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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74 : 신라의 역사 73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견훤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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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74 : 신라의 역사 73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견훤 2)

두바퀴인생 2011. 3. 5. 05:04

 

 

 

한국의 역사 174 : 신라의 역사 73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견훤 2)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 견훤 2

 

후백제를 세운 견훤(867~936) 2 

신검의 정변

935년 음력 3월 완산주에서는 정변이 일어난다. 주도자는 장자 신검이었다.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빼어나자 후계자로 삼아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맏아들로 군무에 경험이 많던 신검, 그리고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역시 군무에 경험이 많던 것으로 보이던 양검·용검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때 차자와 삼자인 양검과 용검은 각각 강주 도독과 무주 도독으로서 군을 이끌고 있었고 신검만이 완산주에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양검 및 용검과 음모를 꾸며 군을 움직였고, 이어 파진찬 신덕 및 영순과 더불어 능환은 신검에게 견훤을 김제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살해할 것을 권하였다. 그대로 시행되어 이때 금강은 형들의 손에 의해 살해되고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 신검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쿠데타 세력의 정당성을 밝히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적어도 조서의 효력은 반란을 일으킨 지 6개월 이후인 음력 10월 17일에 발효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신검 일파가 국내를 장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견훤이 창업주로서의 권위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 이 조서에서도 또한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이 권위가 무능력해졌다는 것이 신검측의 주장이었으나, 그렇지 않다는 점이 차후의 사건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한편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왕위 계승 문제 뿐만 아니라, 이후 견훤의 행보를 볼 때 고려와 강화를 하거나 항복을 하자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근왕파와 계속 전쟁을 하자는 강경파 사이의 대립이 이 정변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이는 견훤의 발언에도 근거를 두고 있다.

늙은 아비가 신라 말년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군사가 북쪽의 고려군보다 배나 많은데도 오히려 불리하니, 이는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 그러니 어떻게 북쪽 왕에게 귀순하여 목숨을 건지지 않겠는가?
 
— 견훤(936년 정월), 《삼국유사

라고 아들들에게 발언하였으나, 신검, 양검, 용검은 모두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미 935년 음력 6월에 백제를 떠났던 견훤이 시기상 할 수 없는 발언이고, 신검의 정변 이전에 고려에 항복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역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으나, 934년 이후 견훤이 통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고려 망명과 신검 토벌

그런데 이 조서가 효력을 지니기 이전인 935년 음력 6월에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도주, 고려로 망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 해에 유금필이 나주를 다시 점령하였는데, 이것이 견훤의 도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 것 같다. 유금필과 왕만세 등이 수군을 이끌고 견훤의 망명을 도왔다. 송악에 도착하자 왕건은 자신이 견훤보다 10여 세가 어리다고 하여 견훤을 상보(尙父)로 불렀으며, 남궁을 주었고 직위를 백관 위에 두었고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으며 그보다 먼저 항복해온 신강을 그 아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견훤의 망명은 후백제를 붕괴로 이끄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어 936년 음력 2월에는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가 내응할 뜻을 밝혀왔다. 936년 음력 6월에는 견훤이 직접

老臣(노신)이 殿下(전하)께 몸을 의탁한 것은 殿下(전하)의 威勢(위세)에 의지하여 逆子(역자)를 誅(주)하기 위하여서 입니다. 바라건대 大王(대왕)께서는 神兵(신병)을 내어 亂賊(난적)을 殲滅(섬멸)하게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라고 말하여 후백제 정벌을 왕건에게 요청하였고, 왕건은 왕무와 박술희로 하여금 천안부로 1만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936년 음력 9월, 왕건은 3군을 이끌고 천안부로 나아가 군을 합쳤으며 내쳐 일리천(선산)으로 나아가 신검과 대치하였다. 진격까지 세 달이 걸린 것은 왕건이 특별히 전국 각지에서 대군을 징집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왕건이 동원한 군세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총 10만 7천 5백 명 또는 총 8만 6천 8백 명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왕건과 함께 전군을 사열했으나 전투에 앞장섰다는 내용은 없으며, 《고려사》에는 기병 1만을 친히 견훤이 이끌었다고 되어 있다. 고려의 군세가 엄정한 것을 본 백제의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이 병기를 던지고 진 앞또는 견훤 앞에 항복하였고, 이로 인해 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던 것 같다.

 

왕건은 장군 공훤에게 명해 백제 장수들이 원수 신검이 있다고 말한 중군으로 전 군을 돌격하게 하였다. 한 차례 싸움에 백제군은 크게 패하였고, "적장 흔강(昕康), 견달(見達), 은술(殷述), 금식(今式), 우봉(又奉) 등을 비롯하여 3천 2백 명을 사로잡고 5천 7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군기가 문란해진 "적들은 창끝을 돌려 저희들끼리 서로 공격하였다." 백제군은 황산으로 퇴각하였으나 고려군은 재빠르게 기동하여 탄현을 너머 마성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이에 신검은 청주(강주)도독 양검, 무주도독 용검 및 문무 신료를 대동하고 항복하였다. 왕건은 반란을 주모한 능환을 참수하였고, 포로가 된 병졸들은 모두 풀어주었으며 항복해 온 문무 신료들은 능환을 제외하고는 위로하고 송악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양검/용검은 진주로 귀양보냈다가 조금 뒤에 죽였으며 신검에게는 권유에 의해 왕위를 찬탈하였고 또한 항복해 왔기 때문에 벼슬을 제수했다고 한다(삼형제를 모두 죽였다는 설도 있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 견훤은 우울함에 휩싸여 등창이 매우 심하게 되어 며칠만에 황산(논산)의 한 절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 날짜가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은 《삼국유사》로 936년 음력 9월 9일이라고 하는데, 대 전투가 벌어지고 사후처리까지 마무리 되기에는 9일은 좀 짧은 기간이므로 완전히 신뢰할 만한 기록은 아니다.

 

무덤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산 18번지에 있다.

 

 

견훤에 대한 평가

 

자신의 어버지 아자개가 왕건에게 귀부하였지만 견훤은 그것에 동요되지 않았다. 거기다 중요한 전쟁에는 항상 자기가 직접 나섰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직접 지휘하며 용맹을 떨쳤을 정도로 그의 장수다운 면모는 대단했다.

 

정치적으로도 그는 탁월한 면모를 보였는데, 궁예와 왕건이 권력 다툼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을 때도 그의 백제 정국은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견훤은 이미 즉위 초부터 중앙집권적 권력 체제를 이루었고, 중요한 지역에는 자기 아들이나 사위를 보내 다스리게 함으로써 반란의 여지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전쟁에서는 탁월한 장수로서, 정치에서는 강력한 왕으로서, 견훤은 신하들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지나치게 자기의 힘을 믿었던 것일까? 만년에 그는 적장자인 신검을 태자로 세워야 한다는 신하들의 중론을 무시하고, 넷째인 금강을 태자로 삼으려는 무리한 행동을 강행하고 말았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935년 3월에 신검이 반정을 일으켰고, 그는 금산사에 유폐되는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다.

 

금산사에 유폐된 뒤로 그는 신검과 그 무리에게 이를 갈았을 것이다. 급기야 그런 분노는 그해 6월에 금산사를 빠져나와 나주의 고려군에 투항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왕건에게 투항한 뒤로 견훤은 신검을 응징할 것을 건의했다. 당시 왕건은 때를 더 기다렸다가 신검을 칠 요량이었다. 그러나 견훤의 강력한 요청을 듣고 힘을 얻어 936년 2월 일단의 병력 1만을 천안부에 배치하고, 9월에 8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여 마침내 신검을 무찔렀다.

 

신검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견훤은 지대한 역활을 했다. 견훤은 자신이 직접 정병 1만을 이끌고 전장에 나섰다. 견훤이 선봉에 선 것을 안게 된 백제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이 스스로 싸움을 포기하고 칼날을 돌려 신검을 공격했을 정도였다.

 

견훤의 활약에 힘입어 신검은 제대로 저항도 못 해 보고 무너졌다. 그러나 스스로 일군 나라를 자기 손으로 무너뜨려 왕건에게 안긴 일은 견훤을 몹시 고통스럽게 한 모양이다. 통일 전쟁을 끝낸 며칠 뒤, 그는 황산의 절에서 등창 때문에 일흔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스물이 갓 넘은 나이에 대군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 점으로 봐서, 견훤은 꿈이 원대하고 용맹이 뛰어난 장수로 항상 미래를 계획하는 성품을 지닌 장부였다. 또한 상황에 따라 잘 대처하는 것으로 봐서 임기응변에 능하고, 적을 칠 때는 먼저 적을 안심시킨 다음 치는 것으로 보아 다소 음흉하여 그 속내를 일기 힘든 면이 있었으며, 빠른 시일 안에 중앙집권적인 권력 구조를 형성한 점으로 보아 과단성 있고 남다른 주변 장악력을 소유햇던 게 분명하다. 또 자기 손으로 열었던 후삼국 시대를 스스로 끝내는, 그래서 왕건에게 통일이라는 대업을 선물로 안기는 영웅적인 면모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견훤은 외적으로 보면 장수로서, 또 왕으로서도 아무 흠잡을 데 없었다. 하지만 결국 자식에 대한 사랑과 권력 관계를 구분하지 못해 몰락에 이르렀으니, 결코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여러 부인에게서 십여 명의 아들을 두었다. 적장자인 신검은 왕건의 배려에 따라 멸망 후에도 살아남았으나, 양검과 용검은 처형을 당했다.

 

견훤과 관련하여 강원도 원성에 견훤성이 있고, 상주에도 같은 이름의 산성과 견훤의 영을 모시는 사당이 남아 있다. 영동 황간을 본으로 하는 황간 견씨는 견훤을 시조로 하고 있다.  

 

김부식의 평가

  • 김부식은 견훤열전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여기서 그는 궁예와 견훤을 과도기적 인물 가운데서도 정통성이 부족한 인물로 다루었으며, 특히 신라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여줬다는 점을 그들에 대한 공격 근거로 삼았다.

 

가족 관계

견훤의 후손이 지었다는 이제가기(李啼家記)에서는 견훤은 신라 진흥왕의 후손이라고 전하고 있다. 진흥왕의 후손 가운데 원선의 아들이 아자개라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이러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수록하였다. 고대 한국에서는 甄(견)은 이 아니라 으로 발음 되었으며, 동사강목에도 진훤의 이름 앞 글자의 음이 (眞)이라고 하였다.

 

견훤의 아버지는 성은 이(李)씨, 이름은 아자개이며, 《삼국유사》에 인용된 《이제가기》(李啼家記)에 따르면 장남은 견훤, 차남은 능애(能哀), 삼남은 용개(龍盖), 사남은 보개(寶盖), 오남은 소개(小盖)이며 딸로 대주도금(大主刀金)을 두었다고 한다. 부인은 상원·남원부인의 두 명이며 누가 누구 소생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삼남부터 이름 끝자가 개盖라는 점 때문에, 삼남부터 오남까지는 남원부인의 소생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능애부터 소개까지는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백제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 고려의 장군이라는 의미인지도 불명확하다.

 

《삼국사기》에는 명확한 가족관계가 드러나 있지 않고 10여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전하며, 그 가운데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935년의 내란에 관련된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금강(金剛), 924년 조물성을 공격할 때 군을 이끌었던 수미강(須彌强), 그리고 고려로 함께 망명한 막내 아들 능예(能乂)와 딸 애복(哀福)뿐이다.

 

한편 《이제가기》에는 8남 1녀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삼국유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여러 곳에서 몇 명의 부인을 얻었다는 삼국사기의 언급이 있으며 또한 시대적 정황상 29명의 부인을 두었던 왕건처럼 혼인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이 크지만 부인이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려져있지 않으며, 금산사 유폐 기록에서 고비의 이름이 등장할 뿐이다. 신검, 양검, 용검과 금강이 서로 배다른 형제라는 것은 이름 때문에 행하는 추정이지 다른 증거는 없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이제가기》의 8남 1녀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는 신뢰받고 있지 못하다.

  • 상원부인. 이는 견훤의 제1모친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에, 제1부인을 말하는 일반적인 표현인 것 같다. 이하 9인 모두를 이 소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제가기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
    • 신검(神劍)
    • 겸뇌(謙腦)
    • 용술(龍述)
    • 총지(總智)
    • 종우(宗祐)
    • 알려지지 않음(闕)
    • 위흥(位興)
    • 청구(靑丘)
    • 국대부인(國大夫人), 순천 호족 박영규에게 시집감. 왕건은 이들 부부를 함께 치하하였으므로, 이 칭호는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삼국사기》의 금산사 탈출 장면에서는 애첩 고비(故比)및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이 등장한다. 특히 비록 고비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막내 아들이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말년의 견훤을 위로하기 위해 신검측이 견훤과 함께 있도록 허용한, 견훤이 귀여워하던 인물들이 금산사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고비는 견훤이 말년에 총애하던 애첩이자 장성한 아들을 둘 정도로 오래 전에 결혼을 하였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