. 여러분 같이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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