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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80 : 신라의 역사 79 (제55대 경애왕)

두바퀴인생 2011. 3. 11. 04:13

 

 

 

한국의 역사 180 : 신라의 역사 79 (제55대 경애왕)

 

  

제55대 경애왕  

경애왕(景哀王, ? ~ 927년, 재위: 924년 ~ 927년)은 신라의 제55대 이다. 성은 박(朴)씨, 이름은 위응(魏膺)이다. 신덕왕(神德王)의 아들이며 경명왕(景明王)의 아우이다.

생애

924년에 즉위했다. 즉위 당시 이미 신라는 재정적으로 몹시 가난한 상태이며, 고려, 후백제의 세력에 의해 영토는 줄어들었다. 고려와 동맹을 맺어 세력 회복을 목표로 하였지만, 927년에 포석정에서 국가안녕을 위한 제사의식을 행하던 중 후백제견훤에 기습을 받아 살해당했다.

 

가계

 

참고

 

 

 

 

 

 

제55대 경애왕 실록  (?~서기 927년, 재위기간 : 서기 924년 8월~927년 11월, 3년 3개월)

 

비운의 왕 경애왕과 서라벌로 진군한 견훤

경애왕은 신덕왕의 아들이며, 경명왕의 동복 아우이고 의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위응이다. 경명왕 원년인 917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어 조정을 이끌다가 919년에 물러났다. 924년 8월 경명왕이 후사 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애왕의 즉위와 동시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 왕건을 예방했다. 그러자 925년 10월 고울부(경북 영천) 장수 능문이 고려에 투항하였다. 하지만 왕건은 고울부가 신라 도성과 너무 가까이 있어 혹여 경애왕이 두려워할까 봐 능문을 다독거려 돌려보냈다. 하지만 능문의 부하들인 시랑 배근과 대감 명재, 상술, 궁식 등의 귀순은 받아들엿다. 이미 신라는 쇠락할 대로 쇠락한 상태였기에 왕건은 굳이 경애왕을 자극하여 고려가 신라를 병합하려 한다는 의심을 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능문을 돌려보내자, 이번에는 매조성 장군 능현이 사절을 파견하여 투항 의사를 밝혀 왔다. 왕건은 능현의 투항은 받아들였다.

 

이렇듯 신라 장수들이 계속 고려 조정에 투항하고 있을 무렵, 고려 도성으로 발해의 귀족과 백성들이 대거 귀순하고 있었다. 당시 발해는 거란의 거센 공격에 밀려 도성이 함락될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 여파로 925년 9월에 장군 신덕 등 5백여 명이 귀순하였고, 또 같은 달에 발해의 예부경 대화균을 비롯하여 대씨 왕족들이 대거 귀순했다.

 

고려는 신라 호족들과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우는 한편 백제와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왕건은 정서대장군 유금필을 파견하여 백제의 충청도 지역을 공격하는 한편, 자신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조물군(경북 안동 근처)에서 견훤과 교전하였다. 두 왕이 직접 출전한 만큼 조물성 전투는 치열할 수밖에 없었고 전투의 양상은 초반에 백제군이 유리하였으나 유금필이 가담하면서 고려군의 기세가 되살아났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견훤은 재빨리 화친을 제의했고, 왕건 또한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하고 견훤의 화의를 받아들였다.

 

양국의 화친 조약에 따라 서로 인질을 교환했는데, 백제 쪽에서는 견훤의 처족이자 사위인 진호를 보냈고, 고려 쪽에서는 왕건의 사촌 아우 왕신을 보냈다. 그리고 왕건은 견훤이 자기보다 열 살이 많은 점을고려하여 상부라고 불렀다.

 

경애왕은 양국의 화친 소식을 듣고 왕건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말했다.

 

" 견훤은 이랬다 저랬다 협잡이 많아 화친할 사람이 못 됩니다."

 

왕건도 경애왕의 충고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렇다고 화의를 파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양국의 화의는 엉뚱한 일로 파국에 이른다.

 

그려에 인질로 가 있던 진호가 갑자기 죽어 버린 것이다. 왕건은 시랑 익훤을 시켜 진호의 시체를 백제로 보냈다. 견훤은 고려인들이 진호를 죽였다고 판단하고 분노하여 왕신을 죽인 다음, 군대를 이끌고 웅진까지 직접 진군해 왔다. 이에 왕건은 각 성주에게 명령하여 성을 고수하고 나가 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경애왕이 이 소식을 듣고 또 한 차례 사절을 파견하여 왕건에게 이렇게 전했다.

 

" 견훤이 맹약을 위반하고 출병하였으니, 하늘이 반드시 그를 돕지 않을 것이오. 만일 대왕께서 반격한다면 견훤은 스스로 패망할 것이오."

 

경애왕은 이렇듯 왕건의 미온적인 대처를 질타하며 견훤과 대적하여 백제를 칠 것을 종용하였으나, 왕건은 사절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오. 다만 그의 죄악이 가득 차서 스스로 넘어질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오."

 

왕건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틈이 보이자 927년 정월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백제의 용주(경북 용궁)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애왕은 출병을 반기며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협공에 나섰다. 용주의 백제군은 무너져 항복하였다.

 

그러자 견훤은 왕신의 시체를 왕건에게 보내 고려인들을 자극했다. 왕신의 시체를 본 왕건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운주(충남 홍성)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그곳 성주 긍준을 성밑에서 죽였다.

 

또한 왕건은 4월에 장군 영창과 능식에게 수군을 안겨 강주를 공격하게 했다. 당시 강주는 왕봉규란 인물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는 신라와 백제에 양다리를 걸치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봉규는 원래 의령의 성주였으나, 세력을 확대하여 강주로 진출하였다. 또 후당 명종으로부터 회화대장군이란 칭호도 받고, 신라의 왕으로부터는 권지강주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후당에 자신의 사자 임언을 보내 독자적으로 조공을 하는 등 군주 행세를 하고 있었다.

 

왕건은 그런 왕봉규가 견훤과 결탁하여 뒷거래를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강주를 공격했던 것이다.

 

영창과 능식의 수군은 강주 함락에 실패하였으나, 그 주변인 전이산(경남 남해), 노도평, 서산, 돌산(전남 순천) 등 네 지역을 함락시키고 그곳 장수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시각, 왕건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웅주성(공주)을 공략하였고, 한편으론 재충과 김락 등을 은밀히 파견하여 대야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대야성은 견훤이 2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얻은 백제의 전략 기지로 이곳을 급습한 고려군은 그해 7월에 성을 함락하고, 그곳 장수 추허조와 30여 명을 포로로 잡는 개가를 올렸다.

 

대야성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은 왕건은 직접 강주 순행길에 올랐다. 대야성이 무너진 마당에 강주의 왕봉규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강주를 접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침내 8월 강주에 도착한 왕건은 그곳을 순행하고 접수하였다.

 

왕건이 강주를 순행하자, 그 주변의 성주들이 대거 귀순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고사갈이성(경북 문경)의 백제 장수 흥달이 귀순하엿다.

 

왕건이 여러 전선에서 낙승을 거두자, 견훤은 발끈하여 군대를 몰아 무섭게 진군하여 순식간에 근품성을 함락하고 불태웠으며, 이어 신라 고울부를 습격하여 차지하였다. 그리고 이내 서라벌 도성으로 군대를 몰았다.

 

견훤은 이번에 왕건이 많은 성과를 거둔 것이 신라의 측면 지원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 편을 드는 경애왕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 일련의 상황들이 견훤으로 하여금 서라벌 도성을 치게 한 원인이 되었다.

 

견훤이 영천을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애왕은 급히 연식을 송악에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한 경애왕은 다급한 심정으로 왕비와 궁녀, 종실을과 함께 포석사에 나가 제를 올리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는데, 바로 그때 견훤의 군대가 밀어닥쳤다. 한편 신라 경애왕의 급보를 받은 왕건은 공훤 등에게 군대 1만을 안겨 급히 신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서라벌은 백제군에 유린당한 뒤였다. 고려사와 삼국사기에는 당시 경애왕이 포석정에 나가 연회를 베풀었다고 했으나 포석정은 유희를 즐기는 곳이 아니라 제를 올리는 사당인 만큼 연회를 베풀었다는 것은 신라 멸망의 당위성을 역설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며 당시 경애왕은 국가 안녕을 비는 제를 올렸던 것이다.

 

경애왕은 당황하여 왕비와 함께 달아나 도성 남쪽 별궁에 몸을 숨겼다. 그러나 백제군의 수색망에 걸리자 살해 당할 것을 염려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이때가 927년 11월이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이때 견훤이 경애왕을 체포하여 자결토록 하고, 자신은 왕비를 강간하는 한편, 병사들에게는 경애왕의 비첩들을 강간토록 했다고 적고 있다.

 

견훤은 경애왕의 외종제 김부(경순왕)을 왕으로 세우고, 왕족 효렴을 비롯한 재상 영경과 그외에 종실의 자녀들과 각종 기술자, 병기, 보물 등을 빼앗아 돌아갔다.

 

새 왕 김부는 경애왕의 시체를 수습하여 서쪽 대청에 안치하고, 장례를 치른 뒤, 남산 해목령에 능을 마련했다.

 

경애왕의 가족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왕비의 시호도 전해지지 않고, 다만 견훤에게 강간 당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자녀들은 모두 견훤에 의해 백제로 압송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체적인 면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