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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79 : 신라의 역사 78 (제54대 경명왕)

두바퀴인생 2011. 3. 10. 04:39

 

 

 

한국의 역사 179 : 신라의 역사 78 (제54대 경명왕)

 

  

제54대 경명왕  

경명왕(景明王, ? ~924년, 재위: 917년~924년)은 신라의 제54대 이다. 성은 박(朴)씨, 이름은 승영(昇英)이다. 신덕왕(神德王)과 의성왕후(義成王后)의 아들이며 경애왕(景哀王)의 형이다. 왕비는 장사택(長沙宅)이며, 각간 대존(大尊)의 딸이다.

 

생애

궁예견훤 등이 지방마다 나라를 세워, 신라의 국운이 급격히 기울어지던 때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918년현승(玄昇)의 난이 일어났고, 고려가 건국되었다.

 

참고

 

가계

 

 

 

 

 

제54대 경명왕 실록  (?~서기 924년, 재위기간 : 서기 917년 7월~924년 8월, 7년 1개월)

 

고려의 등장과 경명왕의 생존 외교

경명왕은 신덕왕의 장남이며, 의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승영이다. 912년에 아버지 신덕왕이 즉위하자, 그해 5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917년 7월 신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경명왕은 아우인 이찬 위응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유렴을 시중으로 삼아 조정을 꾸렸다. 하지만 정국은 불안하였고, 곳곳에서 역모 세력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지방 호족들은 이미 박씨 왕조에 등을 돌린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918년 2월에 일길찬 현승이 모반을 도모했는데, 다행히 봍잡혀 처형되었다.

 

그 무렵, 태봉에서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911년 궁예는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중앙집권화 정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를 위한 개혁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과 대립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궁예는 반발하는 수많은 호족들을 가차없이 죽였고, 심지어 왕후 강씨까지도 죽이는 잔인한 면모를 드러냈다. 그는 스스로 미륵이라 자칭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묘술인 '관심법'을 무기 삼아 독단과 전횡을 일삼았다. 그리고 급기야 가장 신임하던 휘하 장수인 왕건에게도 역모 혐의를 씌여 궁지로 몰다가 되레 왕건에 의해 제거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918년 6월에 일어난 이 혁명 사건으로 태봉 왕조는 무너지고, 왕건에 의한 새로운 왕조가 일어났다. 왕건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 그러자  궁예를 따르던 여러 호족들이 왕건에게 등을 돌렸다. 그 덕분에 견훤의 후백제는 공주와 서산, 홍성 등의 땅을 확보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이 해 9월에 놀라운 사건이 터졌다. 상주를 장악하고 있던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왕건에게 투항하는 사건이었다.

 

아자개의 아들인 견훤을 버리고 왕건에게 투항한 것은 후백제가 상주 일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이자개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배다른 아들들이 배다른 형인 견훤에게 귀부하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어쨌던 이 사건으로 견훤의 명예는 크게 훼손되었고, 심리적인 피해도 크게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견훤은 그런 사실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고려 개국 이후 신라의 지방 세력들은 왕건에게 호의를 가지기 시작하였고, 경명왕도 고려와 타협하여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왕건이 919년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겨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자, 신라 조정은 고려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를 강화하였다.

 

이런 경향은 919년 3월에 들어선 상대등 김성과 시중  언옹의 세력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그들은 920년 정월에 왕건과 사신을 교환하고 고려와 수호 관계를 맺었다. 그러자 견훤에게 위협을 받고 있던 지방 세력들이 대거 고려에 귀순했다. 지방 세력의 귀순은 일종의 전략적 제휴 차원에서 이뤄졌다.

 

920년 2월에 강주(진주) 장군 윤웅이 고려에 귀순하였는데, 이는 당시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고려와 연합 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조치였다. 예상대로 견훤은 그해 10월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였고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다급해진 경명왕은 급히 아찬 김율을 왕건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견훤의 군대는 진례로 진군했다.  다행히 왕건의 군대가 도착하여 방어벽을 형성하는 바람에 진례는 함락되지 않았다.

 

그 무렵인 921년 2월에 말갈의 일족인 달고 무리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입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고려 장수 견권에게 대파되어 전멸하였다. 경명왕은 왕건에게 사신을 파견하고, 감사하는 편지를 함께 보냈다.

 

이 사건들 이후, 경명왕은 보다 더 왕건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이런 경명왕의 태도는 신라 왕실을 섬기고 있던 지방 호족들이 왕건에게 귀순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922년 정월에 하지성 장군 원봉이 고려에 귄순한 것을 시작으로, 923년 7월에는 지성장군 성달, 경산부 장군 양달 등이 경명왕의 부탁을 받고 고려에 귀순했다.

 

이렇게 되자, 한때 왕건에게 등을 돌렸던 태봉의 신하들도 고려에 투항하기 시작하였다. 922년 정월에 명주의 호족 김순식이 항복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고 충성을 맹세하였고, 또 진보성 장수 홍술도 같은 달에 항복하였다. 순식은 명주의 호족으로 지금의 강원도 동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북방의 말갈 족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왕건은 그동안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매우 공을 들였다. 또 홍술은 경북 의성 일대의 호족으로 고려가 신라 주변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큰 역활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탓에 왕건은 홍술의 마음을 돌리는데 무척 애를 썼다.

 

이렇듯 과거에 돌아섰던 인물들이 하나 둘 다시 찿아오고, 신라의 호족들마저 휘하에 거느리게 되자 왕건의 세력은 날로 확대되었다.

 

경명왕은 왕건의 세력 확대를 도와 고려에 의존하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제살 깍아먹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정해진 만큼 신라 왕실의 고려 의존은 일종의 생존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려에 의존한 덕분에 정치적 안정을 되찿은 경명왕은 923년에 창부시랑 김낙과 녹사 참군 김유경을 후당에 입조시키고 토산물을 바치는 등 조공 외교를 펼치는 등 오랜만에 외교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그의 외교적 노력은 924년 6월에 조산대부 창부시랑 김약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는 형태로 이어졌고, 후당의 장종은 그에게 의대부시위위경의 관작을 내렸다.

 

경명왕은 이렇듯 쇠락해 가는 신라를 유지하기 위해 고려와 후당에 생존을 위한 외교전을 펼치며 미래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건강이 좋지 못해 924년 8월 지병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황복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는 성등 잉산 서쪽에 뿌렸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토록 하여 양국의 화친 관계를 확인하는 조치를 내렸다.

 

경명왕은 부인이 한 명 있었으나 자식은 얻지 못한 듯하다. 부인은 장사왕후이며, 각간 대존의 딸이다. 그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