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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70 : 신라의 역사 69 (제49대 헌강왕) 본문
한국의 역사 170 : 신라의 역사 69 (제49대 헌강왕)
제49대 헌강왕
헌강왕(憲康王, ? ~ 886년, 재위: 875년 ~ 886년)은 신라의 제49대 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정(晸)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이다.
생애
당나라에 876년 7월에 사자를 보내고 공납을 행했다.
878년 4월에는 희종으로부터<사시절·개부동의삼사·검교태위·대도독·계림주제군사·신라왕(使侍節・開府儀同三司・検校太尉・大都督・雞林州諸軍事・新羅王)>에게 책봉 되었다. 동년 7월에 사자를 보내려고 했지만, 황소의 난이 일어난 것을 들어서 사자의 파견은 중지했다.
후에 885년 10월이 되고, 황소의 난의 평정 된 것을 축하 하는 사자를 당에 보냈다.
이전, 878년 8월에는 일본으로부터의 사자를 조원전으로 접견한 것, 882년 4월에는 일본왕이 황금 300량과 명주 10개를 진상하는 사자를 파견해 온 것을 「삼국사기」신라본기는 전하고 있다.
불교·학문의 장려에도 노력해 876년 2월에는 황룡사에서 백 고자를 마련해 강의·토론을 행하게 해 왕 자신도 그 강의를 듣기 위해서 황룡사로 향해 갔다.또, 만년에 왕이 병에 쓰러졌을 때에도 황룡사에서 백고자를 마련하고 강의를 행하였다.
879년 2월에는 국학에 나가고, 박사 이하에 명해 특별히 강의를 행하게 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880년 9월로, 왕이 측근과 월상누각에 오르고 사방을 바라보았는데 집들은 상 늘어서 노래를 불러 피리의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 라고 하는 모습을 전하고 있어 왕과 시중의 민공과의 회화의 형태로, 풍작 계속으로 백성은 식량을 충분히 유지하고 평온을 즐기고 있는 것이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기이·처용랑 망해사조의 첫머리에서도, 헌강왕의 시대에는 도로부터 해변에 이르기까지 집이 상 늘어서, 초가의 집은 없고, 노래나 피리의 소리가 끊임 없이 기후가 순조로웠다고 적고 있다. 879년 6월에 일길찬의 신홍(信弘)이 반란을 일으켜 죽였다. 내란이 한 건 전해지고 있지만, 국내에서의 백성의 생활에 대해서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부상략기(扶桑略記)」에는 884년 9월(음력)에 신라선 45척이 대마도를 습격했지만, 일본은 타자이후의 분전에서, 이것을 요격 하고 위기를 벗어났다. 전투 후의 포로가 된 신라인 현춘(賢春)을 심문 하니, 전년 이래의 흉작에 의해 「인민기고」 상태가 계속 되어, 신라에서는 「왕성 불안」이었다고 대답하고 있다. 이것을 타개할 수 있도록 왕의 명령에 의해, 2500명의 군이 대소백소에 분승, 비범 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10년에 해당되지만, 10년의 기술은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다.
재위 12년째의 886년 7월 5일에 사망하였다.
가계
- 왕비 : 의명부인(懿明夫人)
- 후비 :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김씨(또는 문자왕후)
참고
신라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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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대 (기원전 57년 - 654년) |
혁거세 거서간 · 남해 차차웅 · 유리 이사금 · 탈해 이사금 · 파사 이사금 · 지마 이사금 · 일성 이사금 · 아달라 이사금 · 벌휴 이사금 · 내해 이사금 · 조분 이사금 · 첨해 이사금 · 미추 이사금 · 유례 이사금 · 기림 이사금 · 흘해 이사금 · 내물 마립간 · 실성 마립간 · 눌지 마립간 · 자비 마립간 · 소지 마립간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신라 중대 (654년 - 780년) |
태종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 |
신라 하대 (780년 - 935년) |
선덕왕 · 원성왕 · 소성왕 · 애장왕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민애왕 · 신무왕 · 문성왕 · 헌안왕 · 경문왕 ·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 신덕왕 · 경명왕 · 경애왕 · 경순왕 |
제49대 헌강왕 실록
( ? ~ 서기 886년, 재위기간 : 서기 875년 9월~ 886년 7월, 10년 10개월)
1. 덕치를 펼친 헌강왕과 오랜만에 찿아든 태평성대
헌강왕은 경문왕의 맏아들이며, 문의왕후 소생으로 이름은 정이다.
경문왕 재위 6년인 866년에 태자에 책봉되었고, 875년 9월에 경문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명민하고 글읽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다고 전한다.
경문왕과 문의 왕후가 결혼한 때가 860년이므로 헌강왕은 왕위에 오를 때 불과 15세 안팎의 소년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헌강왕은 이찬 위홍을 상대등으로, 대아찬 예검을 시중으로 임명하여 조정을 꾸리도록 하였고,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사면하고, 흥룡사에서 모든 승려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도록 하고, 자신이 직접 그 자리에 참석하는 등 민심안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세는 여전히 혼미하였다. 특히 국제 정치의 중심이었던 당나라는 '황소의 난'으로 전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 여파로 신라를 비롯한 주변국가들의 민심도 동요하고 있었다.
그 점을 반영하듯 879년 6월에 일길찬 신흥이 모반을 일으켰으나 다행히 모반은 실패하고 신흥은 사형을 당했지만, 헌강왕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제외하면 헌강왕 치세는 무난했다. 헌강왕 연간에는 단 한 차례의 천재지변에 의한 흉년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백성들은 곤궁한 삶을 면할 수 있었으며 오랜만에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헌강왕은 그런 현실을 자족하며 사냥과 음악을 즐겼다. 당시 헌강왕의 심정은 재위 6년의 다음 기사에서 잘 나타나 있다.
9월 9일,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도성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랫소리가 연이어 들여왔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짐이 듣건데,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고 하니, 과연 그러합니까?"
민공이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합니다.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폐하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뤄진 것입니다."
왕이 즐거워하며 말했다.
"이는 그대들의 도움 덕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소?"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헌강왕 연간은 비교적 태평한 세월이었다. 재위 7년 3월 기사에서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스스로 취하여 거문고를 타고, 신하들이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면서 마음껏 즐겼다는 내용도 그 점을 대변한다.
이듬해인 883년 4월,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냥과 야명주 열 개를 바쳤다는 기록은 당시에 일본과의 관계도 좋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885년 3월에 당대의 석학 최치원이 돌아왔다는 기사도 당나라의 혼미한 정국에 비해 신라는 무척 안정된 상태였다는 점을 반영한다. 이 해에 황소의 난이 평정되긴 했지만, 오랜 민란으로 당나라는 이미 몰락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고, 그런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신라의 유학파들이 그곳에서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환국하였던 것이다. 874년 당나라 과거에 합격하여 그곳에서 관리생활을 하던 최치원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886년 기사에는 북쪽의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는 내용의 글귀가 쓰인 목판을 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또한 신라 사회의 태평성대를 알려 주고 있다.
또 삼국유사는 "제49대 헌강왕 시대에는 서울로부터 동해 어구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총총히 늘어섰지만, 단 한 채도 초가집을 볼 수 없었고, 길거리에서는 음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사철의 비바람마저 순조로웠다." 라고 쓰고 있다. 아것도 헌강왕 연간 신라 사회가 대단히 안정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렇듯 헌강왕은 왕으로서 행복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는 말도 있듯이 헌강왕 개인이게 불행이 찿아들었다. 886년 6월 헌강왕은 급작스럽게 병에 걸려 드러눕고 말았다. 그러자 전국의 죄수들을 석방하고, 백고좌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며 왕의 쾌유를 빌었으나, 끝내 그해 7월 5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기껏해야 20대 중반이었다.
능은 보리사 동남쪽에 마련되었다.
2. 헌강왕과 처용랑
삼국유사는 헌강왕 시절의 인물인 처용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동해 왕의 일곱 아들 중 하나로 묘사된 것으로 봐서 처용은 지방 호족의 자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던 처용의 아내는 대단한 미인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병 귀신조차 밤마다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를 취하였다.
하루는 처용이 밤늦게까지 밖에서 놀다가 집에 돌아오니,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었다.그 현장을 목격한 처용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흔히 <처용가>로 불리는 노래의 내용은 이렇다.
'동경 밝은 달이 밤 이슥히 놀고 다니다가
등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고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고.
본데 내 것이지만, 빼앗길 걸 어쩌리.'
그 노래 소리를 듣고 역병 귀신이 깜짝 놀라 처용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무릎을 끓고 말했다.
"내 당신 아내를 탐내어 지금 상관하였소. 그런데도 당신은 노하지 않으니, 감격스럽고 장하기까지 하오. 이제부터는 맹세코 당신의 얼굴만 봐도 그 문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소."
이런까닭에 나쁜 귀신을 쫓아낼 때는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처용가의 내용 중에 서라벌을 동경으로 묘사한 것을 볼 때, 이 노래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라벌을 동경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 이후이므로, 아마 처용가도 처용의 설화를 기반으로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 역병 귀신이 처용의 아내와 잔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은 역병 귀신이 아니라 처용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신분이 대단히 높은 사람일 것이다.
이 처용 이야기 앞뒤에 헌강왕이 등장한다. 당시 헌강왕은 지금의 울산 지역인 개운포 부근을 순행하고 있었는데, 처용은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처용의 아내는 대단한 미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당시 신라왕은 어느 누구의 부인이던 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아름답기로 소문난 처용의 아내를 헌강왕이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처용이 "본디 내것이지만, 빼앗긴 걸 어쩌리." 라고 하는 한탄조의 시구로 노래를 불렀다. 처용으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상대가 그의 아내를 취햇던 것이다. 그 상대는 역병 귀신이 아니라 헌강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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