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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73 : 신라의 역사 72 (후삼국시대를 연 두 영웅: 견훤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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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73 : 신라의 역사 72 (후삼국시대를 연 두 영웅: 견훤 1)

두바퀴인생 2011. 3. 4. 10:04

 

 

 

한국의 역사 173 : 신라의 역사 72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견훤 1)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 견훤 1

 

후백제를 세운 견훤(867~936) 1

견훤(甄萱, 867년~936년 음력 9월, 재위: 892년 또는 900년~935년 음력 3월)은 후백제의 시조이다. 아자개와 상원부인의 아들로, 상주(현재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자신의 성을 이씨에서 견씨로 고쳤다. 견훤을 “진훤”이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완산 견씨의 시조.

 

어린 시절

견훤은 상주의 유력 호족가문의 후손으로 추정되나 가계가 알려진 것은 없다. 《삼국유사》에 실린 이제가기의 기록에 따르면, 견훤은 지렁이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도 수록된 다른 전설에 의하면 견훤이 아직 아기였던 시절, 아자개가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어머니는 아자개에게 식사를 갖다 주려고 어린 견훤을 나무 아래 잠시 두었다. 그랬더니 그 사이 호랑이가 나타나 견훤에게 젖을 먹였다고 한다. 견훤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인 남원부인과 좋지 않은 관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본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사> 본전에 적힌 견훤의 출생에 관한 내용을 이렇게 옮겨 놓았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요, 함통(당나라 의종의 연호) 8년 정해(867년)에 났으니, 본래의 성씨는 이씨였는데, 뒤에 견을 성으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이니 농사로 생활을 하다가 광계(당나라 희종의 연호) 연간에 사불성(사벌, 상주)에 자리 잡고 자칭 장군이라고 하였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바, 특히 훤의 이름은 유달리 유명하고 지혜와 책략이 많았다.

 

이후 장성하여 군에 들어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는 서남해에 배정되었다. 창을 베개삼아 적을 기다리는 그의 용맹은 특출했고, 곧 그 자질을 인정받아 비장이 되었다.

 

농부로 살던 아자개의 장남으로 태어난 견훤은 체격이 건장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삼국사기에는 그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견훤은 자라서는 채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생각과 기풍이 활달하고 비범하였다. 그가 종군하여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쪽 해변으로 가서 수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잘 때에도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는 용기가 있어 항상 다른 군사들보다 앞장섰으며, 이러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태조 왕건에서 견훤역의 서인석씨

 

건국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혼란이 극에 달하던 892년(진성여왕 6년)에 봉기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서남쪽의 주현(州縣)으로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메아리쳐 호응하여 그 무리가 달포 사이에 5,000여 명에 달하였다.''

비장으로 지내던 견훤은 아자개가 상주성을 장악하고 군별을 형성하자 상주로 돌아와 아버지를 돕는다. 그러나 이내 경주 주변에서 많은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보다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890년에는 무려 5천을 이끌고 무진주(전남 광주)로 내려가 왕이 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신라서면 도통 지후 병마 제치 지철 도독 전무공 등 주군사 행 전주 자사겸 어사 중승 상주국 한남국 개국공 식읍 2천 호'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892년에 완산주에 도읍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스물여섯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양길에게 궁예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양길에게 비장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이어 900년(효공왕 4년)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하고,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드러내고자 순행을 떠나 완산주에 이르자 주민들이 크게 환영하였다. 완산주(전주)에서 견훤은 오래된 백제 의자왕의 울분을 씻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이때 비로소 견훤은 백제왕을 칭하였고, 연호를 정개(政開)라고 정하였으며, 자신이 세운 나라의 제도와 관직을 정비하였으며, 중국 강남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 관계를 맺었다. 견훤의 발언에서 당시 신라가 백제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 수 있다. 백제인들에게 신라는 정통성 있는 지배자가 아니라 정복자였고, 따라서 백제를 재건하고 신라를 쳐 없애 분을 풀어야만 한다는 방식의 사고가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개국 이후 견훤은 날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궁예가 나라를 세우던 901년까지는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하지만 903년에 왕건에게 나주를 빼앗기고, 905년 궁예가 충청도에서 평안도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면서 궁예의 세력이 더 커졌다.

 

이듬해에는 대야성(합천)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03년에는 금성(현재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왕건의 수군 기습에 의해 빼앗겼다. 906년에는 상주의 사화진 일대에서 왕건과 싸워 패전하였다. 다시 909년에서 91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에는 왕건나주를 놓고 해상과 육상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나 결국 패전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912년에는 견훤이 궁예덕진포(德津浦)에서 싸웠다고 한다. 이 전투의 승패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특히 918년에는 그들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918년 9월 견훤은 예상치 못한 사건에 직면한다. 상주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아버지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순해 버린 것이다. 견훤은 세력을 확대하면서 아버지 아자개와 심한 갈등을 겪었다. 아마도 견훤과 이복 동생들 사이에 벌어진 세력 다툼이 원인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같은해 왕건이 반란을 일으켜 태봉을 무너뜨리고 고려를 개국하자, 태봉에 속해 있던 공주와 홍성, 청주 일부 지역이 귀순해 옴에 따라 견훤의 세력이 고려를 압도하게 되었다. 특히 충청, 경북, 강원 동부 지역의 성주들이 대거 왕건에 반발했다. 군사적 요충지인 상주도 예외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견훤의 이복 동생들은 백제의 견훤 치하로 들어가기를 거부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때문에 견훤은 무력으로 상주를 장악하려 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이복 동생들이 전사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아자개가 친아들인 견훤에게 등을 돌리고 왕건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그에 대한 증오심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궁예와 마찬가지로 견훤도 부모 형제 복은 없었던 모양이다. 

 

<이제가기>에 따르면 아자개는 두 아내에게서 견훤을 비롯하여 능애, 용개, 보개, 소개 등 다섯 명의 아들을 얻었다. 견훤만 첯째 부인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둘째 부인 소생이었다.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 아자개가 견훤 편을 들지 않고, 왕건에게 귀순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어쨌던 918년 9월 갑오일에 왕건은 아자개를 맞아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하였다. 아자개를 맞아들이기 위해, 심지어 문무백관들이 모여 그 의례를 연습까지 했다. 그 연습장에서 광평낭중 유문율과 직성관 주선길이 자리를 다투다 왕건에게 꾸지람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왕건이 아자개 환영 행사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만하다.

 

아자개가 왕건 품에 안겼다고 해서 위축될 견훤이 아니었다. 오히려 꾸준히 세력을 확대하여 통일의 꿈을 일궈 나갔다. 그런 그의 대범한 면모는 고려 개국 후부터 신검의 왕위 찬탈 사건이 벌어질 때까지 백제가 줄곧 국력 면에서 고려보다 우위를 점하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후삼국

궁예의 후고구려, 왕건의 고려와도 수시로 충돌하였으며, 군사적 우위를 유지했다. 왕건과의 본격적인 전쟁은 927년부터 934년 사이에 벌어졌다.

 

926년 신라 수도 경주(慶州)를 함락하여 친려(親麗) 정책을 취하던 경애왕(景哀王)을 죽게 한 후 김부(金傅)를 왕으로 삼고 철수, 신라인의 원한을 샀다. 929년 고창(古昌)에서 왕건군에게 패전한 후부터 차차 형세가 기울어져 유능한 신하들이 왕건에게 투항, 934년 웅진(雄津)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귀순했다.

 

왕건과의 갈등

918년 태봉에서 왕건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고 나라의 이름을 고려로 바꾸자, 축하 사절을 보내어 공작선과 지리산 대나무 화살로 선물을 삼아 왕건에게 주었다.

 

태봉 말기에 이흔암이 공격, 점령하고 있었던 웅주는 이흔암이 왕건의 반란으로 인해 철원으로 상경하자 백제에 항복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해 음력 9월 상주의 반란군 수령인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阿字蓋)가 왕건에게 항복하였고, 왕건은 이 인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친히 항복을 받아들이는 의식을 집전하기 위해 정전 뜰에서 의례를 연습하다가 의례를 어긴 자들을 귀양보내기도 하였다. 이 정도로 아자개라는 인물을 후대하였으므로 이 아자개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라는 설이 유력하다.

 

920년에는 대야성을 드디어 함락시켰다. 곧 진례성(청도군)으로 진격하였으나 신라가 고려에게 구원을 청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견훤은 퇴각하였다.

 

924년 음력 7월에는 아들 수미강을 보내어 대야, 문소(의성) 두 성의 군사로 조물성(김천시 조마)을 공격하게 했으나, 조물성 사람들이 태조를 위해 성을 굳게 지켜 함락하지 못하였다.

 

음력 8월엔 절영도의 준마를 태조에게 보냈으나, 나중에 이 준마와 관련한 도참을 듣고 돌려받는다. 이듬해 음력 10월엔 기병 3000으로 조물성을 내습하였고 왕건은 반격에 나섰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매우 유리했던 것 같다. 왕건은 참패를 면하고자 화친을 청하며 인질로 사촌 아우 왕신을 보내었고, 때마침 왕건에게 유금필군이 합류하자 그의 용맹함과 강병을 두려워한 견훤도 이에 응해 외조카 진호를 볼모로 보내었다.

 

곧이어 음력 12월 거창 등 신라의 20여 성을 공격하여 취하였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어 입조하였다. 후당은 백제왕의 관작을 봉해주었다.

 

926년 음력 4월 고려에 볼모로 보낸 조카가 급사하였다.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왕신을 죽이고 웅진 방면에서 진격하였다. 왕건이 웅진 방면의 성주들에게 성을 고수할 것을 명하여 견훤은 웅진 방면에서는 큰 소득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전투에 앞서 견훤은 앞서 보낸 절영도의 총마를 돌려달라고 고려에 요구하였다. 이는 견훤이 “절영도의 명마가 고려에 가면 백제가 멸망한다”는 도참을 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궁예나 왕건만큼은 아니지만 견훤 역시 도참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산동수 전투까지

왕건과 견훤의 패권다툼은 상대의 강세지역에서 비효율적인 공성전을 펼치는 것보다는 이미 군사적으로 약화된 구 신라권역을 차지함으로써 전력의 우위를 확보하려 노력하였기에 신라지역에서 격돌하게 되었다.

 

그래서 927년에는 고려와 백제 사이의 전쟁이 매우 치열하였다. 고려는 음력 1월 용주를 공격, 왕건이 친히 항복받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이 승리 이후 전쟁의 전반부에선 고려가 우세하였다.

 

음력 3월엔 운주의 성주 긍준을 왕건의 고려군이 격파하였다. 같은 달 상주 일대의 근품성을 고려군이 함락시켰다.

 

음력 4월에는 고려의 수군 장군 영창, 능식이 강주(현재 진주)를 공격하기 위해 남해안에 상륙하였으며, 전이산, 노포평, 서산, 돌산를 공격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서쪽 전선에서는 왕건이 웅주를 공격하였으나 공성에 실패하였다.

 

음력 7월에는 대야성에서 고려의 장수 재충, 김락이 성을 함락하고 장군 추허조 등을 포로로 삼았다. 강주의 북쪽인 대야성이 함락되어 고려에서 강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된 음력 8월에는 왕건이 강주를 순행하였다고 한다. 순행을 틈타 고사갈이성 성주 흥달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는 등 백제의 부근 성주들이 상당수 투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음력 9월엔 전황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우선 근품성을 함락, 파괴하였는데 이는 강주에 이르기까지 남쪽으로 길게 늘어진 고려군의 허리를 끊는 작전으로 보인다. 곧이어 고울부을 함락하자 신라왕은 연식을 보내어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건은 시중 공훤 등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견훤은 단숨에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단숨에 들이닥쳐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서는 경애왕을 협박, 자살케 했으며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하게 하였고 부하들에게 궁녀들을 간음케 하였으며 병사들에게 약탈을 마음대로 하라고 명하였고 장인들과 병기, 보배들을 또한 약탈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견훤은 왕의 외종제인 김부를 새 왕으로 임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크게 노하여 기병 5천을 이끌고 공산동수 지역에서 견훤과 대회전을 펼쳤다. 왕건측의 병력은 앞서 보낸 1만명에 이들 5천을 더해 1만 5천은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견훤측은 대승리를 거두었고, 신숭겸이 왕건으로 변장하여 대신 죽게 할 정도로 왕건을 참패시킬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신숭겸, 김락 등 고려의 여덟 장수가 백제군에게 죽어 지역의 지명이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바뀌었다 하며, 주변 지명엔 왕건의 다급한 상황을 전해주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전투를 공산전투 혹은 동수대전이라고 한다. 이 대승리를 통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견훤은 같은 달 대목군을 탈취하고 곡식을 불사르거나 거두어갔다. 소목군에도 역시 마찬가지 일을 다음 달에 행하였다. 음력 10월에서 음력 11월 사이에는 완강히 고려를 지지하던 벽진군을 공격하였고, 벽진군을 함락시켰다는 기사는 없으나 장군 색상이 전사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벽진군의 군사적 능력은 거의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다시금 경주로 가는 길이 확보되었고, 또한 남으로 강주까지 늘어진 고려군의 허리는 잘리게 되었다.

 

최승우가 언제 봉직하였는지는, 그리고 이외에 어떤 활동을 백제를 위해 했는지는 기록에 명확히 나타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 시기에 백제에 봉직하였던 것은 확실하며, 따라서 신라에 대한 강경한 정책은 6두품 출신으로 백제에 봉직할 정도로 신라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최승우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견훤의 패권과 그 붕괴

이렇게 이어진 일련의 군사 행동을 통해 왕건이 직접 순행하여 고려의 영토로 만들었던 강주는 고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928년 정월엔 강주를 구하러 가던 고려의 원윤 김상, 정조 직량 등이 초팔성(합천 초계)의 성주 흥종에게 공격받아 전사했으며, 음력 5월엔 강주 원보, 진경 등이 고자군에 양곡을 운반하러 간 사이에 견훤이 강주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진경은 패배하였고 장군 유문 등은 항복하였다고 한다. 한편 정월에는 왕건이 장문의 편지로 견훤의 편지에 답하였다. 강경한 전투 의지가 담겨 있는 서찰이었다.

 

강주는 고립되었고 928년 음력 5월엔 결국 무력화되었으므로 왕건은 공격 방면을 전환하려 시도하였다. 음력 4월에 왕건은 탕정군(아산)으로 진출하였으며, 음력 7월 삼년산성(보은)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패배하였고, 청주로 퇴각하였다.

 

이처럼 서부전선의 대치 상황은 매우 견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음력 8월엔 충주로 이동하여 다시 경상도 일대의 전선을 노리기 시작하였으며, 견훤도 이에 대응하여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왕건은 왕충으로 하여금 관흔을 쫒아내게 했으나, 관흔은 퇴각하여 대야성을 다시 확보하였고 대목군의 벼를 베었으며 죽령 인근의 오어곡에 군사를 주둔시켜 죽령을 봉쇄하였다.

 

이에 왕건은 왕충 등에게 명해 조물성 일대 정찰을 명한다. 음력 10월에는 무곡성(군위 악계)를 함락시켰다. 음력 11월에는 견훤이 정병으로 부곡성(군위군 의흥)을 공격, 함락하고 고려 병졸 1천 명을 죽였다. 같은 시기에 장군 양지와 명식 등 6인이 항복해왔다.

 

경상도 일대에서도 왕건이 함부로 진격할 수 없게끔 한 견훤은 경상도 일대의 친 고려 호족들을 토벌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서부에서도 고려에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서부전선에서 견훤은 김훤, 애식, 한장 등에게 청주를 침공하게끔 하였으나 유금필에게 패퇴당했다. 이 예에서도 서부전선은 매우 뚜렷하게 백제와 고려의 세력이 대치하고 있었던 지점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하지만 유금필 열전에 따르면 이 해에 나주를 백제가 다시 찾은 것으로 보인다.

 

동부전선에선, 929년 음력 7월에 견훤이 친히 5천의 병력으로 의성부를 침공, 성주 홍술을 죽였다. 음력 10월엔 가은현(문경시 가은)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음력 12월에는 대군으로 고창군(안동)을 포위하였다. 그해 음력 9월에 영주를 방문하는 등 경상도 일대에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왕건도 고창을 구원하기 위해 대군으로 출정하였다.

 

930년 정월에 왕건은 병산에,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여 대치하였다. 대회전이 있었고, 이 회전에서 견훤은 대패하여 전사자만 8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유금필이 저수봉으로부터 내려와 분투하여 고려군이 대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튿날 잔병으로 견훤은 순주성(안동 풍산)을 공격하였고, 장군 원봉이 도주하자 백성을 거두어 완산주로 퇴각하였다. 이 패배로 견훤은 경상도 일대에서의 패권을 급속히 상실하게 된다.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930년에 대거 고려로 돌아서게 되며, 신라 또한 931년에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였다.

 

이후 견훤은 다시는 경상도 전역에 대해서 결코 패권을 확보하지 못한다. 심지어 경주 주둔 당시에는 약탈을 일삼게 했던 견훤의 강경한 조치는 견훤의 즉위시 드러내었던 백제의 원수를 갚겠다던 명분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볼 수도 있었고, 실제로도 신라와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에게 수많은 군사적 토벌이 감행되었으므로 견훤은 명분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경상도의 호족들과 신라에 크게 거부감을 가지게 만든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견훤이 신라에서 인심을 잃은 것은 후삼국시대 패권경쟁에서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다. 신라출신인 그가 왜 고려출신인 왕건보다 신라인들에게 가혹했고 끝내 인심을 잃었는지는 중요한 역사적 연구소재이다. 신라귀족들에게 푸대접을 받은 개인적인 특별한 사연이 있었는지, 백제인들의 신임을 얻고자 의도적으로 신라인들에게 가혹했는지 살펴봐야할 문제이다.

 

여기에 서부전선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매곡성(청원)의 성주이자 견훤의 심복이었던 공직이 932년 고려에 투항하였다. 이에 따라 서부전선에서도 백제는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저력은 남아 있어서, 음력 9월에는 일길찬 상귀를 시켜 수군으로 고려의 염주, 백주, 정주의 수군을 궤멸시키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필을 약탈하게 하였다. 음력 10월엔 해군 장군 상애를 시켜 대우도(평북 용천)를 침략하였고, 대광 만세를 패퇴시켰다. 백제 수군은 당시 곡도로 귀양와있던 유금필에게 몇몇 지점에서 저지당했던 것 같다.

 

다시금 위세를 얻은 백제군은 933년엔 신검을 통군으로 하여 신라를 위협하였는데, 이 군대는 신라에 위협을 가하기는 커녕 유금필에게 돌파당하여 소수의 유금필군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견훤이 주도한 최후의 전투는 934년 음력 9월 운주(홍성)전투다. 왕건이 운주로 진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견훤은 갑사 5천 명으로 운주로 진군하여 왕건에게 화의를 신청하였다. 위세를 보여 백제가 힘을 회복할 시간을 벌고자 하는 계책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유금필

오늘의 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염려마시고 저희들이 적을 격파하는 것이나 보십시오!

라며 아직 대오가 정돈되지 않은 견훤군에게 용맹한 기병 수천으로 돌격, 술사 종훈, 의사 훈겸,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전장 부근의 웅진에 속한 30개 성들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백제의 패권은 옛 백제의 영토였던 웅주 일대에서도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