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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69 : 신라의 역사 68 (제48대 경문왕) 본문
한국의 역사 169 : 신라의 역사 68 (제48대 경문왕)
제48대 경문왕
경문왕(景文王, 846년 ~ 875년, 재위: 861년 ~ 875년)은 신라의 제48대 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응렴(膺廉)이다. 제43대 왕인 희강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김계명(金啓明)이고,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전왕인 헌안왕에게 아들이 없자 헌안왕의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올랐다. 신라가 혼란하여 중앙 귀족들이 음모와 반란을 일삼았으므로 수습에 힘썼고, 황룡사를 개수하였다.
생애
865년 4월에는 당나라 황제인 의종으로부터<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시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상주국·신라왕(開府儀同三司・検校太尉・侍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上柱国・新羅王)>으로 책봉되었다. 또, 이때에는 왕뿐만이 아니라 왕비·왕태자·대재상·소재상에게도 하사품이 있었다.
869년 7월에는 왕자 김윤(金胤)을 당에 파견해, 말 2마리·사금 100 냥·은 2백 냥 외 , 다양한 물품을 전해졌다. 이 때에는 이동(李同)을 김윤에 따르게 하고, 당나라에서 학업을 거두게 하는 것과 동시에 서적을 구입하기 위한 비용으로 해서 은 3백 냥을 이동에게 하사하였다.
다음 870년 2월에는 사찬 김인(金因)을 당에 숙위 시켰다.
874년에는 희종으로부터의 선유사를 받고 있어 당과의 교류는 지난 날의 번성함을 회복했다.
이전, 864년 4월에 일본으로부터도 국사를 맞이했던 것이 기록되고 있다.
867년 5월에는 왕도 금성에서 역병이 유행했고, 동년 8월에는 홍수가 일어났다. 지방 각지에서도 곡물이 여물지 않고, 왕은 각지에 안무의 사자를 파견하고 위문에 노력했다.
870년에는 왕도가 지진·홍수에 휩쓸려 그 겨울에는 다시 역병이 유행하게 되었다.
873년에도 기아와 역병이 일어나, 왕은 백성에게 곡물을 주어 구제했지만, 정황은 안정되지 않았다. 역병등의 액재와 호응 하는 것도 아니게 왕도로의 귀족층의 반란이 잇따른 것은, 그 현상이라고 보인다.
866년 10월에는 이찬 윤흥(允興)이 그 남동생 숙흥(叔興), 계흥(季興)과 함께 반역을 꾀했다. 사전에 발각되어 윤흥 일당은 대산군(岱山郡, 경상북도 성주군)으로 도주했지만, 포박되어 참형당하고 그 일족은 몰살되었다.
또, 868년 1월에는 이찬 김예(金鋭), 김현(金鉉)등이 반란을 일으켜 죽였다.
게다가 874년 5월에도 이찬 근종(近宗)이 반란을 일으키고 궁궐까지 쳐들어왔으나 경문왕은 근위병을 파견해 반란군을 격파하고 근종을 잡아 거열형으로 처벌했다. 반란군을 일망타진할 만한 통제력이 없던 선왕 문성왕의 무렵과 비교하면, 경문왕 때에는 통제력을 조금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재위 15년째인 875년 7월 8일에 사망했고, 경문왕이 시호이다.
설화
경문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설화의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가계
- 왕후 : 문의왕후(文懿王后) 김씨 - 헌안왕의 큰 딸
- 후비 : 후비 김씨(金氏) - 헌안왕의 둘째 딸
참고
신라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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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대 (기원전 57년 - 65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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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대 (654년 - 7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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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 (780년 - 9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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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대 경문왕 실록
( 서기 846 ~ 875년, 재위기간 : 서기 861년 정월~ 875년 7월, 14년 6개월)
1. 경문왕의 왕위 계승과 그 배경
경문왕의 이름은 응렴이다. 그는 헌안왕의 맏딸과 결혼하여 왕이 된 인물인데, 헌안왕의 사위가 된 경위는 자세히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860년 9월에 헌안왕이 임해전에 여러 신하를 모았는데, 응렴이 그 자리에 참석하여 헌안왕의 눈에 든 것이 그를 사위로 받아들인 이유라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헌안왕이 15세의 어린 응렴에게 이렇게 물었다.
" 네가 상당 기간 세상을 돌아다니며 견학한 바 있다는데, 착한 사람을 본 일이 없었느냐?"
이 물음에서 알 수 있듯이 헌안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응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시 응렴은 화랑도 우두머리인 국선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헌안왕이 그를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참석한 것도 이미 예정된 일임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이미 응렴은 헌안왕의 사위로 내정되어 있었고, 헌안왕은 그 자리에서 응렴의 자질을 평가하고자 했던 것이다.
헌안왕의 물음에 응렴은 이렇게 답변했다.
"제가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적어도 그들은 착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행동인가?"
"한 사람은 높은 가문의 자제로서 다른 사람과 교제하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항상 남보다 아래에 거처하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재물이 많아 사치스런 복장을 입을 만한데도 언제나 베옷을 입는 것으로 자족하였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권세와 영화를 누리면서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세도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헌안왕은 그 대답을 듣고 귀엣말로 왕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많은사람을 겪었지만 응렴만한 사람은 없었소."
그 뒤에 헌안왕은 자기에게 딸이 둘 있는데, 언니는 스무 살이고 동생은 열 아홉 살이라며 누구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응렴은 즉답을 피하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물었다. 그러자 부모는 언니가 동생보다 못하다는 말을 들었다며, 장가를 들려면 동생에게 들라고 했다.
그러나 응렴은 헌안왕의 둘 째 딸에게 장가드는 것을 주저했다. 그는 왕위에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흥륜사 중에게 가서 물었다. 그랬더니 중이 이렇게 말했다.
"언니에게 장가를 들면 세 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요, 동생에게 장가를 들면 세 가지 손해를 볼 것입니다."
사실, 응렴은 헌안왕의 둘째 딸에게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둘째 딸과 결혼하면 왕위를 얻을 수 없었기에 망살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헌안왕과 왕비는 응렴을 맏사위로 삼고 싶어 했다. 흥륜사 승려는 그런 내막을 파악하고 그렇게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언니와 결혼하면 헌안왕과 왕비의 뜻을 따르는 것이니, 왕과 왕비가 기뻐하여 당신에 대한 사랑이 점점 더 깊어질 것이 첯째 이득이요, 그로 인하여 왕이 될 것이니 둘째 이득이요, 왕이 된 뒤에 원하던 둘째 딸을 취하면 될 것이니 셋째 이득이오."
그 말을 듣고 응렴은 헌안왕을 찿아가 말했다.
"제가 감히 결정을 하지 못하겠사오니 대왕께서 결정해 주십시요."
그 소리에 헌안왕은 기뻐하며 맏딸 영화를 응렴과 결혼시켰다. 그리고 죽음에 임박하자 신하들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짐이 불행히도 아들 없이 딸만 두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전에 선덕, 진덕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일과 비슷하므로 이를 본 받을 수는 없다. 사위인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성숙한 덕성을 갖추고 있다. 그대들이 임금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정의 훌륭한 후계자를 잃지 않을 것이다."
헌안왕은 이 말을 남기고 861년 1월 29일에 죽었다. 그리고 곧 왕위에 올랐다.
응렴의 왕위 계승은 겉으로 보기에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 내막을 알고 보면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우선, 응렴은 희강왕의 아들인 이찬 계명의 아들이다. 희강왕이 누구인가? 바료 균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제륭이 아닌가? 그리고 헌안왕은 균정의 아들이다. 즉 응렴은 헌안왕의 아비를 죽인 원수의 손자인셈이다. 그럼에도 헌안왕은 그를 사위로 삼았다.
헌안왕의 이런 부자연스런 선택의 배경에는 모종의 거래가 도사리고 있을 법하다. 이는 헌안왕이 왕위에 오른 이유와 관련이 있다. 즉 헌안왕은 제륭파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고, 그 결탁의 대가로 제륭의 자손을 사위로 삼아 그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한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지속되던 제륭파와 균정파의 왕위 계승 다툼의 종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왕위 다툼 과정에서 권력 다툼에 이용된 해상왕 장보고가 어이없이 희생된 것은 신라의 발전이나 한민족의 발전에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권력 쟁탈은 많은 희생을 동반하였고 그러면서도 인간들의 탐욕에 의해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바뀐 권력이라고 더 특별난 치세를 유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2. 경문왕의 과욕과 등 돌리는 민심
경문왕은 희강왕의 아들인 이찬 계명의 아들이며, 광화부인 소생으로 이름은 응렴이다. 846년에 태어났으며, 헌안왕 4년인 860년에 15세의 나이로 헌안왕의 큰 딸 영화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그리고 861년 정월에 헌안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했다.
경문왕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초기에는 제대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경문왕 초기의 정치는 경문왕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왕비인 영화부인과 헌안왕의 왕비인 태후가 좌지우지 했던 모양이다. 이는 경문왕이 재위 6년에야 비로소 자기 아버지를 의공대왕, 어머니 박씨를 광의왕태후, 부인 김씨를 문의왕비로 봉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대개 왕이 즉위하면 즉위년이나 그 이듬해에 곧바로 자기 부모나 조상에 대해 봉호를 추존한다. 그런데 경문왕은 즉위 후 무려 5년이나 지난 뒤에야 겨우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봉호를 추존했다는 것은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왕권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경문왕의 왕권 장악에 불만을 품은 세력이 있었는데, 제륭파와 균정파가 정치적으로 결탁하여 왕위에 오른 사실에 대해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 의해 경문왕 재위 연간 세 번에 걸쳐 반란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첯 번째 반란은 경문왕이 자기 부모에게 봉호룰 추존하였던 바로 그해에 발생했다. 경문왕 재위 6년(866년) 10월, 이찬 윤흥과 그의 아우 숙흥, 계흥 등이 함께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대산군으로 도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문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잡아 참수하고, 삼족을 멸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윤흥 형제는 필시 왕족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삼족, 즉 부모와 형제와 처자를 모두 죽이도록 한 것은 경문왕이 역도들이 대해 대단히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음을 의미한다. 희강왕 이후로 왕족 내부에서 많은 반란 사건이 일어났지만, 삼족을 멸한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경문왕이 이토록 강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경문왕의 왕권이 매우 강력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란 사건은 그 후에도 이어지는데, 윤흥의 반란 사건이 일어난 뒤 불과 1년 3개월 만인 868년 정월에 이찬 김예, 김현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한동안 잠잠하다가 재위 14년(874년)에 또 한 번 반란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해 5월 이찬 근종이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동원하여 도성안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지난번 반란은 반란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었지만 이번에는 군대가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근종의 난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경문왕이 무리하게 황룡사 대탑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대탑은 868년 6월 벼락을 맞아 무너졌다. 그러자 3년 뒤인 871년에 경문왕은 대탑을 개축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이 공사를 명령하던 시점이 백성들의 삶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870년 4월에 서라벌에 큰 지진이 있었고, 7월에는 홍수로 피해가 많았던 것이다.
또 그해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아 겨울 가뭄으로 고통받았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마저 퍼져 백성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경문왕은 그런 백성들의 고통을 헤아리지 않고 황룡사 대탑 공사를 무리하게 추진하였던 것이다.
황룡사 대탑은 그 규모가 너무 엄청나서 선덕여왕이 처음에 그것을 세울 때도 백성들의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비담의 난까지 일어나는 사태를 유발하였던 것이다. 대규모 공사는 많은 백성들이 동원되고 결과적으로 곤궁한 백성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들의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경문왕이 무리한 공사를 강행하게 만든 것은 왕비인 영화부인의 죽음과 도 연관이 있었는데, 영화부인이 870년 5월에 죽었고, 경문왕은 왕비의 명복을 빌려는 차원에서 황룡사 대탑 개축을 진행토록하였던 것이다.
경문왕은 황룡사 대탑을 개축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나서 한 달만에 다시 월상루를 중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기왕 공사를 벌인 김에 낡은 월상루도 같이 고치자는 생각이었다.
황룡사 대탑 개축 공사는 3년간 지속되어 873년 9월에 완성하여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탑의 높이는 9층으로 스물두 장(10척)이었으니, 지금의 높이로 약 66미터 높이의 거대한 건물이었다.
이 공사가 진행되던 3년 동안 서라벌에는 또 한 차례 지진이 발생했다. 또 전국적으로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곡식을 해치는 바람에 백성들은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전염병으로 백성들은 숱한 사람이 매일 죽어 나갔다. 그래서 황룡사 대탑은 백성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과 죽음이 횡행하는 기운데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자 바로 이듬해 5월 근종이 군대를 일으켜 도성을 공격했다. 그가 이끌었던 군대는 관군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었다. 말하자면 굶주림과 노동력 착취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근종의 선동에 의해 들불처럼 일어나 각지에서 모여들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근종의 반란군은 도성을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고 밖으로 밀려났다. 관군은 그들을 추격하여 근종을 체포하였고, 근종은 사지가 찢기는 거혈형을 당하여 처형되었다.
근종의 난으로 민심은 크게 악화되었고, 정치 불안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875년 7월 8일, 경문왕도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삼국유사에는 경문왕이 왕위에 오른 뒤로 계속해서 귀가 커져 당나귀 귀처럼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비밀을 알고 있던 사람은 왕의 두건을 만드는 기술자 한 사람뿐이었다. 그 기술자는 평생 그 비밀을 지키다가 죽기 직전에 도림사 대나무 숲에 들어가 아무도 없는데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 우리 임금 귀는 당나귀 귀 같네."
그 후 바람만 불면 그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경문왕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그곳의 대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고 한다. 그 뒤로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 귀는 크다네." 하는 소리만 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경문왕이 귀는 크지만 백성들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비꼬아서 누군가 고의로 지어서 유포한 듯하다.
3. 경문왕의 가족들
경문왕은 두 부인에게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얻었다. 첯째 부인은 헌안왕의 맏딸 영화부인이며, 둘째 부인은 헌안왕의 둘째 딸 김씨이다.
영화부인은 스무 살이던 860년에 경문왕과 결혼하였고, 861년에 경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866년에 시호를 받아 문의 왕비로 봉해졌다가 870년 5월에 죽었다.
그녀 소생으로 아들 정(헌강왕), 윤과 딸 만(진성여왕)이 있다.
둘째 왕비 김씨는 이름이 전하지 않으며, 스무 살이 되던 863년에 경문왕의 둘째 왕비로 책봉되었고,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녀 소생이 누구인지도 기록이 없다.
아들 정과 딸 만에 대해서는 다음 실록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둘째 아들 윤의 기록은 경문왕 9년 7월 기록이 유일하다. 그는 왕자 신분으로 소판 벼슬을 받아 당나라에 진봉사신으로 갔다. 그때 그는 어린 나이로 사신으로 갔다는 점이 이상하다. 어쩌면 그는 영화부인이 다른 남자와 관계하여 낳은 사자인지도 모른다.
영화부인은 경문왕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았고 스무 살이라는 늦은 나이로 결혼한 것이다. 이미 영화부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는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가진 공주는 세 명의 남편을 가질 수 있는 제도가 있었으므로 전혀 엉뚱한 일은 아니다.
만약 영화부인이 경문왕과 결혼하기 전에 다른 남자에게서 아들을 얻었다면, 경문왕은 그녀가 낳은 아들을 양자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것은 신라 왕실의 관례였다. 특히 왕자 신분의 윤이 이찬 벼슬이 아닌 소판 벼슬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경문왕의 친자가 아니라는 점에 설득력을 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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