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한국의 역사 175 : 신라의 역사 74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궁예) 본문

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75 : 신라의 역사 74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궁예)

두바퀴인생 2011. 3. 6. 03:33

 

 

 

한국의 역사 175 : 신라의 역사 74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궁예)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 궁예

 

태봉을 세운 궁예(857~918년)  

 

궁예(弓裔, 857년?~918년, 재위: 901년 ~ 918년)는 신라의 왕족이며 후고구려(태봉, 마진)의 초대 군주다. 그는 신라 헌안왕(혹은 경문왕)이 후궁을 통해서 얻은 아들이다.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본관은 경주, 법명은 선종(善宗)이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제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생애

삼국사기에 기록된 출생일화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신라의 제47대 국왕 헌안왕 혹은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다고 한다.

 

일관이 아뢰기를 "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 있는 날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장래에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중사를 보내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것은 궁예의 출생과 관련한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이 내용으로는 궁예의 태생 연대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918년 3월에 왕창근이 궁예에게 바친 청동 거울에 새겨진 글귀를 통해 그가 축년에 태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거기서 헌안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857년 생임을 알 수 있다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죽어야 하는 불운한 몸이었다. 단옷날처럼 양기가 겹친 날에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데다가 나면서부터 이가 있었고, 지붕 위에 상서로운 광염마저 생겼다는 것이 그가 죽어야 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실제 그를 죽이고자 한 것은 당시 복잡했던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쨌던 궁예는 유모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된다. 궁예를 죽이도록 명령을 받은 군사가 도착하여 갓난아기의 궁예를 죽이지 못하고, 궁전 아래에 내던져 버렸다. 궁전 아래에서 떨어지는 궁예를 유모가 보고 달려갔지만, 유모의 손가락이 눈에 박혀서 애꾸눈이 되었다. 유모는 궁예와 함께 멀리 도망가 몰래 숨어 살면서 어렵게 궁예를 길렀다고 한다.

 

궁예는 자라면서 다소 불량스럽고 거칠게 행동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유모는 궁예가 10세가 되었을 무렵, 유모는 주위와 말썽을 일으키고만 있는 궁예에게 진짜 신분을 알려주고 출생의 비밀을 알렸다. 유모는 "너는 왕자로서 태어났고, 살해당하는 것이 안되게 생각되어 그래서 너를 목숨을 걷어 길렀는데, 너는 매일 소동을 일으켜 나에게 걱정만 끼치고 있다. 그것이 슬픕니다. 너의 정체가 알려지면 우리는 살해당할 것이다." 라고 했다. 궁예는 울면서 "내가 나쁘다. 더 이상 두 번 다시 어머님에게 걱정을 끼칠 것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집을 나왔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출생에 대한 엄청난 비밀을 간직한 채 궁예는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에 출가를 하여서 법명을 선종(善宗)이라고 하였다. 그의 출가는 불가에 몸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신분이 밝혀져 경문왕에게 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사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궁예는 출가하여 선종이라는 법명을 얻고 장성할 때까지 스님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의 승려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계율에 구애되길 싫어했으며  세상 일에 관심이 많았다. 거기다 유달리 활에 집착하여 궁술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느날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재를 올리려 가는데 까마귀가 뭔가 물고 날아가다가 그의 발 앞에 떨어뜨렸다. 그가 떨어진 물건을 살펴보니 점을 치는 산가지였는데, 그기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다. 그는 그 일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혼자만 알고 지냈다.

 

그 무렵 신라 조정은 오랜 정쟁으로 제 구실을 못했고, 왕은 권위를 잃어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거기다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였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백성이 많아 국고가 텅텅 비었다. 하지만 왕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오히려 심해져 조정에서는 강제로 지방에 세금을 징수했고, 그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그러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도적 떼가 들끓었다. 그럼에도 조정은 힘이 닿지 않아 구경만 했고, 그런 와중에 지방 호족들이 군대를 일으켜 세력을 형성했다.

 

궁예가 승려의 신분을 버리고 반란군에 합류한 것이 이때쯤이다. 삼국사기 진성왕 5년(891년)에 그를 양길 휘하에서 기병 백여 명을 몰고 다니는 장수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궁예는 적어도 진성왕 즉위 초기에 반란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궁예는 반란군에 가담하여 죽주(안성)의 기훤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기훤은 부하들을 잘 품어주지 못하는 권위적인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그런탓에 궁예는 기훤밑에 오래 있지 않았다. 그는 기훤 휘하에 함께 있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함께 양길 밑으로 가 버렸다.  이들이 나중에 청주, 충주, 괴산의 세력가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궁예를 포함한 그들 넷은 기훤 휘하에서 매우 비중 있는 역활을 하였던 모양이다. 그런 그들이 대거 양길 밑으로 가 버린 뒤, 기훤의 이름이 더 이상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기훤은 이때 제거되었거나 자멸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기훤이 오만방자하고 사람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궁예가 양길 휘하로 옮긴 사실을 감안할 때, 양길은 포용력이 넓고 인재를 알아주는 성품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양길 밑으로 들어간 궁예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891년에는 기병 백여 명을 이끈 정도였지만, 894년에는 휘하에 3천 5백 병력을 거느릴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이때부터 그는 부하들을 14개 대오로 편성하는 등 지휘 체계를 확립했다. 김대검, 모험, 장귀평, 장일 등 네 부장이 중추적인 역활을 했다. 이들은 비록 이름밖에 남지 않았지만, 궁예의 성장과 창업에 지대한 역활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후로 궁예는 세력 성장을 지속하여 895년에는 강원 북부 일대와 경기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고, 철원을 도읍으로 삼아 국가 형태를 갖췄다. 896년에는 송악(개성)의 호족인 왕건의 아버지 왕륭을 신하로 맞아들인 것으로 보아 경기 북부와 황해도 일부를 손안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898년에는 패서도(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와 한산주 30여 성을 빼앗고 송악군에 도읍을 정해 국가의 틀을 갖췄다.

 

궁예가 독자적으로 국가를 세우려 하자 양길은 청주, 충주,괴산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힘을 합쳐 궁예를 공격했다. 하지만 오히려 패배하여 무너지자, 궁예는 그 여세를 몰아 양길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수하 셋 부장들도 굴복시키고, 901년 마침내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개국한 뒤로 궁예는 꾸준히 땅을 넓혀 가며 당시 큰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견훤의 후백제와 영토를 다툰다. 그러면서 904년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 바꾸고 905년에는 철원으로 환도했다. 이때 궁예는 관제를 대폭 개혁하여 독창적인 체제를 확립했다.

 

당시 철원은 인구가 부족했기 때문에 궁예는 청주의 민가 일천 호를 이주시켜 도읍을 형성했다. 그리고 911년에는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개칭하고, 연호를 '수덕만세'라고 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궁예와 신하들 사이에 알력이 생긴다. 궁예가 많은 신하들을 죽인 사실로 미루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개혁 정책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907년 당시 당나라가 망하고 많은 유학파 인재들이 귀국하여 동참하게 됨으로써 궁예는 그들을 등에 업고 독단적인 개혁 정책을 시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궁예는 호족들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했다. 호족들은 조직적으로 궁예에게 대항하였고, 궁예는 전횡과 독단으로 맞섰다. 그런 와중에 왕창근의 거울 사건이 발생하여 궁예와 왕건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결국 918년 6월에 궁예는 그토록 믿고 신임했던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었다.

 

궁예의 죽음에 관해서는 '고려사'에서는 그가 도망치다가 배가 고파 남의 논에 들어가 이삭을 잘라 먹다가 부양의 농부에게 피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 삼국사기 인물열전에도 부양의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경명왕 2년 기록에는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쪽 기록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왕건의 무리에게 피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바, 부하에게 피살되었다는 기록이 옳을 것이다.

 

궁예는 여러 행동에서 드러나듯 끊고 맺음이 분명하고, 과감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이 불리할 땐 내심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며, 유리할 땐 가차없이 속내를 드러내고 위용을 과시하는 인물이었다. 자기에게 꼭 필요하고 뛰어난 사람에게는 너그럽고 찬사를 마다하지 않는 반면, 일단 능력 없는 인물이라는 판단이 들면 무섭게 짓밟아 버리는 경향도 있었다. 그는 형세 판단이 빠르며, 모든 일을 빠르게 해내는 능력도 있었고,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는 질긴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성격은 때로는 모가나고 급한 행동으로 드러나,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 몰락에 이르게 되었다.

 

불행한 운명을 안고 태어나 평생 부모 사랑 한번 받아 보지 못한 그는 죽음마저도 불운하여 무덤조차 없다. 그의 시체는 버려져 필시 까마귀밥이 되었을 터이니, 혁명을 꿈꾸던 한 시대의 영웅이자 나라를 세워 20여 년이나 왕으로 있었던 인물의 죽음치고는 참담하고 서글픈 종말이 아닐 수가 없었다.

 

궁예에게는 부인 강씨와 청광, 신광 두 아들이 있었으며, 부인 강씨와 함께 궁예에게 죽음을 당한 두 명의 자식이 더 있었다.

 

태봉의 도읍지였던 철원에는 궁예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궁예가 망할 때 남은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통곡을 했다는 명성산(울음산) 전설과 궁예의 한탄이 서려 있다는 한탄강 전설이 있다. 그 외에도 철원 주변에는 궁예와 관련된 여러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남아 있는 유적으로는 인목명 승양리 성산에 길이가 약 4백 미터쯤 되는 산성이 있고, 내문면 마방리에는 길이가 7백 미터가량 되는 토성이 있다. 북면 원리와 어운면 중강리에 걸쳐 있는 풍천도원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는데, 외성 둘레가 약 6천 미터, 내성 둘레가 약 4백 미터에 이르렀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세달사 출가 이후 행적

           - 891년(진성여왕 5년) : 죽주(竹州)의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

  • 892년(진성여왕 6년) : 북원(北原)의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 893년(진성여왕 7년) : 양길의 신임을 얻은 뒤, 양길의 군사를 거느리고 주천(酒泉:지금의 예천)·내성(奈城:지금의 영월)·어진(지금의 울진) 등을 공략하여 항복 받았다.
  • 894년(진성여왕 8년) : 명주(溟州;江陵)를 점령하면서 강릉지역까지 수중에 넣었다. 그는 여세를 몰아 화천, 철원 등 강원도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궁예의 세력이 이처럼 급성장하자 패서지역(예성강 이북 지역)호 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자진 투항하였다. 이렇게 되자 궁예는 더 이상 양길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드디어 양길과 결별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 896년(진성여왕 10년) : 임진강을 따라 북상하여 당시 송악(松嶽; 지금의 開城)의 호족이었던 왕륭(왕건의 아버지)의 투항을 받았다. 예는 왕륭의 아들 왕건을 철원군 태수로 임명하였다. 그는 왕륭과 왕건 부자의 도움을 얻어 손쉽게 경기북부지역과 서해안 일대를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경기지역 호족들의 경제적 지원에 힘입어 충주지역 일대까지 무력으로 병합하였다. 이때 양길과도 일전을 벌여 승리하고 그의 세력까지 모두 흡수했다.
  • 898년(효공왕 1년) : 송악을 후고구려의 사실상 수도로 삼고, 왕건으로 하여금 양주와 청주(淸州;溫陽) 등 30여 성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 899년(효공왕 2년) : 청주 지방을 점령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 강 유역 전역을 수중에 넣었다. 궁예는 이 과정에서 공이 많은 왕건에게 신라의 최고관직인 아찬 벼슬을 주었다.
  • 901년(효공왕 4년) : 스스로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왕이라 칭했다. 삼국유사 연표에 고려라는 이름으로 건국하였다.
  • 904년(효공왕 7년) :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고 철원을 도읍으로 정한 다음 청주인 1000여 호를 그곳으로 옮겼다.
  • 905년(효공왕 8년) :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또한 평양 성주 금용이 궁예에게 투항하여 왔다.
  • 906년(효공왕 9년) : 완산주(完山州)를 근거로 후백제의 왕이라 칭한 견훤의 군대를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에서 맞아 크게 격파했다.
  • 910년(효공왕 13년) : 왕건으로 하여금 수군으로써 서남 해상을 공략케하여 진도(珍島)와 고이도(皐夷島)를 점령하였다. 궁예는 또 한 왕건으로 하여금 해상부대를 이끌고 또한 금성(錦城; 지금의 羅州)를 빼앗아 견훤을 견제하였다. 이 무렵 궁예의 판도는 남으로는 공주(公州)와 상주, 동북으로는 증성(甑城;安邊), 서북으로는 황해도·평안도까지 이르러 국세를 크게 떨쳤다.
  • 911년(효공왕 14년) :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 (水德萬歲)로 개칭했다. 궁예는 왕건과 더불어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이로써 견훤의 후백제를 후방에서 압박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그는 왕건에게 공로를 높이 인정하여 대아찬 벼슬을 내렸다.
  • 918년(경명왕 1년): 강대해진 호족세력을 견제하려다 부하였던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배현경(裵玄慶) 등의 모의로 호족의 우두머리인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그는 부양(斧壤 :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 삼국사기에는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에서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다. 야사와 전설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따르자면 궁예는 사실 지방 호족들에게 맞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쫒겨났다고도 한다.

 

평가

어떤 역사학자들은 그가 왕비와 두 왕자를 죽인 것은 호족들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서 죽인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반신라 정책에 대해서도 설이 분분하다.

 

고려사 말기의 기록을 신왕조 성립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왜곡하였다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고려 시대에 쓰여진 삼국사기에 기록된 궁예에 관한 모든 사실을 그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의견도 많다. 그 근거로서 왕건이 정권을 탈취한 이후에 몇 년 동안이나 줄지어 일어난 반란, 철저한 궁예파 숙청, 삼국사기의 혹독한 궁예에 대한 표현, 궁예에게 호의적인 기록과 다른 야사를 제시한다.

 

기록에 나타난 '고경문(古鏡文) 사건'의 경우 왕조 교체기의 중국 기록에도 자주 보이는 사건이라 왕건의 정권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후세의 가필이라는 의견이 많다.

 

궁예에 관련된 전설이나 야사로는 왕건에게 쫓긴 궁예의 말년을 슬퍼하여 산새들이 울었다 하여 붙여졌다는 포천 산정호수 인근의 명성산의 전설이 있다. 또한, 철원의 보개산성, 성동리성에는 궁예가 왕건에 맞서 항전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포천, 철원 일대의 지명에 관한 전설로는 패주골은 궁예가 싸움에 패해 달아나서 붙은 이름이고, 궁예와 그의 군사들이 한탄하며 도망쳐서 군탄리가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또한 명성산 주변에는 궁예가 피신해서 이름 붙었다는 개적동굴, 궁예가 왕건의 군사가 쫓아오는 것을 살피던 곳이라 하려 이름 붙여졌다는 망무봉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기록에는 궁예가 완전히 신망을 잃어 미복차림으로 도망 중에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궁예와 왕건이 싸움을 벌였다는 각지의 전설과 야사는 이와 다르다는 점과 후기의 궁예가 기록대로 악독한 폭군이었다면 궁예가 주어가 되는 이런 전승이 현재까지 내려오기가 힘들었을 것을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궁예의 폭정이 몰락의 원인이 아니라 궁예가 점점 불교를 중시하면서 새로운 중세의 사상으로서의 유교적 정치를 추구하였던 개혁적 유학자들이 그에게 이탈하게 된 것이 원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궁예가 성인이라고 칭찬하였던 유학자 최응도 궁예가 불교 중심으로 기울자 궁예를 버리게 된다.

 

제2회 철원역사문화토론회 `궁예, 그리고 DMZ'가 열린 토론회에서 이재범 교수는 이날 “정사류에서 궁예의 이미지는 전제주의적 정치, 도덕적 타락, 직계 존비속 살해 등 전형적인 폭군”이라며 “반면 철원지역의 구비전승에 따르면 궁예는 폭군이라기보다는 자기 부하를 끝까지 아낄 줄 아는 덕장”이라고 말했고, 조인성 교수는 “북한 역사학계에서 궁예와 태봉국은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던 것으로 인식된다”며 “고려 역시 이념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태봉국을 계승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계

  • 왕후 강씨(王后 康氏) - 피살당함
    • 청광(靑光) - 피살당함
    • 신광(神光) - 피살당함
    • 순백(珣白) - 광산 이씨(光山 李氏) 시조인 종금(宗金)의 조상이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