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172 : 신라의 역사 71 (제51대 진성여왕) 본문
한국의 역사 172 : 신라의 역사 71 (제51대 진성여왕)
-후삼국 시대 : 제51대 진성여왕에서 제56대 경순왕까지-
제51대 진성여왕
진성여왕(眞聖女王, ?~897년, 재위:887년~897년)은 신라의 제51대 여왕이다. 성은 김, 휘는 만(曼) 또는 원(垣)이다. 경문왕과 문의왕후 김씨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생애
진성여왕은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소생이다. 정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음력 7월에 왕위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소행이 좋지 못하고 음란하기 그지없었던 진성여왕은 색욕에 빠져 수많은 미소년들을 징집하여 처소로 불러들인 뒤 음사를 즐기는 데에만 주력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왕과 관계를 맺은 정부들과 여왕에게 아첨하는 간신들의 무리가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상벌이 함부로 행해지고, 뇌물이 난무하고, 관직을 매수하는 등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왕실과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자연스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데다가 여왕의 심한 낭비로 국고가 텅텅 비어 각 지방의 호족들을 닦달하여 세금 납세를 독촉하였다.
그러자 민심은 점차 흉흉해져 여기저기서 민란과 도적이 숱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의 호족들은 각자 독자적 세력을 키우는 데 전념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들을 도적이라고 부르며 군대를 파견해 진압을 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뒤로 조정의 힘은 겨우 수도인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히 쇠락해갔으며, 지방 호족들은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 치열한 싸움 끝에 살아남은 견훤과 궁예가 각자 나라를 세우자 후삼국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이렇듯 나라가 분열해가자 894년 진성여왕은 최치원을 아찬으로 임명하여 그의 조언에 따라 조정을 일신하고자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897년 음력 6월, 병마에 시달리던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서자(庶子)인 요를 왕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고는 그해 음력 12월에 승하하였다.
각간 위홍과 대구화상에게 《삼대목》을 편찬케 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참고
.
신라의 역대 국왕 | |
---|---|
신라 상대 (기원전 57년 - 654년) |
혁거세 거서간 · 남해 차차웅 · 유리 이사금 · 탈해 이사금 · 파사 이사금 · 지마 이사금 · 일성 이사금 · 아달라 이사금 · 벌휴 이사금 · 내해 이사금 · 조분 이사금 · 첨해 이사금 · 미추 이사금 · 유례 이사금 · 기림 이사금 · 흘해 이사금 · 내물 마립간 · 실성 마립간 · 눌지 마립간 · 자비 마립간 · 소지 마립간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신라 중대 (654년 - 780년) |
태종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 |
신라 하대 (780년 - 935년) |
선덕왕 · 원성왕 · 소성왕 · 애장왕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민애왕 · 신무왕 · 문성왕 · 헌안왕 · 경문왕 ·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 신덕왕 · 경명왕 · 경애왕 · 경순왕 |
제51대 진성여왕 실록
( ? ~ 서기 897년, 재위기간 : 서기 887년 3월~ 897년 6월, 9년 11개월)
1. 타락한 진성왕과 무너지는 천년 왕국 신라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딸이며, 문의 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만이다. 헌강왕이 후계자 없이 죽자 정강왕이 왕위를 이었으나, 그 또한 재위 1년 만에 죽었다.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887년 7월 그녀가 왕위에 올랐으니, 선덕과 진덕에 이어 신라 왕조에서 세 번째 여왕이다.
진성왕이 즉위 할 무렵, 신라 사회는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체제가 와해되는 형국이었다. 비록 헌강왕 시절에 일시적으로 태평성대를 구가하기는 했으나, 그 이전에 이미 지방 호족 세력이 너무 성장하여 조정의 힘은 미약해지고,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822년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으로 큰 혼란을 겪은 신라 사회는 그 이후 연이어 벌어진 왕위 다툼으로 왕실의 권위가 무너졌다. 더구나 장보고와 같은 거대 해상 세력이 등장하여 왕을 갈아치우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조정의 통제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경문왕과 헌강왕은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 기강을 다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헌강왕이 후계자를 제대로 정하지도 못하고 죽고, 이어 즉위한 정강왕마저 병상에 누워 정사를 챙기지도 못하는 바람에 지방에 대한 신라 조정의 통제력은 점차 마비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성왕이 등극하였다. 여왕의 즉위는 백성들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지방 세력의 힘을 강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진성왕은 색욕에 눈이 멀어 정사를 뒷전으로 밀어놓았다. 이런 탓에 일부 측근들과 왕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사태로 치달았다.
진성왕이 왕위에 앉아 있긴 했으나, 실제로 왕권을 행사한 인물은 각간 위홍이었다. 경문왕의 동생이자 진성왕의 숙부인 그는 왕의 남편이기도 했다. 진성왕은 그에게 정사를 맡겨, 국가 대사를 주관하도록 했는데, 불행히도 위홍은 진성왕 즉위 이듬해인 888년 2월에 죽고 말았다.
위홍이 죽자, 지도력을 상실한 조정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거기다 위홍의 죽음으로 심한 자괴감에 빠진 진성왕은 젊은 남자들을 침실로 불러들여 음사를 즐기는 데 열중했다. 진성왕이 색욕에 빠져 들도록 부추긴 인물은 유모였던 부호부인이었다. 그녀는 젊은 남자들을 여왕에게 붙여 주고, 왕이 그들과 황음에 빠져 있는 사이에 권력을 독점하였다. 또한 왕과 관계한 자들은 왕의 총애를 믿고 세도를 부렸다. 이렇게 되자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신하들은 정사를 제대로 돌 볼 수 없었다. 상벌이 함부로 행해지고, 관직이 돈에 팔리고, 뇌물이 난무했다.
그 무렵, 누군가 서라벌 관청 거리에서 조정과 왕을 비방하는 방을 붙였다. 진성왕은 방을 붙인 범인을 색출하라고 노발대발했지만,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러자 한 신하가 왕에게 말했다.
" 이번 일은 필시 문인으로서 뜻을 펼치지 못한 자의 소행이니, 아마도 대야주에 숨어 사는 거인이란 자가 한 짓이 아닌가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진성왕은 앞뒤도 따져보지도 않고, 거인을 잡아들이라 했다. 거인의 성은 왕씨로 대야주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당대의 존경받는 학자였다. 그는 졸지에 도성으로 압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거인은 자신이 당한 일이 분하고 시절이 원망스러워 감옥 벽에 이런 글을 썼다.
"우공이 통곡하니 삼 년이라 가물었고,
추연이 슬퍼하니 오월에도 서리내렸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은 옛일과 같건만,
하늘은 말도 없이 창창하기만 하구나."
이 시에 언급된 우공은 중국 전국 시대 연나라 태자이며, 추연 역시 전국 시대 제나라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시절을 한탄하며 하늘을 움직인 인물로 유명했다. 거인은 그들의 일을 인용하여 자신의 애끓는 심정을 토로했던 것이다.
거인이 그런 시로 하늘을 원망하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쏟아졌다. 하늘이 거인의 한탄에 감응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진성왕은 겁먹은 얼굴로 거인을 석방시켰다.
이 사건 이후, 진성왕은 갑자기 병이 들어 않아 누웠다. 백성들이 추앙하는 대학자를 고문한 죄책감과 하늘에 대한 두려움이 병을 유발했다. 그래서 진성왕은 사형수 이외의 죄수들을 대거 석방하고, 승려 60여 명에게 도첩을 내리는 것으로 속죄하여 마음의 병을 고쳤다.
이렇듯 조정이 엉망으로 돌아가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게다가 국고도 완전히 비어 버렸고, 통제력을 상실한 조정에 굳이 세금을 바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지방의 호족들이 납세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급한 나머지 진성왕은 각 지역에 사신을 파견하여 납세를 독촉하였다. 이에 지방 관리들은 백성들을 심하게 닦달하였다. 그러자 민심은 점점 흉흉해져 지방마다 도적들이 떼를 지어 설치고 다녔으며 급기야 889년에 사벌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사벌의 농민 봉기를 주도한 인물은 원종, 애노, 아자개 등이었다. 그들은 사벌의 군주 우연을 죽이고, 사벌성을 장악하였다. 진성왕은 나마 영기에게 군대를 주어 농민군을 진압하게 했으나, 영기는 농민군의 기세에 눌려 진군하지 못하였다. 그 소식을 접한 진성왕은 영기를 참수하고, 사벌 군주의 아들을 군주로 삼아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농민군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신라 조정이 사벌 농민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자,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전국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이 잇따랐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 호족들이 힘을 형성하여 우후죽순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사벌의 아자개, 죽주(안성)의 기훤, 청주의 청길, 북원(원주)의 양길, 중원(충주)의 원회 등이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이들은 대개 지방의 호족들로 농민을 선동하여 세력을 형성하여 난을 일으키고, 그 지역의 관아를 장악하는 과정을 통해 군벌로 성장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그들을 모두 도적이라 일컬었다.
이들 이외에 초적의 무리를 형성하여 그야말로 도적질을 일삼는 무리들 중에도 제법 큰 세력을 형성한 경우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붉은 바지를 입고 도적질을 일삼던 적고적이었다.
군벌이라고 일컫는 세력 중에는 비단 이런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정의 힘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관리들마저 군대를 독자적으로 운영하여 지방군벌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다 보니, 조정에서는 반란군을 진압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치하는 수 밖에 없었다. 지방의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군을 진압해야 했지만 지방 관리들이 조정의 명령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많지도 않은 서라벌 경군을 동원해 반란군을 모두 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지방 군벌이 활개 치기 시작한 뒤로 조정의 힘은 겨우 서라벌 주변에 한정될 정도로 급격하게 쇠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자, 지방 군벌들은 한층 세력을 확충하여 서로 간에 힘겨루기 양상을 보였다. 자기들끼리의 힘 싸움 끝에 가장 큰 세력으로 남은 것은 죽주의 기훤과 북원의 양길, 사벌의 아자개 등이었다. 청길, 원회, 신훤 같은 중부 세력은 거의 기훤에게 흡수되었고, 서라벌 주변 세력은 아자개에게 흡수되었다. 또 양길은 서라벌 북동부(지금의 강원도 일대)를 장악했다.
이들 중 서라벌의 토벌군과 가장 치열하게 싸움을 벌인 쪽은 사벌의 아자개 군대였다. 사벌은 원래부터 군사 요충지인 데다가 서라벌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그들이 신라 조정에 가장 위협적인 무리였던 까닭이었다.
아자개의 장남 견훤은 서라벌 서쪽과 남쪽을 휩쓸고 다니며 몇 달 만에 5천 군대를 형성하였고, 백성들에게도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이에 힘입어 견훤은 아버지 아자개 품을 떠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래서 견훤은 마침내 혁명의 의지를 굳히고 군대를 남쪽으로 몰아 무진주(광주)를 장악한 뒤, 스스로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기훤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평소 그의 독단적인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뛰어난 장수 궁예가 청길, 원회, 신훤 등과 결탁하여 같이 양길에게 투항함으로써 기훤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했다. 반면에 양길은 궁예를 앞세워 경북 북부, 충정도, 강원도 동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견훤 못지 않은 무시못할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남쪽으로 진출한 견훤은 892년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후백제)라 칭함으로써 후삼국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견훤의 창업에 자극받은 궁예는 894년 명주(강릉)를 장악하고, 병력 3천 5백을 형성하여 양길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궁예는 강원도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서쪽으로 진출하여 경기도 황해도 지역을 손안에 넣었다.
궁예는 895년 휘하 부장들을 중심으로 관직을 설치하여 창업의 기틀을 다졌다. 896년에는 송악의 호족 왕융을 받아들여 철원의 태수로 봉하고, 주변 세력을 흡수하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서라벌 서남쪽에서는 적조적이 설치고 다녔고, 그들은 주와 현을 도륙하고, 도성의 모량리까지 침입하여 민가를 위협하고 약탈하였다.
이렇듯 나라가 완전히 산산조각 나고 있는 시점에서 진성왕은 894년에 최치원이 상소를 올린 시국에 관한 의견 십여 조목을 받아들였다. 더 나아가 진성왕은 그를 아찬으로 삼아 조정을 일신시키고자 하였다. 895년에는 헌강왕의 서자 요를 태자로 삼아, 왕실의 기강을 다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왕실과 조정은 이미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였다. 거기다 진성왕마저 돌이킬 수 없는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897년 6월 진성왕은 헌강왕의 서자 요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6개월간 병상에 누워 있다가 12월 북궁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황산에 마련되었다.
진성왕은 숙부인 위홍을 남편으로 삼았다. 그녀는 신라 왕녀들의 관습에 따라 세 명까지 남편을 가질 수 있었기에 다른 남편들 이외에도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하였다. 그리고 자식도 몇 명 낳았다. 하지만 진성왕의 자녀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삼국 유사에 그녀의 막내 아들 양패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는 내용이 유력하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173 : 신라의 역사 72 (후삼국시대를 연 두 영웅: 견훤 1) (0) | 2011.03.04 |
---|---|
우면산의 새벽 25 (북한의 붕괴는 올 것인가?) (0) | 2011.03.03 |
북한에 부는 아랍의 혁명 바람 (0) | 2011.03.01 |
한국의 역사 171 : 신라의 역사 70 (제50대 정강왕) (0) | 2011.03.01 |
한국의 역사 170 : 신라의 역사 69 (제49대 헌강왕) (0) | 2011.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