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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77 : 신라의 역사 76 (제52대 효공왕) 본문
한국의 역사 177 : 신라의 역사 76 (제52대 효공왕)
제52대 효공왕
효공왕(孝恭王, ? ~ 912년, 재위: 897년 ~ 912년)은 신라의 제52대 왕이다. 성은 김(金)씨, 이름은 요(嶢)이다. 아버지는 헌강왕이고, 어머니는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또는 문자왕후(文資王后)로 추존된 김씨부인이다. 왕비는 이찬 예겸(乂謙)의 딸이다.
생애
897년, 효공왕은 왕위에 올랐지만 신라는 후삼국 시대로 돌입하였고,
그 중에서도 완산에서 세력을 늘리고 있던 후백제의 견훤이나 후고구려의 궁예등의 세력이 급격하게 영토를 빼앗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900년에 견훤이, 901년에 궁예가 왕을 자칭했다.
효공왕은, 그들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주색에 빠져 신라의 영토는 나날이 쇠약해져서 신라는 멸망의 길을 가게 된다.
가계
- 아버지 : 헌강왕(憲康王)
- 어머니 :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문자왕후(文資王后) 김씨
- 왕비 : 왕후 박씨 - 이찬 예겸(乂謙)의 딸
참고
신라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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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대 (기원전 57년 - 65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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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대 (654년 - 7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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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 (780년 - 9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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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대 효공왕 실록
(서기 886년~912년, 재위기간 : 서기 897년 6월~912년 4월, 14년 10개월)
절망감에 사로잡힌 효공왕과 김씨 왕조의 붕괴
효공왕은 헌강왕의 서자이며, 후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요이다. 헌강왕이 죽을 당시 그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보에 싸인 상태였다. 그의 나이 열 살이 되던 해인 895년에 진성왕이 그를 궁중으로 데려와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897년 6월에 진성왕이 중병에 걸려 왕위를 넘기자,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헌강왕이 사냥 구경을 하다가 길가에 서 있던 한 여인에게 호감을 가져 뒷수레에 태웠다가 행재소에 가서 야합하여 얻은 아들이 요이다. 진성왕이 요가 성장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궁중으로 데려와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나의 형제 자매의 골격은 남다른 데가 있는데, 이 아이의 등에 뼈가 솟구쳤으니, 분명히 헌강왕의 아들이다."
진성왕은 곧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게 하고, 요를 받아들여 태자로 삼았다.
그래서 진성왕이 죽자, 왕위에 오른 효공왕은 헌강왕의 왕후이자 자기 양어머니인 김씨를 의명왕태후로 추존하고, 서불한 준흥을 상대등, 아찬 계강을 시중으로 삼아 조정을 개편했다. 그리고 재위 3년인 899년 3월에 이찬 예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예겸은 헌강왕 재위 연간에 대아찬의 벼슬로 시중을 지낸 인물이며, 성은 박씨이다. 효공왕에 이어 왕위에 오르는 신덕왕이 예겸의 아들이며, 경명왕과 경애왕은 그의 손자이다. 예겸은 일찍이 자기 아들 경휘를 헌강왕의 딸과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으로서 대단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던 인물이다. 효공왕이 그의 딸과 결혼한 것은 그의 정치적 배경에 의존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사정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898년에 북쪽 지역에서 패권을 형성하고 있던 궁예는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 30여 성을 빼앗고, 마침내 송악에 도읍함으로써 후고구려의 기치를 내걸었고, 899년 7월에는 북원의 양길을 무너뜨리고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900년에 충주, 청주, 괴산의 세력가인 원회, 청길, 신훤 등이 궁예에게 성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궁예의 세력은 충청도와 경상 북부 일원까지 확대되었고, 마침내 901년 후고구려가 건국되었다.
북쪽에서 궁예가 패권을 형성하고 있는 사이, 남쪽의 견훤도 세력을 팽창해 오고 있었다. 견훤은 901년 8월에 대야성(합천)을 공격해 왔는데, 이는 경상도의 낙동강 서쪽 지대를 장악하고 이어 서라벌을 치기 위한 포석이었다. 다행히 신라 장수들의 활약으로 견훤은 대야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견훤은 이내 병력을 금성(나주)로 옮겨 그곳을 공격하였다. 당시 나주는 견훤이 전라도 지역에서 유일하게 점령하지 못한 땅이었다. 나주의 독특한 지형 덕택에 그곳 호족들은 견훤의 다각적인 공격을 막아 내며 어렵게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견훤은 나주를 손안에 넣기 위해 여러 차례 군대를 동원했지만, 쉽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나주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도성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사방이 모두 견훤의 세력으로 둘러싸인 마당에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궁예는 도읍을 옮기기 위해 철원의 산수를 둘러보며 원대한 포부를 다지고 있었다. 또한 해군대장군 왕건에게 나주를 장악할 것을 명령했다. 궁예의 명령을 받은 왕건은 그곳 호족들을 포섭하여 나주로 군대를 잠입시켰고, 마침내 나주를 손안에 넣었다.
그리고 궁예는 904년에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 하고, 백관의 제도를 확립함으로써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신라 왕실을 섬기며 버티고 있던 패서도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투항해 버렸다. 궁예는 905년에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죽령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빠르게 신라 땅을 잠식하였다.
이렇듯 궁예와 견훤이 패권을 다투고 있었지만, 신라 조정은 마땅한 대책을 수립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지방 성주들에게 함부로 나가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건히 지키라는 수성전을 명령할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907년에 견훤이 일선(경북 선산)까지 진출하여 주변의 10여 개 성을 장악하였고, 궁예는 남진을 계속하여 상주와 안동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라 도성이 있는 서라벌 주변이 온통 견훤군과 궁예군의 전장터가 되고 말았다.
견훤은 나주가 선점당한 것에 분통하여 여러 차례 나주를 공격하였고, 주변 해상을 완전히 장악하는 개가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909년에 궁예군의 해군 장수 왕건에게 해전에서 크게 패하는 바람에 진도와 고이도를 뺏기고 해상권을 잃고 나주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910년 견훤은 다시 충력전을 펼쳐 나주를 공격하였고, 열흘 동안 포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왕건이 이끄는 수군에게 습격을 받아 퇴각하고 말았다.
과거 신라의 요충지들이 모두 궁예와 견훤의 군대의 각축장이 되고 있었지만, 신라 조정은 간신히 도성 주변만 유지한 채 눈뜬 장님처럼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할 처지였다.
그 무렵, 효공왕은 이미 20대 중반의 혈기 왕성한 나이의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이비 쇠할 대로 쇠한 국력을 회복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 절망감에 사로잡힌 그는 정사는 제쳐 두고 총애하는 첩과 음사를 즐기는 데 열중하였다.
911년 궁예가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로 바꿨지만, 효공왕은 이제 그런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오로지 색욕에만 집착하여 늘 애첩의 치마폭에 싸여 놀아날 뿐이었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신하 은영이 그 모습을 보다 못해 효공왕에게 정사를 돌볼 것을 충언으로 간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은영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효공왕의 애첩을 죽여 버렸다.
은영이 왕의 애첩을 죽였다는 것은 왕과 등을 지겠다는 뜻이다. 또한 그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벌일수도 없었을 것이다.
은영은 효공왕의 부인인 왕비 박씨의 조카였고, 예겸의 손자였다. 말하자면 그는 외척의 한 사람으로 당시 조정을 이끌고 있던 영향력 있는 신하였다. 효공왕은 애첩 문제로 왕비 박씨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급기야 은영이 애첩을 죽여버리는 사태까지 비화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효공왕은 왕권을 빼앗기고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하였고, 급기야 912년 4월에 죽음을 맞이했다. 아마도 왕비를 비롯한 박씨 일파가 그를 살해한 듯하다.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박경휘(신덕왕)가 왕비 박씨의 오빠이고, 은영의 백부라는 사실이 그점을 확인해 준다. 그의 죽음으로 내물왕 이후 지속되던 김씨 왕실은 몰락하게 된다.
그의 능은 사자사 북쪽에 마련되었다.
효공왕의 가족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그에겐 왕비 박씨 이외에도 여러 명의 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자식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왕비 박씨는 예겸의 딸이다. 그녀는 왕비에 오른 뒤에 친정 혈족들과 함께 정사에 깊숙히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효공왕이 애첩과 놀아나며 정사를 돌보지 않자, 조카 은영과 함께 그를 제거하는 데 가담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말년의 신라 왕조는 외척들이 득세하여 조정의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이 무너지고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조정과 귀족들은 사치와 탐욕으로 망국의 길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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