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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카다피, 그리고 민주화 시위 사태 2 본문
리비아, 카다피, 그리고 민주화 시위 사태 2
무아마르 알 카다피, 그는 누구인가?
무아마르 알 카다피(아랍어: معمر القذافـي Mu‘ammar al-Qaḏḏāfī[*], 1942년 6월 7일~, 서르트 주 서르트)은 리비아의 군인으로 1969년 쿠데타 이후 현재까지 리비아를 통치하고 있다.
카다피가 수상직을 내어 놓은 1972년부터는 정부 문건과 관영 통신에서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의 위대한 9월 사회주의 인민 혁명의 수호자" 내지는 "혁명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로 불리고 있다. 2009년 6월 8일 가봉의 오마르 봉고가 사망함으로써, 생존하는 비왕족 국가 지도자 중에서 최장기 집권자가 됐다(사망자까지 포함하면 4번째) 또한 리비아 지역이 1551년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 이래로(당시 트리폴리) 리비아의 최장기 집권자이다.
2011년 초 시작된 아랍의 민주화 시위의 영향을 받아 리비아에서도 2011년 2월, 카다피 정권에 대항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무아마르 알 카다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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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 | |
출생 | 1942년 6월 7일(1942-06-07) (6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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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리비아 대학교 |
직업 | 정치인 |
종교 | 이슬람교 |
배우자 | 사피아 파르카쉬 |
자녀 | 무하마드 알 카다피, 사이팔 알 이슬람 무아마르 알 카다피, 사아디 카다피, 무타심 카다피, 사이프 알 아랍, 카미스, 아예시아 알 카다피, 한나 |
서명 | |
생애
출생지는 수르트 근처로 베두인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10대 때는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와 그의 아랍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존경하였고 1956년 수에즈 사태에서는 반이스라엘 시위에 참가했다.
군사 학교 시절 왕정을 타도하기 위한 최초의 계획을 시작했다. 나중에 그리스 아테네의 헬레나 군사 학교와 영국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63년 벵가지의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군사학교에 들어갔다. 군인이 된 후, 잠시 영국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꾸준히 진급하며 경력을 쌓던 그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모방하여 젊은 장교들로 구성된 자유장교단을 구성했다. 육군 대위 카다피는 1969년 9월 국왕 이드리스 1세의 해외 순방 중 쿠데타를 일으켰고, 혁명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군 사령관을 맡았다.
쿠데타 이후
그 후, 철저히 반미주의를 주창하여 미국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이탈리아인을 추방했다. 외국의 석유 회사들을 추방하고, 석유를 국유화했다. 1970년부터 총리·국방장관을 겸하다가 1972년 이들 자리를 내놓고 완전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는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다.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의해 음주를 금지시키고, 독자적인 직접민주제를 구상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녹색서》(1975)라는 책에 밝혀져 있다.
단일 이슬람 국가 건설시도
한편, 중동 지역에 단일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에 따라 이집트와 아랍 연합 구성에 합의했으나, 중동 전쟁 이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추진한 평화 정책에 반발하여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1980년 시리아와의 합방을 선언했으나, 곧이어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나 합방은 무산되었다.
20대 청년장교 시절 쿠데타로 집권해 고희에 이르도록 리비아를 통치하고 있는 세계 최장기 집권자, 카다피. 리비아 청년장교 그룹인 자유장교단을 이끌어 쿠데타를 일으키고는, 외국 석유회사들을 추방한 뒤 석유국유화를 단행하고, 반서방ㆍ반미 노선을 내걸어 미군 기지를 철수시키며 세계 앞에 그 이름을 떨쳤다.
당시만 해도 쿠데타의 동인(動因)을 몇몇 정치군인의 순간의 권력욕으로 폄하하는 이들은 없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국왕에 대한 분노, 서구식 의회와 정당을 부정하고 대중 직접민주주의, 완전 평등주의, 임금노동 폐지를 주장하며 이슬람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려던 카다피의 철학에 대한 공감대가 기층 민중 사이에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카다피는 그 꿈을 이루었을까. 자신은 여전히 “리비아의 발전을 이끌어 왔으며 혁명의 지도자이며 혁명은 죽을 때까지 희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권좌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입에서만은 ‘혁명’의 기치는 건재하다.
2009년 9월 유엔총회에 참석한 카다피 이야기는 지금도 화제다. ‘아프리카 왕 중 왕’이라는 거창한 소개를 받으며 연단에 오르더니 무려 96분에 걸쳐 장광설을 쏟아냈다. 통상 정상급 지도자의 15분 정도 발언기회가 부여되는데 이를 무시해버린 것이다. (물론 카다피의 기록은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 다음이다. 카스트로는 4시간29분 기록이라는 기염을 발산했다.)
나와서 한 이야기도 엽기였다. 단상에 놓인 유엔헌장을 찢어버리며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이 나머지 나라들을 2등 국가로 경멸하는 만큼 테러이사회로 불러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밖에 “신종플루는 군사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신종생물무기 아니냐.” “‘아프리카의 아들’ 오바마 대통령은 영구 집권해야 한다.” “암살당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재조사를 해야 한다.” “유엔본부를 리비아로 옮기자.” 이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제기했다. 아랍어로 된 카다피의 일장 연설을 통역하던 동시통역사는 기진맥진해져 도중에 교체됐다.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 절반은 졸았다고 한다.
카다피의 안하무인은 ‘유서’ 깊다. 196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얼마 뒤, 천막 비슷한 흙담 집무실을 일부러 만들고는 문을 낮췄다. 이렇게 되니 자기를 만나러 오는 서방 외교사절들은 입구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 장면을 사진에 담으면 서방세계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조아린다는 상징적인 ‘인증’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카다피는 부족 전통에 따라 유엔총회장 근방에서 천막을 깔고 자려 했다. 2007년 파리, 2009년 이탈리아를 국빈 자격으로 갔을 때에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반대했기에 그렇다. 사실 미국 사람에게 카다피는 원수(怨讐)나 다름없다. 1988년 270명이 탄 팬암 여객기를 폭파하라고 지시한 배후가 카다피였기에 그렇다. 결국 리비아 대사관에 급조한 천막 하나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카다피, 불같이 화를 냈다는 후문도 있다. “나를 이렇게 대접해? 핵 원료인 농축 우라늄을 러시아에 반환할 거야”라고 발끈했다는 것이다.
카다피가 부족 전통보다는 공포증 때문에 천막에서 잔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작년 5월에 세계 정상들의 독특한 공포증을 소개했다. 여기서 소개된 카다피의 증상은 폐소 공포증이다. 이는 꼭 닫힌 곳에 있으면 두려움에 빠지는 강박 신경증을 말한다.
카다피가 꿈꾼 또 표방한 이념은 사회주의이다. 그러나 42년 후 실상은 절대왕정이다. 이제는 오만과 독선으로 똘똘 뭉쳤다. 이러다보니 정권의 버팀목이었던 군과 공무원은 난파선처럼 이탈 행렬을 이어간다. 중국·인도·말레이시아·방글라데시 주재 외교관들에 이어 법무장관, 내무장관도 사퇴했다.
카다피는 본인에 대한 저항은 무조건 대의에 반하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성역화한다. 한 때 자기가 이끈 혁명의 동력이었던 민중의 봉기를 ‘쥐떼’의 소동으로 폄하한다. 그리고는 “총 한 발 남을 때까지 맞서겠다”며 겁박한다. 구제 및 치유불능의 독재 환각 상태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총칼로 거스르려 해도 정권 붕괴는 시간문제이다.
성역 없는 민주화의 대세, 이 바람은 아시아로 몰려오고 있다. 중국, 북한 등 걱정되는 쪽은 어떻게든 막아보려 부산하게 책략을 도모하는데, 누군가는 남의 일인 듯 여긴다. 카다피처럼 말이다.
비난
그는 비동맹 운동에 참가하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독재 정치, 인권 탄압, 테러, 핵실험 등의 의혹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서방 세계의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국유화한 석유로 막대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를 국제 테러 단체에 지원한 의혹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괴팍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자주 가십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서방과의 화해 제스처
그러나, 최근에는 서방 세계에 화해의 손짓을 내보이고 있다. 2004년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시켰으며, 미국은 2006년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였다. 2008년 9월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트리폴리를 방문하여 카다피와 회담하였다.[1] 또한 과거 이탈리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 사과를 받아들였다.[2]
독재 및 민주화운동
2008년 9월 혁명평의회 의장 취임 39주년을 맞이한 그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하고 있는 정부 수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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