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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81 : 신라의 역사 80 (제56대 경순왕 1) 본문
한국의 역사 181 : 신라의 역사 80 (제56대 경순왕 1)
제56대 경순왕
경순왕(敬順王, 897년 ~ 978년, 재위: 927년~935년)은 신라의 제56대 군주이자 마지막 군주이며, 고려 초의 문신이다. 성은 김(金)씨, 이름은 부(傅)이다. 문성왕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이찬(伊飡) 효종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이다. 경명왕, 경애왕의 이종 6촌 동생이다.
생애
927년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군에게 경애왕이 피살되고, 경순왕이 제위에 올랐다. 재위 시에는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을 살피고, 군신회의(群臣會議)를 소집하여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935년 고려 태조에게 항복했다.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으며, 지금의 개성과 가까운 곳에 거주했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묘는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에 위치해 있다.
가계
경순왕의 왕후
죽방부인 박씨
죽방부인(竹方王后) 박씨(朴氏)는 예부시랑 박광우의 딸이라고도 전하는데, 정사 삼국사기에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다. 박광우는 죽산 박씨로 되어 있는데, 죽산은 경기도 안성으로 신라 수도 경주와는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다. 죽방부인을 신라 진골 출신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으나, 죽방부인의 출신은 명확하지 않다. 소원왕후라는 명칭은 죽방부인이 사망한 이후에 고려에서 내려준 시호이다.
자녀
- 마의태자 김일(金鎰), 첫번째 부인의 장자(출- 삼국사기), 아들 김교(金較)
- 범공대사 김굉(金皇), 첫번째 부인의 계자(출- 삼국사기), 아들 김운발(金雲發), 김우발(金雨發)
- 덕주공주
- 영분공 김명종(金嗚鍾), 경주김씨 영분공파
낙랑공주 왕씨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셋째 왕비 신명순성왕후 유(劉)씨의 장녀이다.
그녀는 고려 제3대 정종, 고려 제4대 광종의 어머니이다. 낙랑공주는 혼인 전에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로 불리었으며, 혼인한 뒤에 낙랑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으로도 불리었다.
삼국사기, 고려사에 따르면 935년 11월에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가 백관을 이끌고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했다고 한다.
자녀
- 대안군 김은열 : 경주 김씨 대안군파
- 삼척군 김추 : 삼척 김씨 시조, 고려 초 문하시중 역임
- 언양군 김선 : 언양 김씨 시조
- 1녀 헌숙왕후(고려 경종의 처)
- 2녀(경주 이씨 이금서(李金書)에게 하가, 이주좌의 증조모)
- 3녀(황경(黃瓊)에게 하가)
- 의성군 김석 : 의성 김씨 시조
- 강릉군 김건 : (후)강릉 김씨 시조
부인 왕씨
왕건과 성무부인 박씨의 딸 왕(王)씨는 경순왕의 아내이다.
성무부인 박씨는 평주의 호족 박수경의 둘째 딸로 태어나 왕건에게 시집갔으며, 아들 넷과 딸을 하나 낳았는데, 딸 왕씨는 경순왕의 부인이 되었다.
경순왕과 결혼한 성무부인 박씨 딸 왕씨는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시호는 전하지 않는다.
기타 후궁들
- 별빈 안씨 - 민담설화, 신라삼성연원보에 등장하는 경순왕의 마지막 부인이다.
- 후궁 무명씨
- 1녀(육보(관성 육씨 시조)에게 하가)
참고
신라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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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대 (기원전 57년 - 654년) |
혁거세 거서간 · 남해 차차웅 · 유리 이사금 · 탈해 이사금 · 파사 이사금 · 지마 이사금 · 일성 이사금 · 아달라 이사금 · 벌휴 이사금 · 내해 이사금 · 조분 이사금 · 첨해 이사금 · 미추 이사금 · 유례 이사금 · 기림 이사금 · 흘해 이사금 · 내물 마립간 · 실성 마립간 · 눌지 마립간 · 자비 마립간 · 소지 마립간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신라 중대 (654년 - 780년) |
태종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 |
신라 하대 (780년 - 935년) |
선덕왕 · 원성왕 · 소성왕 · 애장왕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민애왕 · 신무왕 · 문성왕 · 헌안왕 · 경문왕 ·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 신덕왕 · 경명왕 · 경애왕 · 경순왕 |
제56대 경순왕 실록 (?~서기 978년, 재위기간 : 서기 927년 11월~935년 11월, 7년)
마지막 왕 경순왕과 천년왕국의 몰락
경순왕은 제46대 문성왕의 후예로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부이며, 경애왕의 외종제이다. 아버지는 이찬 효종이며, 어머니는 계아태후이다. 경순왕의 아버지 효종은 효공왕 6년(902년)에 대아찬으로 시중에 임명되어 그 후 이찬으로 품계가 올랐고, 오랫동안 신라 조정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효종의 아들 부가 왕위에 오른 것은 견훤의 천거에 의해서다. 견훤은 박씨 왕조에 대해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경명왕 즉위 이후 신라는 노골적으로 고려와 화친하며 백제를 적대시 했다. 경애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견훤을 비방하고 왕건을 추겨세웠다. 이에 대해 몹시 분개하고 있던 견훤은 927년 9월에 고울부(경북 영천)를 공격하였고, 이내 말머리를 돌려 신라 도성을 유린했다. 그 과정에서 경애왕이 자살하게 되고 견훤은 박씨 왕조를 폐하고 김씨 왕조의 후예인 부를 왕으로 세웠다. 이때가 927년 11월이다.
비록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경순왕은 왕권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견훤은 그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가면서 신라 도성을 지키던 병사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갔고, 심지어 병기를 모두 빼앗고 병기를 만드는 기술자까지 모두 압송해 갔다. 그 때문에 경순왕 휘하에는 군대가 전혀 없었다. 말하자면 그는 그야말로 이름뿐인 왕이었다. 그가 기댈 수 있는 곳은 오직 고려의 왕건 뿐이었다. 그는 자기의 목숨과 종실의 운명조차 고려군에 맡겨야 할 판이었다.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우선 경애왕의 시신을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와 함께 통곡하며 장례를 준비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 조문한 뒤, 이내 자신이 직접 기병 병력 5천을 이끌고 견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달려갔다.
왕건은 견훤이 공산(팔공산)을 택해 돌아갈 것을 판단하고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급습을 가할 요량이었다. 휘하의 병력은 무두 기병이었고, 좌우에는 백전노장 김락과 신숭겸을 배치했다.
그러나 당한 쪽은 왕건이었다. 고려군이 길목을 차단할 것을 예상한 견훤이 복병을 숨겨 두었다가 공산 동수로 접어든 고려군 선봉대를 급습하여 궤멸시켰다. 그 바람에 왕건은 사면초가에 빠지고 말았다. 포위망을 똟을 수 없게 되자, 신숭겸이 달려와 자기가 왕의 갑옷을 입고 어차에 올라 싸울 터이니, 그 사이 변복을 하고 빠져 나가라고 제의했다.
왕건은 신숭겸의 살신성인 덕분에 가까스로 혼자 목숨을 건져 탈출할 수 있었다. 그 대신 5천의 병사와 김락, 신숭겸 등 유능한 장수와 병사들을 모두 잃는 처절한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공산 패전 이후 왕건은 계속 수세에 몰렸다. 928년 정월에는 강주를 구원하려 가던 원윤 김상이 백제 장군 흥종에게 목숨을 잃었으며, 5월에는 강주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강주 원보 진경이 죽고, 장군 유문이 항복하였다. 또 8월에는 어렵게 얻었던 대야성이 다시 백제 장수 관흔의 수중에 떨어졌고, 고려와 신라의 교통로인 죽령 또한 백제군이 장악했다. 11월에는 경상 북부 지역의 요충지인 부곡성이 함락당해 장군 양지와 명식이 백제에 항복하였다. 929년 7월에는 견훤이 직접 병력 5천을 이끌고 와 고려의 주요 거점인 의성부를 공격하여, 의성 성주 홍술이 전사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왕건은 '내가 좌우 손을 모두 잃었다'라고 할 정도로 홍술은 신임받던 장수였다.
그달에 경북 순주(순흥)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왕건은 그말을 듣고 크게 진노하였으나, 원봉의 이전 전공을 생각하여 그의 가족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순주를 현으로 강등시켰다. 원봉은 나중에 이때 항복한 책임을 지고 엄벌에 처해진다.
929년 10월, 견훤은 자신의 고향이며 아버지 아자개의 근거지였던 사벌의 가은현을 포위했다. 그곳을 되찿는 것이 견훤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러나 견훤은 가은현 점령에 실패했다.
그러자 견훤은 경상도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군의 마지막 보루인 고창(경북 안동)을 공격했다. 그 소식을 듣고 왕건이 군대를 이끌고 충주로 달려왔으며, 가까스로 죽령 길을 똟고 영주와 풍기 등을 둘러보며 백제군을 공격할 틈을 엿보았다.
하지만 백제군의 기세가 워난 강해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왕건은 고창의 고려군을 구하기 위해 여러 모로 방책을 강구해 보았으나 뽀족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장수들은 대부분 고창을 포기하자고 했는데, 만약 죽령을 넘어갔다가 퇴로를 차단당하는 날에는 꼼짝없이 죽을 판국이라 왕건도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고창의 고려군을 포기한다면 대세가 견훤에게 넘어갈 께 뻔했다.
왕건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유금필이 강력하게 출전을 건의했다. 그는 3천 명의 아군을 적군에게 내줄 수는 없다며 절대로 고창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제야 왕건도 결심을 굳혀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 이외에 답이 없다고 판단하고 유금필을 앞세워 죽령을 뚫었다.
고려군이 죽령을 뚫자, 이내 좋은 소식이 들여왔는데, 제암성을 지키고 있던 신라 장수 선필이 군대를 이끌고 귀순해 온 것이다. 선필의 부대는 주변 지형을 잘 알고 있어 왕건은 그듫을 잘 이용하면 타개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선봉에 선 유금필은 기세를 세우며 막아서는 백제군을 잇따라 격파하여 그 덕분에 왕건의 군대는 고창으로 진입하여 병산에 진채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견훤의 군대는 거기서 5백 보 남짓 떨어진 석산에 주둔하면서 서로 대치했다.
이렇듯 양쪽 진영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데, 왕건에게 또 하나의 낭보가 날아들었다. 그 주변에서 신라 민병대를 이끌고 있던 김선평, 권행, 장길 등이 고려군에 가세한 것이다. 힘을 얻은 왕건은 신라 민병대와 함께 협공을 감행했다. 싸움은 이른 아침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결과는 왕건의 대승이었다. 견훤은 패배하여 병력 8천을 잃고 낙동강을 넘어 남쪽으로 퇴각했다.
백제군이 퇴각하자, 왕건은 제암성 장수 선필을 사신으로 삼아 경순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경순왕은 반색하며 사신을 보내 왕건을 만날 것을 청하였다.
경순왕이 왕건에게 의탁할 속내를 드러내자, 그나마 신라 신하로 남아 있던 동해 주변의 주와 군의 110여 성이 고려에 귀순했다.
경순왕은 931년 2월 태수 겸용을 보내 왕건과 만나기를 다시 청했다. 왕건은 경순왕의 청을 받아들여 50여 명의 기병만 거느린 채 신라 도성으로 들어왔다. 경순왕은 자기의 사촌 아우 유렴으로 하여금 성문 밖에서 왕건을 영접해 오도록 했다. 왕건이 도성에 당도하자, 그는 백관들과 함께 교외에서 왕건을 맞이하여 대궐로 와서 서로 마주 대하며 예를 갖춰 절을 하였다.
경순왕은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푼 후에 술기운이 감돌자,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 이 나라의 운수가 불길하여 견훤이 불의의 해동을 자행하며 내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무엇으로 이 통분을 대신할 것인가/"
경순왕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시절을 한탄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함께 흐느끼면서 울었고, 왕건도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경순왕을 위로했다.
왕건은 그 뒤로도 두 달여 동안 서라벌에 머물다가 5월에야 귀국길에 올랐다. 경순왕은 혈성까지 따라와 송별하고, 사촌 아우 유렴을 볼모로 삼아 왕건을 따라가도록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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