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182 : 신라의 역사 81 (제56대 경순왕 2) 본문
한국의 역사 182 : 신라의 역사 81 (제56대 경순왕 2)
천년왕국의 몰락
왕건은 서라벌에 머무는 동안 휘하 군사들에게 절대로 민가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 덕분에 서라벌 백성들의 환심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전에 견훤이 왔을 때 마치 범이나 이리 떼를 만난 것 같았는데, 오늘 왕 공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 고 하였다.
송악으로 돌아간 왕건은 8월에 경순왕에게 사신을 보내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선물하고, 관료와 장수들에게도 정도에 따라 포백을 하사했다.
이렇듯 왕건이 지극 정성으로 호의를 표시하자, 경순왕은 왕건을 매우 신뢰하게 되었다.
그 무렵, 견훤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짜고 있었다. 백제는 910년 나주 앞바다에서 왕건에게 크게 패한 뒤로 거의 20년간 해군을 움직인 적이 없었는데, 견훤은 그동안 해군력을 키워 과거의 오명을 씻고자 하였다.
그것도 모르고 왕건은 기세 좋게 백제 성곽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932년 6월에 백제 장군 공직이 투항해 왔고, 7월에는 자신이 직접 일모산성(청주 문의면)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견훤은 느닷없이 수군을 움직였다. 그해 9월 백제의 해군 장수 상귀가 수군을 이끌고 고려 도성 관문인 예성강으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염주, 백주, 정주 세 포구를 장악하고, 그곳에 정박해 있던 전함 1백 척을 불살랐다. 또 저산도에 키우고 있던 군마 3백 필을 빼았아 갔다. 10월에는 해군 장수 상애가 북방의 섬 대우도(평북 용천)를 점령하여 거점을 형성했다.
창졸간에 도성 주변과 후방 지역을 공격당한 왕건은 몹시 당황했다. 대광만세에게 해군을 안겨 대우도를 구원하려 했으나, 만세는 백제군에게 패하고 물러났다.
그 일로 왕건이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데, 문득 편지 한 통이 날아 들었다. 당시 고려의 맹장 유금필은 정치적인 모략에 휩쓸려 백령도에 귀양가 있었다. 그런데 대우도가 약탈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유금필이 백령도와 그 주변의 어부들을 모아 수군을 조직하여 상애의 함대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유금필과 고려군의 지속적인 공격에 밀린 상애는 함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하지만 상귀와 상애의 해상을 통한 공략은 왕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왕건은 육지에서 밀리더라도 바다에서는 항상 우위를 점하여 온 터였다. 그토록 위용을 자랑하던 고려 해군이 무력하게 무너지고 안방마져 유린당하였으니, 자존심에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이때 경순왕은 고려에 의탁한 이후로 나름대로 안정을 되찿고, 국정을 수습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932년 4월에는 집사시랑 김불, 사빈경 이유 등을 후당에 보내 조공을 하면서 아직까지는 신라라는 나라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후당에서는 이미 신라를 망한 나라로 판단하고 후당 명종은 933년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 왕건을 고려 왕에 책봉하고 조서를 보내왔지만, 신라에는 책봉사를 보내지 않았다.
한편 왕건은 상애와 상귀에게 대한 수모를 설욕하기 위해 934년 9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 정벌길에 나섰다. 왕건이 운주로 진출하자, 견훤도 갑사 5천을 직접 이끌고 달려왔으나 왕건과 굳이 싸울 의사가 없었다. 견훤은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양쪽 군이 서로 싸우면 양쪽 모두 온전하지 못할 형세이니, 무지한 병졸들만 수없이 살상될 것이다. 화친을 맹약하고 서로의 영토를 보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견훤의 화친 제의를 받고 왕건도 은근히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휘하 장수들을 모아 놓고 의견을 묻는데, 유금필이 나서서 결전을 주장했다.
"오늘의 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염려마시고 저희들이 적을 격파하는 것을 보십시오."
결국 유금필의 주장을 받아들인 왕건은 선제 공격을 명령했다. 유금필이 정예기병 수천을 이끌고 급습을 가하자, 견훤은 그 기세와 용맹에 놀라 달아나고 말았다. 유금필이 그 뒤를 쫓아 백제군 3천을 죽이고, 술사 종훈, 의사 훈겸, 백제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았다.
유금필의 대활약으로 고려군이 운주를 장악하자,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그 위세에 눌려 스스로 항복해 왔다.
왕건은 이런 기세를 몰아 몇 달 뒤에는 유금필을 앞세워 나주 탈환 작전에 나섰다. 나주는 이미 929년부터 백제의 지배에 들어가 있었다. 나주의 일부가 산성에 의지하여 버티고 있긴 했지만, 본국과 연락이 거의 두절된 상태였다.
나주 탈환 작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나중에 견훤이 금산사에 갇혀 있다가 탈출하여 나주의 고려군에 투항한 것을 보면, 유금필의 나주 공략 작전은 성공한 것으로 판단된다.
운주에서 대패하고 나주까지 고려에 빼앗긴 백제 조정은 935년 무렵부터 심한 내분을 겪는다. 견훤은 이미 69세의 노인이었지만, 아직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견훤은 여러 명의 아내로부터 십여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 중에 넷째 아들 금강을 가장 총애하고 있었다. 그는 내심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지만, 주변의 반대가 심하여 금강을 태자로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운주 전투 이후 자기가 이제 늙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금강에게 양위하려 했다.
하지만 금강의 왕위 계승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는 신검이었고, 많은 신하가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그럼에도 견훤은 금강을 태자로 지목했다. 이에 신검을 위시한 반대파 세력은 935년 3월에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켜 버렸다.
반정을 주도한 인물은 이찬 능환이었다. 당시 견훤의 차남 양검은 강주에 도독으로 가 있었고, 삼남 용검은 무주 도독으로 가 있었다. 능환은 이들 둘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반군을 형성하였고, 이 둘이 군대를 이끌고 완산주로 밀려들었다. 그들의 반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견훤은 창졸간에 들어닥친 반란군에게 붙잡혀 금산사에 갇혔고, 금강은 죽음을 당했다.
사건의 전후 관계로 볼 때 신검과 금강은 배다른 형제였다. 신검은 적출로 장자였고, 금강은 서자였던 셈이다. 즉 견훤이 서자인 금강을 태자에 앉히자, 적자들이 대거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신검은 반정 이후 견훤의 측근들과 금강의 비호 세력들을 대거 척살했다.
한편,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유폐된 지 3개월 만인 그해 6월에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에 주둔해 있던 고려군에 귀순했다. 견훤의 투항 소식은 왕건을 흥분시켰고 고려 조정의 신하와 장수들이 모두 너무나 놀라운 사실에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토록 고려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적장 견훤이 스스로 제발로 투항해 왔다는 것은 고려의 통일 작업이 거의 완성 단계에 접으들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왕건은 견훤을 만나 두 손을 잡고 과거를 모두 잊고 반기면서 그를 상부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했다. 그 소식을 들은 신라의 경순왕은 대세가 이미 왕건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자기도 고려에 투항할 뜻을 비쳤다.
그런 가운데 신검은 그해 10월에 왕위에 올랐다. 반정을 일으킨 지 무려 8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그가 즉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저항 세력이 많았다는 뜻이다. 8개월이라는 기간은 그들을 무마하거나 척살하는 데 소용된 세월이었다.
신검이 왕위에 오를 그때. 경순왕은 고려에 투항하겠다는 자기의 생각을 백관을 모아 놓고 공포한다.
"사방의 국토가 모두 타인의 소유가 되었고, 국세는 쇠락하여 우리 나라는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하여 이제 우리는 스스로 나라를 보존할 수 없게 되었으니, 고려에 항복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말을 듣고 태자가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린 것이니,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스스로 다지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망할지언정 어찌 일천 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
그러나 경순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의 고립과 위태로운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나라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강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나약하지도 못한 탓에 그저 무고한 백성들만 참혹하게 죽이는 것은 차마 할 짓이 아니다."
경순왕은 곧 시랑 김봉휴를 고려에 보내 항복을 알리는 편지를 전하게 하였다. 그러자 태자는 비통한 표정으로 통공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개골산 바위 아래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은 채 풀입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를 마의태자로 불리었다. 비통한 그의 심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솨락의 길을 걷고 있던 신라 왕조를 마의태자가 왕위를 어어받았다고 달라질 것은 없는 상황이었고 흘러가는 역사를 붙들기에는 너무나 늦은 감이 있었다. 태자로써 그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절치부심하여 어느 정도 재기를 도모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천년 사직을 함부로 끝낸다는 것은 조상들에게 크나큰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신라 조정은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고 백성들도 신라 조정의 멸망을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경순왕의 비장한 결단은 한편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이미 쇠락할대로 쇠락한 왕조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해 11월, 고려 태조가 대상 왕철 등을 보내왔다. 항복을 받아들이고, 경순왕을 영접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신라 천년사직은 무너졌다.
경순왕이 송악에 이르자, 왕건은 교외로 나가서 그를 영접하며 위로했다. 그에게 왕궁의 동쪽 가장 좋은 구역을 주고, 자기 맏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다. 또한 12월에는 정승공으로 봉하고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 석을 주고 시종하던 관원들과 장수들을 모두 등용했다. 또 신라를 개칭하여 경주라 하고, 이를 경순왕의 식읍으로 주었다.
대세는 그렇게 왕건에게 기울어지고 있었고, 신검의 백제 정권은 안정되지 못했다. 936년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이자, 신검의 매형인 박영규가 고려에 귀순했다. 이는 신검이 자기 세력이라고 규정한 친척들에게 조차 호응을 얻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왕건은 통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936년 9월 8만 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나섰다. 이 대열에는 물론 견훤도 합류했다.
출병한 왕건의 군사는 고려군 4만 3천과 지방 호족 및 발해 유민으로 구성된 연합군 4만 4천 명으로 명실공히 민족 연합군이었다.
고려 연합군과 신검 부대가 처음 싸운 곳은 일선(선산)이었다. 이곳에서 신검은 연합군에게 대패한 뒤 완산주로 퇴각하여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백제군이 견훤을 보자 대부분 스스로 항복하여 싸움을 포기하는 가운데, 연합군이 추격을 계속하여 황산(논산)의 탄령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검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신검이 투항해 올 뜻을 전해 오자, 왕건은 완산주로 가서 정식으로 항복을 받아 냈다. 이로써 약 50년에 걸친 후삼국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경순왕의 삶은 이어졌다. 그는 녹읍으로 받은 경주 지역을 다스리며 살다가 978년(고려 경종 3년)에 생을 마감했다.
능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량포리에 있다. 그의 능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조성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2. 경순왕의 가족들
경순왕은 세 부인에게서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다. 첯째 부인은 죽방부인이며, 마의태자를 낳았다. 둘째 부인은 왕건의 딸 낙랑공주이며, 셋째 부인도 왕건의 딸이다. 이들에게 여러 명의 소생이 있었을 것이나 그 면면이 자세하게 전해지지는 않는다.
죽방부인
죽방부인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왕건이 931년에 경주를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그녀에게 물품을 선물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당시 신라 왕실의 관례로 보아 그녀는 신라 왕족 출신일 것이다.
낙랑공주
낙랑공주는 왕건의 맏딸이며, 셋째 왕비 신명순성왕후 소생이다. 그녀는 충주 호족 유긍달의 딸이며, 그녀 소생 왕자 중에 제3대 정종, 제4대 광종 등 두 명의 왕이 나왔다. 낙랑은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 공주로 불리었으며, 혼인한 뒤로는 낙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 신란궁부인으로도 불리었다.
셋째부인 왕씨
경순왕의 셋째부인 왕씨는 왕건의 후비 성무부인 박씨 소생이다. 성무부인은 평주의 호족 박수경의 딸이다. 박수경은 딸 셋을 왕건에게 시집보냈는데, 성무부인은 둘째 딸이다. 성무부인은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딸이 바로 경순왕의 세 번째 부인이다.
마의태자
마의 태자는 경순왕의 태자이며, 죽방부인 소생이다. 마의태자라는 호칭은 나라가 망한 뒤 그가 개골산이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호이다. 그는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고 투항하려 하자, 강력하게 반대하며 충신과 의사를 모아 사직을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경순왕이 끝내 투항을 천명하자, 부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속세를 등졌다. 그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 초막을 짓고 살았다. 이때 그는 상복에 해당하는 삼베옷을 입고 지냈다. 그래서 '마의태자'라는 별호가 붙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면산의 새벽 28 (우리가 일본인에게 배워야 할 것들...) (0) | 2011.03.15 |
---|---|
비밀과 신비로 가득찬 천년왕국의 역사를 마무리하며... (0) | 2011.03.14 |
우면산의 새벽 27 (물과 불의 지옥, 일본열도) (0) | 2011.03.12 |
한국의 역사 181 : 신라의 역사 80 (제56대 경순왕 1) (0) | 2011.03.12 |
한국의 역사 180 : 신라의 역사 79 (제55대 경애왕) (0) | 2011.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