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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68 : 신라의 역사 67 (제47대 헌안왕) 본문
한국의 역사 168 : 신라의 역사 67 (제47대 헌안왕)
제47대 헌안왕
헌안왕(憲安王, ? ~ 861년, 재위: 857년 ~ 861년)은 신라의 제47대 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의정(誼靖)이다. 아버지는 김균정(金均貞, 후에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추봉)이고, 어머니는 조명부인(照明夫人)이다. 신무왕 김우징(金祐徵)의 이복 동생이기도 하다.
생애
858년에는 4월의 늦서리, 5월부터 7월에 걸쳐 기후가 안좋아서 859년 봄에는 곡물의 가격이 상승해, 국민이 굶주리게 되었다. 구제를 하기 위해서 왕은 각지에 사자를 파견해, 곡물을 나누어 주었다. 동년 4월에는 제방의 수축을 행해 농업 진흥에 노력했다.
860년 9월, 군신과의 연회 시에 왕족 김응렴(金膺廉, 후의 경문왕)을 등용하여, 장녀를 시집을 보냈다.
그 3개월 후, 재위 5년째의 861년 1월에 병에 쓰러지고 뒤를 잇게 하는 남자가 없었기 때문에 사위 김응렴을 왕위에 앉히도록 유언 하고, 1월 29일에 사망했다.
가계
참고
신라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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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대 (기원전 57년 - 65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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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대 헌안왕 실록
( ? ~ 서기 861년, 재위기간 : 서기 857년 9월~ 861년 정월, 3년 4개월)
1. 늙은 헌안왕의 왕위 계승
헌안왕은 신무왕의 아버지 균정의 아들이며, 조명부인 김씨 소생으로 이름은 의정이다. 문성왕 11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857년에 문성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균정에겐 부인이 둘 있었는데, 조명부인은 두 번째 부인이다. 따라서 헌안왕은 신무왕의 이복 동생이며, 문성왕의 숙부가 된다. 그런데 헌안왕과 신무왕은 단순히 이복 형재 이상의 다소 복잡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헌안왕의 어머니 조명부인은 민애왕(김명)과 남매지간이다. 말하자면 김명과 균정은 처남과 매부 관계였다. 그런데 민애왕은 신무왕의 아버지 균정을 죽였고, 신무왕은 민애왕을 죽였다. 즉, 신무왕과 민애왕은 서로 원수지간인 셈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조명부인이 있다. 조명부인에게는 남편을 죽인 오빠인 김명이 원수요, 또 오빠 김명을 죽인 신무왕도 원수였다. 그녀에겐 친정과 시가가 모두 원수였던 것이다. 헌안왕은 그런 이상한 처지에 놓인 조명부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신라 사회에선 외가의 영향력이 본가에 뒤지지 않았던 점을 감안한다면, 헌안왕은 본가와 외가의 어느 쪽도 편들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뜻밖에도 왕위가 주어졌다. 삼국사기는 문성왕이 유언으로 헌안왕을 왕위 계승권자로 지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문성왕이 죽을 당시 경응(헌안왕)은 매우 연로한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문성왕의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후로 하여금 섭정을 하도록 하는 편이 훤씬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손자를 제쳐두고 노쇠한 숙부에게 왕위를 넘겨주도록 유언했다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더구나 삼국사기에는 문성왕의 유언이 필요 이상으로 길게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과인이 미미한 자질로 높은 자리에 처하여, 위로는 하늘에 죄를 짓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까 걱정하였으니, 밤낮으로 깊은 물과 얕은 얼음을 건너듯 전전긍긍하면서도, 세 명의 재상과 여러 신하들의 보좌에 힘입어 왕위를 유지했다.
이제 나는 갑자기 병에 걸린 지 열흘이 지났으니, 정신이 혼몽하여 아침 이슬보다 빨리 세상을 떠날지도 모르겠다.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사직에는 주인이 없을 수 없으며, 국가의 정치에 관한 모든 사무는 잠시라도 페할 수 없다.
돌아보건대, 서불한 의정은 선왕의 손자요 나의 숙부이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있고 명민하여 관후하고 인자하여, 오랫동안 재상의 직위에 있으면서 왕의 정사를 도왔으니, 위로는 종묘를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기를 만하다. 이에 나는 무거운 적임자를 얻었으니, 다시 무슨 여한이 있으랴? 살고 죽는 것과 시작하고 끝맺는 것은 만물의 위대한 기양이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천명이 부여하는 정해진 몫이다. 세상을 뜨는 자는 하늘의 이치에 이르는 것이니, 세상에 남는 자가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는 없다. 너희 여러 신하는 힘을 다하여 충성할 것이며, 가는 사람을 장례 지내고 살아 있는 사람을 섬김에 있어서도 예절을 어기지 말 것이다. 나라 전체에 포고하여 나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하라."
문성왕은 이 유언을 남긴지 7일 만에 죽었다.
의심스러운 것은 이 유언장의 내용이 지나치게 장황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유언장을 작성할 당시에 문성왕은 몹시 위독한 상태였다. 그런 몸으로 이런 장황한 유언장을 남긴다는 것은 미심쩍은 일이다.
아무래도 이 유언장은 당시 상대등이던 경응(헌안왕) 일파에 의해 작성된 듯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파간에 모종의 결탁이 이루어진 듯하다.
헌안왕은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재위 5년 만에 죽는다. 그리고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사람은 사위 김응렴(경문왕)이다.
김응렴은 아찬 계명의 아들이고, 계명은 제륭(희강왕)의 아들이다. 즉, 그는 제륭의 손자인 셈인데, 제륭은 헌안왕의 아버지 균정을 죽인 인물이다. 말하자면 원수의 손자를 사위로 맞은 것이다.
제륭파와 헌안왕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고는, 헌안왕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손자를 사위로 받아들였을 까닭이 없다. 더구나 왕위까지 물려준 것을 보면 어쩌면 이는 이미 헌안왕이 왕위에 오를 때 약속된 일이 아닌가 싶다. 어쨌던 이 일로 오렛동안 지속되었던 제륭파와 균정파의 정쟁은 일단락된 셈이다.
헌안왕은 재위 5년인 861년 정월에 죽었으며, 능은 공작지에 마련되었다.
헌안왕에게 부인이 둘 있었다. 왕비는 딸을 둘 낳았는데 그녀의 이름과 가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녀 소생 두 딸은 모두 경문왕에게 시집갔다. 큰 딸은 경문왕의 정비 영화왕후이다.
헌안왕의 후비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그녀는 궁예를 낳은 것으로 전해진다. 궁예는 후에 후삼국 중의 하나인 태봉을 세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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