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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83 : 가야의 역사 1 (김해 지역 역사) 본문
한국의 역사 183 : 가야의 역사 1 (김해 지역 역사)
김해 지역 역사
자연환경
낙동강 하구 삼각주 지대에 위치하는 현재의 김해평야는 쌀을 비롯해 대파, 화훼의 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런데 김해평야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보면 시대가 올라갈수록 현재와는 매우 다른 환경적 변화를 거쳐 왔다는 사실이 점차 밝혀져 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김해평야는 과거에는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낙동강 중유역의 대륙 분지와 같은 곳이었다가 고김해만이라고 하는 바다로 변했으며, 다시 현재와 같은 하천(낙동강)의 하류역으로 변화해 왔던 것이다.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 지대에 위치한 현재의 김해평야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20,000년∼18.000년전쯤의 매우 추운 시기로, 김해평야에는 자갈층(충적층기저역층)이 퇴적되었다. 이후 기후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면서 실트질 점토층, 모래 자갈층도 계속 퇴적되었다.
그리고 이들 퇴적층이 퇴적될 무렵의 김해지역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 쌓인 현재의 대구 분지처럼 낙동강 중유역의 내륙 분지였을 것으로 추정 되어진다. 그리고 이 무렵의 바다의 높이 ,즉 해수면은 현재보다 110∼140m정도 낮았으며, 당시의 낙동강 하구는 일본의 대마도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의 유적, 유물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현 낙동강 하구 부근 일대에 구석기 시대의 유적과 신석기 시대 이른 시기의 유적들이 매몰되어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약 10,000년전 무렵이 되면 기후는 계속 따뜻해지고 해수면도 계속 상승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4,100년전 무렵에는 김해평야의 안쪽인 대동면 예안리 유적지 부근 일대까지도 바다였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즉 이 무렵의 바다 범위는 산지·구릉지와, 그에 접하는 선상지(성곡저평야), 평야내 독립 구릉을 제외한 거의 전지역이었으며, 적어도 양산까지가 바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단 이무렵의 해수면 고도에 대해서는 현재와 거의 같았다(0m)는 견해, 현재보다 상당히 높은 7m전후 였다는 견해 등으로 나뉘고 있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김해평야가 온통 바다였던 이 무렵은 고고학의 시대 구분에서는 신석기시대로 불리우며, 이 바다(내만, 즉 고김해만)의 성립을 배경으로 당시 김해 사람들은 해수산의 조개, 어류, 동물 등을 먹거리로 삼는 어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 결과, 김해 각지에는 수가리패총, 범방 죽곡패총, 북정패총, 농소리패총, 금곡동 율리패총 등 신석기시대의 해수산 패총이 생겨나게 되었다.
패총의 조개는 굴류가 주체이며, 꼬막이 많은 것은 당시의 바다 바닥이 실트질 점토인 점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한편, 고김해만의 안쪽에 위치하는 김해 예안리 유적지는 사주에 입지하며, 이 사주가 적어도 신석기시대 후·말기 이전에 형성·육화되었던 사실도 아울러 밝혀졌다.
신석기시대 다음의 청동기시대가 되면 기후는 다시 추워졌고 해수면도 낮아졌으며 바다의 범위도 이전보다 축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를 밝혀줄 조사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금관가야가 성립·전개되는 삼한·삼국시대 무렵에는 다시 김해 평야 각지에 해수산 패총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들 패총에 근접해 만들어진 당시의 무덤에서도 조개를 부장하거나 조개를 무덤바닥 시설에 이용한다던지 어로 관련 도구가 출토되는 등 바다 관련 현상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삼한·삼국시대에도 신석기시대처럼 바다를 무대로 활발한 어로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는 해수면의 재상승과 바다 범위의 확대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단 이 무렵의 해수면고도, 바다의 범위 등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일치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 봉황대유적, 양동리고분군, 부원동패총, 예안리유적 등은 이 시대에 만들어진 유명한 유적들이다.
그런데 7세기 무렵이 되면 고김해만의 안쪽인 예안리 유적지의 부근 일대가 이전까지는 바다였다가 배후습지성 소택지로 전환해 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유적지 일대에서 바다는 물러가게 됨과 동시에 낙동강은 보다 많은 토사를 운반해 퇴적함으로서 마침내 고김해만은 쇠퇴·소멸해가게 되었다. 또 운반 퇴적된 토사로 이루어진 삼각주가 마침내 육화해 현재의 김해평야의 골격이 완성되어 가는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년)에 보이는 낙동강 하류 역화한 김해지역의 모습이 이 무렵의 상황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김해지역이 평야 농업지대로서 본격화하는 것은 이보다 더욱 지난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일제는 쌀의 증산과 수탈을 목적으로 낙동강변에 제방을 쌓고 수로를 정비하고 저습지를 간척해 삼각주를 본격적인 평야농업 지대로 전환시켜온 것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김해평야는 현재와는 상당히 다른 자연 환경적 변천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러한 자연 환경적 변천에 대응해 김해 사람들의 생산활동도 크게 변화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생산활동의 변화는 김해평야에 형성된 유적의 입지와 그 시대적 변천, 출토유물등에 반영되어 왔다. 더욱이 이러한 제상황은 선사·고대의 김해지역을 지탱해 온 생산력의 기반문제, 고대국가로서의 성립과 유지의 메카니즘을 해명해 가는데 간과할 수 없는 많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김해평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고환경의 복원을 위해서는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자연 과학적 조사연구가 시급히 요망된다는 점도 덧붙여 두고 싶다. 아직 김해평야에 대한 자연 과학적인 조사연구는 극히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연구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김해평야의 고환경적 변천과 이와 연동하는 김해의 역사와 문화를 해명하는 것은 실로 요원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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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선사시대란
선사시대(先史時代)란 역사기록(史)에 앞서(先) 존재했던 시대로 문자기록이 없는 시대이다. 김해에 대한 문자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삼국지』의 구야국(狗邪國)과 구야한국(狗邪韓國)이며, 『삼국유사』가락국기에 보이는 대가락(大駕洛)과 가야국(伽耶國)이다. <삼국지>는 3세기 후반 경에 편찬된 중국의 역사서이지만, 다른 기록과 고고학자료에 비추어 볼 때, 기원전후의 시기까지 올라가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고, 고려 문종 30년(1076)에 편찬된 「가락국기(駕洛國記)」는 가락국의 건국을 기원 후 42년으로 전하고 있다.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기원 전후의 시기부터 김해지역의 역사는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하였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김해의 선사시대
김해지역에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은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생각되지만, 김해의 선사시대는 김해지역에 사람들이 집단을 이뤈 흔적이 처음 확인되는 신석기시대부터 김해에 대한 문자기록이 보이기 시작하는 초기철기시대 이전까지로 설정할 수 있다. 김해의 신석기시대는 약 7천∼5천5백년 전으로 기원전 5천년 경부터 기원전후까지 무려 5천년 동안 김해의 선사시대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긴 기간 동안 상세히 나눌만한 시기적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선사시대의 김해인들이 사용했던 도구의 재질에 따라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신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의 교체
김해 지역에서 신석기 문화와 청동기 문화의 교체를 보여주는 확실한 자료는 없다. 한민족의 청동기 문화가 만주의 요녕 지역에서 기원전 12∼10세기 경에 시작되어 남해안 지역에서 기원전 2세기 경에 종말을 고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기원전 12∼10세기는 요녕지역에서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는 시기이니까, 남해안 김해의 청동기 문화는 보다 늦었을 것이다. 충남 부여 송국리 유적과 진주 남강 유적의 기원전 6∼4세기 경의 연대를 참고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김해 지역의 선사 시대는 기원전 25세기부터 기원전 10세기 경까지를 신석기 문화,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까지를 청동기 문화의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사시대의 구분과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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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최초의 김해인 - 신석기시대
김해지역에 사람이 집단을 이뤄 살았던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7천∼5천5백년 전으로, 고조선 이전이다. 부산 강서구 범방동, 김해 장유면 수가리에서 발견된 조개무지(貝塚)는 「최초의 김해인」들이 먹고 버렸던 조가비들이 쌓인 유적이다. 「최초의 김해인」들이 먹고 버렸던 엄청난 조가비들 사이에 함께 버려졌던 여러 생활도구의 파편들도 포함되어 있다. 「최초의 김해인」인 신석기 문화인 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범방패총과 수가리 패총
범방 패총과 수가리 패총에서는 많은 조개류와 함께 돌도끼, 돌칼, 타제석기, 갈돌, 갈판, 숫돌, 토우, 빗살무늬토기, 낚시바늘 등이 출토되었다. 여기에서 출토되는 조가비는 약 40종으로 거의가 바다에서 채집되는 것들이다. 이 일대는 바다 조개를 채집할 수 있는 곳으로 바닷물이 들고나는 갯벌과 같은 지형이었다. 범방 패총의 맨 아래층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무덤에서 어린 아이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약 130cm, 나이 11∼13세로 추정되는 인골은 「범방아이」라 이름 부쳐졌으며 유일하게 남은 최초의 김해인이다.
수가리 사람과 생활
수가리 패총에서 출토되고 있는 석기(石器)는 벌목이나 수렵에 사용되었으며, 바닥이 뾰쪽한 빗살무늬 토기는 해안의 모래 바닥에 손쉽게 세워서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그릇으로 만들어졌다. 낚시바늘은 물고기 잡는데, 가락바퀴는 실을 뽑는데 각각 사용되었다. 최초의 김해인이었던 수가리의 신석기인들은 수렵과 어로로 경제 생활을 영위하였고 본격적인 농경은 아직 몰랐던 사람들이었다. 수가리 패총의 조사에서 두 세 번의 단절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한 곳에 정착했던 생활은 어려웠던 것 같다. 해수면의 상승을 통한 해안선의 변화 등이 원인이 되어 이동 생활을 해야만 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수가리 사람들은 조가비 팔찌와 같은 꾸미개도 만들어 멋을 내기도 했고, 같은 시기의 부산 영도 동삼동 조개무지에서는 얼굴 모양의 조가비도 출토되었다.
최초의 한일교류
「최초의 김해인」들은 이미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열도의 왜인들과 교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가리패총과 비슷한 시기 비슷한 성격의 부산 영도 동삼동 패총과 통영 연대도 패총 등에서는 흑요석과 흑요석으로 만든 화살촉이 출토되고 있다. 흑요석(黑曜石)은 까맣고 반질반질한 화산암으로 화살촉을 만드는데 알맞은 소재로 남해안에서는 나지 않기 때문에 화산이 많은 일본 큐슈북부(九州北部) 사가현(佐賀縣) 코시타케(腰岳)에서 수입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최초의 김해인」이었던 수가리 패총과 같은 신석기인 들은 이미 4000년 전에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열도의 왜인들과의 교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
구간사회(九干社會) - 청동기시대
『삼국유사』가락국기는 수로왕이 김해에 등장하여 가락국을 세웠던 해를 서기 42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수로왕의 등장과 가락국의 탄생 이전에도 김해 지역의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가락국의 건국 신화에서는 구간(九干)이라는 가락의 아홉 촌장들이 구지가(龜旨歌)를 부르며 수로왕을 맞이했다고 되어 있다. 김해 지역에는 수로왕 이전에도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각 집단들은 아홉 촌장에 의해 영도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회를 가락국 성립 이전의 구간사회(九干社會)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구지봉의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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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사회인들이 만들었던 무덤이 김해지역의 고인돌(支石墓)이다. 수로왕이 등장해 가락국을 세우는 때가 기원후 42년이라면, 남해안에서 고인돌이 종말을 고하는 것은 기원전 2세기입니다. 수로왕이 등장하는 구지봉에도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 불리는 고인돌이 있다. 구지봉의 고인돌은 수로왕이 등장하기 150여 년 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따라서 구지봉 고인돌을 비롯한 김해지역의 고인돌은 수로왕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수로왕의 등장을 기원했던 구간사회 사람들이야말로 김해지역의 고인돌을 무덤으로 만들었던 사람들이었다.
청동기문화인
이러한 고인돌이 구지봉에 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남지역에는 무려 2만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고, 김해지역에서도 수십 기 이상 확인되고 있다. 김해시 장유면 중심의 광석(廣石)마을에는 길이 11m 넓이 4m 이상 되는 아주 큰 고인돌이 있고, 그 주변의 고인돌들은 1960년대에 발굴되었다. 대롱 옥(管玉). 간 돌칼(磨製石劍). 좁은 놋 단검(細形銅劍)의 세트가 출토되었다. 이렇게 고인돌에서 청동기는 출토되지만 철기는 아직 출토되지 않았다. 따라서 고인돌은 철기시대 이전의 청동기.문화인들이 조상을 묻기 위한 무덤이었던 것이다.
가락의 아홉 촌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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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지역에서 최초의 무덤인 고인돌을 만든 청동기 문화인이 구간사회 사람들이었다. 김해 지역의 고인돌은 1972년까지의 김해시 11개면 중 대저면과 가락면을 제외한 9개면에 균등하게 퍼져 있고 각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큰 차이가 없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이 각각 지금의 1개면 지역을 영도하였고 그 흔적으로 남은 것이 시내·주촌·장유·진영·진례·생림·한림·대동·상동지역의 고인돌과 청동기문화였다.
가락구촌(駕洛九村) 연합
구간사회의 가락구촌은 수로왕을 맞이할 때 보이는 것과 같이 해반천에서 목욕재계하고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龜旨歌)를 부르며 풍요를 기원하던 축제를 함께 벌였고, 인근 지역과의 전쟁을 공동으로 치러 냈던 부족연합의 사회였다. 구지가는 다음 시대 가락국의 성립으로 가락국 건국 신화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지만, 원래는 9개면 지역 가락구촌의 부족연합의 축제에서 불려지던 신성한 주술의 노래였다. 원래는 수로(首露)의 등장을 기원하는 “머리(首)를 내어라”가 아니라 지금은 평야로 변한 옛 김해만에서 보다 많은 생선과 조개가 잡히도록 해신(海神)의 사자(使者)인 거북이를 위협하면서 주술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김해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패총 유적에 쌓여진 수많은 조가비와 해산물들은 이러한 전통을 보여주는 흔적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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