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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66 : 신라의 역사 65 (제45대 신무왕) 본문
한국의 역사 166 : 신라의 역사 65 (제45대 신무왕)
제45대 신무왕
신무왕(神武王, ? ~ 839년, 재위: 839년)은 신라 제45대 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우징(祐徵)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인 김균정(金均貞, 후에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추봉)이고, 어머니는 진교부인(眞矯夫人, 후에 헌목태후(憲穆太后)로 추봉) 박씨(朴氏)이다.
생애
흥덕왕의 3년(828년) 1월 대아찬(大阿飡)과 시중(侍中)에 발탁 되었지만, 831년 1월 수도 금성(金城, 경상북도 경주시)에 일어난 지진때문에 시중이 면직되었다. 834년 1월에 다시 시중이 되었지만, 835년 2월에 아버지 김균정(金均貞)이 상대등(上大等)으로 취임하면서, 우징은 시중 직을 사임했다. 이 때에 후임 시중이 된 사람은 김명(金明)였다.
흥덕왕의 사후, 상대등 직에 있던 아버지 균정과 조카인 김제륭(金悌隆)과의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란이 일어났다. 내란 중에서 균정이 죽어 희강왕이 즉위 하였고, 우징 등은 달아나 청해진 대사인 장보고를 의지하였다.
그 후, 희강왕을 옹립 한 김명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을 죽이고, 838년 1월 왕으로 즉위 하였고, 우징파는 동년 3월부터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결과적으로 우징의 장군 김양(金陽)이 왕도에 도착하여, 839년 1월 19일에 민애왕을 시해했다. 우징은 왕의 의례로 민애왕의 시체를 매장하였고, 또, 고례에 준거하고 즉위식을 거행하여,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후에 왕의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를 추봉 했다. 아들 김경응(金慶膺)을 태자로 삼았다. 또, 민애왕을 물리치는데 공적이 컸던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에 임명하였고, 식읍 천호를 받는 것과 동시에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할 약속을 얻어 냈다.
839년 7월에는 희강왕 대로부터 보내지 않았던 당나라에 사자를 파견하여, 치청(淄青,산둥성) 절도사에게 노비를 보냈다. 당의 문종은 이것을 듣고, 먼 곳에 온 사람인 것을 불쌍히 여겨 신라에 귀국시켰다. 같은 달(7월) 신무왕은 병에 쓰러져 23일에 사망하였다.「삼국유사」왕력에서는, 동년 11월 23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제형산의 서북으로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 왕릉은 경주시 동방동의 사적 제 185호가 비정 되고 있다.
가계
참고
신라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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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대 (기원전 57년 - 654년) |
혁거세 거서간 · 남해 차차웅 · 유리 이사금 · 탈해 이사금 · 파사 이사금 · 지마 이사금 · 일성 이사금 · 아달라 이사금 · 벌휴 이사금 · 내해 이사금 · 조분 이사금 · 첨해 이사금 · 미추 이사금 · 유례 이사금 · 기림 이사금 · 흘해 이사금 · 내물 마립간 · 실성 마립간 · 눌지 마립간 · 자비 마립간 · 소지 마립간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신라 중대 (654년 - 780년) |
태종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 |
신라 하대 (780년 - 935년) |
선덕왕 · 원성왕 · 소성왕 · 애장왕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민애왕 · 신무왕 · 문성왕 · 헌안왕 · 경문왕 ·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 신덕왕 · 경명왕 · 경애왕 · 경순왕 |
제45대 신무왕 실록
( ? ~ 서기 839년, 재위기간 : 서기 839년 윤 정월~ 7월, 6개월)
1. 악몽에 시달리는 신무왕과 등에 난 종기
신무왕은 원성왕의 손자 균정의 아들이며 진교부인 박씨 소생으로 이름은 우징이다. 헌덕왕 14년인 822년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자 대아찬 벼슬로 아버지 균정과 같이 출전하여 토벌대를 이끌었으며, 흥덕왕 3년인 828년에 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831년에 경도에 지진이 일어나 시중에서 물러났다가 3년 뒤인 834년에 다시 시중에 기용되었다. 835년에 아버지 균정이 상대등에 오르자, 부자가 함께 재상과 시중에 있을 수 없다 하여 물러났다.
836년에 헌덕왕이 죽자, 아버지 균정을 왕위에 앉히려고 노력하였으나, 재종 제륭(희강왕)에게 패배하여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의탁하였다. 838년에 희강왕이 김명(민애왕)에게 살해되고, 김명이 왕위에 오르자, 장보고 군대의 도움을 받아 김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으니,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셈이 되었다. 이때가 839년 윤 정월이었다.
즉위와 동시에 왕의 할아버지 예영을 혜강대왕, 아버지 김균정을 성덕대왕, 어머니 진교부인 박씨를 헌목태후에 추존하고, 아들 경응을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반정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삼고, 식읍 2천 호에 봉하였다.
그때 민애왕을 옹립했던 이홍은 처자를 버리고 산속으로 도주하였는데, 신무왕이 병사를 풀어 그를 잡아 죽였다. 그 뒤로 신무왕은 곧잘 이홍이 등장하는 악몽에 시달렸는데, 꿈에 나타난 이홍이 활로 그의 등을 쏘아 맞히는 꿈이었다.
사실, 그 무렵 신무왕은 이미 중병을 앓고 있었는데, 원인은 종기였다. 묘하게도 종기가 난 자리는 꿈에 이홍이 쏜 화살이 맞은 자리였다고 한다. 종기는 순식간에 온 몸에 퍼졌고, 얼마되지 않아 신무왕은 명을 달리했으니, 이때가 즉위년 7월이었으니 즉위한 지 6개월 만이었다.
신무왕의 부인은 정종왕후인데, 정계태후라고도 불리었다. 그녀는 명해의 딸이다. 그녀 소생으로는 경응(문성왕)이 있다.
해상왕 장보고
장보고(張保皐, 788년?~841년 또는 846년)는 남북국 시대 노비 출신으로 신라의 해상 호족이며, 해상왕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이다.
완도 청해진 전경
생애
장보고의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8세기 후반 경 완도 또는 그 인근에서 출생,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자기보다 1세 어린 동향 후배인 정년과 함께 노예로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풍운의 꿈을 품고 신라에서는 골품제(骨品制)로 인한 신분 제약으로 뜻을 펼치기 어려워 당나라 서주(徐州)로 건너갔다.
당나라 시절
30세 쯤 뛰어난 무술을 인정받아 군사집단인 무령군 소장의 직책을 받게 되었다. 무령군은 805년 처음 생겼으며 장보고 재당 시절의 기준이 된다. 그는 무령군 소장으로 있는 동안 자신의 관할 지역에 신라인 노예들이 당나라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끌려오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 828년 신라로 돌아갔다. 당나라 생활은 20년 가까이 한 셈이다.
무령군은 당시 당 조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평로군 이사도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조직되었으며 장보고는 반란군 진압에 선봉에 섰다. 819녀ㅑㄴ 반란군은 완전 진압되엇으며 자보고는 그 전공을 인정받아 승진하였고 소장 직위까지 올랐다.
평로군 이사도는 그의 조상이 고구려 유민출신으로 평로절도사를 무력으로 물리치고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하였으며 스스로 번의 수장에 올랐다. 처음 반란이 시작된 것은 그의 조부 이정기(765-781년) 때 부터다. 이남(781-792)를 거쳐 이사고(792-806)에 이어 이사도로 이어지는 3대 55년 동안 산동반도 중심으로 소왕국을 건설하고 15개 주를 장악하여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최대의 번진으로 성장하였다. 그래서 당의 간섭을 배제시키고 발해, 신라와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세력을 넓혔으며 재당 신라인 재력가들의 지원 아래 당에 저항하면서 자치권을 누렸다.
장보고는 재당 신라인들의 저력을 실감하였고 정치적인 이용에는 반감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경제적인 실익 극대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그에 대한 방안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828년 전후, 노예무역이 극성을 부렸는데, 특히 신라인 노예매매가 심하엿다. 신라 조정에서는 당나라에 이러한 노예매매를 방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당 조정에서는 노예매매를 금지하는 금령을 816년에 이미 전국에 하달한 상태였으나 근절은 불가하였고 중국인을 주축으로 한 해적들의 준동이 극에 달하였다. 그리고 신라인들은 당시 천재지변으로 만성적인 기근을 피해 당나라로 스스로 팔려나가기도 하였고 이주를 희망하기도 하였다. 또 자식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부모도 많았다. 그래서 수많은 신라인들이 노예로 끌려와 당나라에서 각지로 팔려나가고 그의 주동적인 역활은 중국인들로 구성된 군소 해상 세력인 해적들의 노예매매 소행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노예 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고심하였다. 그는 강력한 해상력을 키워 노예무역을 주도하고 있는 군소 해상 세력을 통제하고 신라 사회와 유기적인 연계를 통해 노예무역을 차단하고 중국, 일본, 신라를 잇는 삼각무역을 장악하여 강력한 해상왕국을 수립하는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이사도의 난이 평정되자 당나라는 821년부터 각번의 번진 군사력을 삭감하기 시작하였는데, 무령군도 에외는 아니었다. 그러자 더이상 당나라에서 군사적인 자신의 역활이 한계에 다달은 점을 인식하고 그는 신라로 돌아가서 그가 구상한 새로운 해운사업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그동안의 무령군에서 보인 그의 활약상은 대단하였는데, 군사전략가로,무예도 출중하였고 해적 소탕 수완이나 인의지심과 혜안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통찰력을 겸비한 빼어난 자질을 가진 자였음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당 신라인들로부터 대중적인 인기는 물론 신임도 두터웠고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귀국, 그리고 해상권 장악
그래서 828년 그는 신라로 귀국하게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로 간 그는 신라 제42대 임금인 흥덕왕을 알현하고 사졸 1만을 양성하여 완도에 청해진(완도)을 설립할 것을 요청했으며, 이에 시중 김우징, 고성군 태수를 거쳐 무주 도독이었던 김양 등의 왕족이 이를 찬성하여 마침내 허용되었다. 흥덕왕에게서 1만 병사를 얻어 청해(淸海, 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번창하던 대라 실제는 신라 조정에서 중앙군 1만이라는 병력을 장보고에게 내 줄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1만 병력은 왕의 승인을 받고 장보고가 민군조직으로 모집하고 훈련시킨 병사였을 것이며 그 병력들로 청해진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장보고는 자신의 세력 기반과 근거지를 구축하게 되었고 무소불위의 강력한 세력집단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장보고의 청해진은 활발한 해상활도을 펼쳐 해적들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신라 서남해에 출몰하던 당나라의 해적과 일본 왜구를 모두 소탕하고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나라, 일본, 남방, 서역과 아랍의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여 많은 이익을 취하였으며, 아울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이때 신라의 국력이 잠시 회복되었다. 그에게는 청해진 대사라는 예외적인 자격과 직급이 주어졌으며 신라 조정은 장보고의 경제적인 후원으로 국력이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장보고의 세력 기반은 중국 산동반도 남부 일대와 대운하 주변 일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민들과 한반도 서남부 완도 일대의 주민들이었다. 그리고 일본에는 백제 유민. 유랑자와 재일신라인 사회가 그의 세력 기반이었다. 신라인 취락은 산동반도 남부 해주 일대, 대운하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심장부는 초주였다. 조금 떨어진 연수현은 내륙수로의 중심지로 신라방이 위치하였으며 운수, 무역, 조선, 상업의 중심지였다. 산동남부 일대에는 모평현, 소포촌, 도촌,햐양현,유산포 등이 위치하였고 문등현 청령한 구산촌은 신라인 중신지이며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특히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은 500석을 생산하는 장전을 소유하였으며 장보고 휘하의 장정 등 3인이 경영하였다. 829년 11월 이후 강회에는 매잃 40여 명 이상 모여들었고 마지막 날에는 200명 , 250명 이상씩 모여 들었다. 이곳은 여행자들의 숙식을 제공하엿고 무역 종사자 등에게도 제공되었다.
장보고는 재일 신라인 사회-청해진-재당신라인 사회를 연곃하는 무역망을 구축하였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엿으며 강력한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다.
836년 흥덕왕이 죽은 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퇴하여 청해진으로 쫓겨 온 김우징을 도와 정변을 일으켰다.
839년(신무왕 1년) 음력 1월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추대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의 직책을 받았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한 뒤에는 진해장군에 임명되었으며,
840년(문성왕 2년) 일본에 무역 사절을 파견하고 당에도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는 등 삼각무역을 실시했다.
그러나 845년(문성왕 7년)에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次妃)로 삼으려 했던 일이 신무왕의 갑작스런 병사 이후 진골 귀족의 반대로 물거품이 되어 버리자 조정에 대한 원망과 울분으로 날을 지샜다.
얼마 후 조정의 밀명을 받고 거짓 투항해 온 옛 부하 염장을 위해 주연석상을 마련하여 크게 환대했는데, 이때 염장이 장보고의 장검을 취하여 그를 참수하였다.
그가 죽은 때는 846년 봄이라고 한다.
이후 그가 새운 청해진마저 폐지되었고 현재까지 장보고의 딸은 어떻게 되었는지 불명하다. 다만 일본의 자료에는 841년 음력 11월에 참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타
일본에서는 교토 시 북쪽의 히에이산(比睿山)에 세운 적산선원에서 장보고를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으로 받들고 있으며,
16세기 센고쿠 시대의 명장 다케다 신겐은 장보고를 가문의 수호신인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으로 받들었다.
교토의 연력사(엔랴쿠지)에서도 일본 승려 엔닌이 세운 장보고 기념비를 발견할 수 있다.
KBS 드라마 '해신'을 보고...
해신 장보고! 무역왕 장보고!
그의 인생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처절하였기에, 그리고 맺힌 한이 많았기에 그는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누구보다도 뛰어난 기질을 발휘하였던 인물로 생각된다. 물론 드라마에서 일부 과장되거나 허구적인 사실을 첨가하여 재미있고 애절하게 만들어 시청자들에게 방영된 작품이다. 그러나 비교적 역사적인 사실에 치중하려 노력하였고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 드라마였다. 그러나 시청율이 저조하여 방송사 입장에서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한 드라마로 판단된다. 그만큼 장보고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관심도가 낮다는 증거이며 그의 원대한 꿈과 영웅적인 치적에 대해 인식을 크게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의 조작도 한몫하고 있지만, 지리적인 위치나 해상 교통로의 조건 등을 고려할 때 오늘날 우리 나라가 무역업이 번창하고 경제력이 성장한 것은 바로 장보고 같은 원대한 꿈을 실현시킨 사람들의 몫이 될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에서 단지 그에 대한 험이라면, 정과 신의를 지닌 의협심이 강한 사람으로 신라 조정의 권력 다툼에 뛰어든 것일 것이다. 그로인해 그는 신무왕이 즉위하고 6개월 만에 갑자기 죽게되자 김영을 포함한 신라 귀족들의 반발로 조정과 반목을 하게 되고 결국은 김양의 계략으로 청해진을 찿아온 염장의 칼을 맞고 죽게되고 청해진은 와해되어 버린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도 유망 기업체 장이 정치권력의 틈바구니에 개입하여 권력을 기웃거리거나, 반대로 기업체 장 자리를 탐내는 인물들이 정치권이 바뀔때마다 낙하산 인사로 자리를 꿰차고 내려온다. 그들은 전문성도 의지도 없는 인물들로 세월만 보내며 자신의 치부는 물론 정치권력의 비자금 마련에만 골몰하고 있을 것이다. 이같은 것도 장보고를 무력화시킨 신라 조정이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산동반도에 위치한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
해적들의 준동, 부모 살해, 노예 생활, 무술 단련, 도망, 죽음 직전의 구원, 연인 정화와 끈질긴 인연, 동생 정연과 동거동락, 염장과 영원한 적수, 당나라 상단 호위무사, 뛰어난 장사 수완, 양주 일대 상권 장악, 이사도의 난, 상단 호위무사 무령군에 합류, 군량미 수송, 트벳 상단 실패, 무령군 소속으로 혁혁한 무공 달성, 무령군 소장으로 진급, 이사도의 마지막 말- 고구려 후예로서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 고구려와 신라는 같은 민족이며 당나라의 개가 되어 같은 민족의 궐기를 진압하는 당군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는 점 등이다.
그후 그는 무령군 총관 자리도 마다하고 군복을 벗고 상단을 키우는데 열중하는데, 해적들의 준동으로 대상단이 약탈을 당하게 되자 해적들을 퇴치하기 위해 신라로 돌아간다. 무장 세력이라는 이유로 무진주 도독이 덕진포에 상륙을 거부하여 여러 날을 보내면서 상륙을 못하고 있다가 장보고가 임의로 상륙을 감행하자 달려온 무진주 군대와 대치하고 있던 중 전 시중 김우징의 배려로 덕진포에 상륙하게 되고 결국은 청해진에 진을 설치하게 된다. 그후 장보고는 김우징의 조언과 도움, 배려로 청해진에 진을 설치하게 되고 해적 소탕에 전념하게 된다. 결국 장보고는 김우징의 은혜를 입게 된 것이다.
당시 신라 조정은 후반기로 내리막 길을 걷고 있던 시기였다. 내부적으로 왕위 쟁탈전이 반복되었고 짧은 기간이 여러 왕들이 바뀌는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잇던 시기였다. 반복되는 정정으로 반정 공신들로 채워진 새로운 조정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하고 있던 시절이라, 그는 김우징의 반역에 동참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 신라 정치권력 투쟁에 휩쓸리게 되었고, 내정에 깊이 개입하다보니 그도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김우징(신무왕)의 반정에 청해진 군대를 동원하게 되었고 청해진-무진주-달구벌-황도로 공격하여 10만의 관군을 괴멸시키면서 반정에 성공하게 된다.반정의 성공으로 새로 왕위에 즉위한 신무왕의 신임을 받게 되면서 신라 조정에서는 절대권력의 소유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조정과 관군의 무능으로 장보고의 청해진 군대를 제어할 수가 없었고 그는 신라 조정의 말을 듣지 않는(?) 등 통제하기 힘든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을 잘 듣지 앟았다는 이야기는 조작이며 과장인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가 그렇게 미련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신라인의 후예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기록은 장보고를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이렇게 기록하였지만, 신라 조정 관리들의 탐욕스런 요구를 장보고는 일일이 받아들기가 어려워 거절하였던 것이다.
결국은 신무왕이 짧은 치세로 갑자기 죽고, 신무왕의 어린 아들 문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신무왕이 약속하였던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는 문제가 도화선이 되었다. 중신들은 장보고가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자신의 딸이 왕비 책봉이 거부되자, 장보고는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이에 장보고는 신라 조정과 반목하게 되고 문성왕은 장보고가 언제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이끌고 언제 서라벌 도성으로 공격해 올 것인지에 대해 노심초사하고 있던 중 염장이 나타나 자기가 장보고의 목을 베어 오겠다고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해신' 드라마에서는 장보고의 자식이 아들이었고 아직 강보에 싸인 상태라 삼국사기의 왕후 책봉 문제로 장보고가 분노하였고 신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는 기록은 조작인듯하다. 그리고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살해한 것은 사실인듯하나 장보고를 죽이고 청해진을 와해시킨 것은 장보고의 힘이 강대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제거하기 위해서 당시 실권자인 김영의 계략이었다는 것이 드라마 스토리다.
왕의 밀명을 받은 염장은 왕에게 쫒기는 몸이 된 것처럼 위장하여 청해진의 장보고를 찿아간다. 뜻밖에 찿아온 염장을 만난 장보고는 그를 측은하게 여겨 큰 연회를 베풀고 그를 환영하던 중 취기가 돌자 염장이 장보고 옆에 있던 칼을 순식간에 뽑아 장보고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갑작스런 장보고의 절명으로 청해진 군대는 염장의 손에 장악되었고 나중에는 청해진 군대가 해체되었으며 염장은 문성왕의 환대를 받고 신라 조정에서 이찬의 벼슬까지 올랐다. 그러나 드라마 해신에서는 김영의 계략으로 염장이 먼저 청해진으로 가서 장보고를 죽이고 나면 관군이 공격하여 청해진을 와해시켰고 부하 수하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그런 와중에 장보고의 부인도 죽고 친구 장연, 스승 무창도 죽는다. 장보고의 오랜 연인 정화는 그런 와중에 강보에 싸인 장보고의 어린 아기를 안고 염장의 도움으로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고 떠나는게 마지막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이다.
'당으로 가는 배가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갑판위에는 정화가 서있고 장보고의 유골함을 열고 재를 바다에 뿌린다. 바람을 따라 푸른 바다 위를 자유롭게 흩날리는데...
"그 옛날 사향도에서......당신은......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다를 당신은 서럽고 아픈 곳이라 하셨지요. 당신과 인연이 그토록 서글픈 인연이었던 것도 평생을 당신 가슴에 일렁인 서럽고 아픈 바다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이제 당신을 보냅니다. 나는 당신이 사랑한 청해의 눈부신 햇살과 흰 조약돌, 모래알까지 기슴에 담고...... 오렛도록..../..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겠습니다." 라며 끝을 맺고 있다.'
완도 청해진 앞바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장보고의 목을 벤 염장은 그후 벼슬이 이찬까지 올라 출세하여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잘 보냈을 것이나, 그 후 신라는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오로지 권력만 유지하려 한 문성왕이란 어린 무능한 왕과 부패한 신라 조정이 얼마나 오래 갔을 것인가는 상상이 갈 것이다. 그러한 나라는 절대로 오래 갈 수가 없다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공의가 사라지고 정의가 실종되고 정도가 사라진, 부패와 비리가 판치는 나라, 관료가 부패하고 권력이 오로지 권력 쟁탈에만 몰두할 때 백성들은 가난과 차별, 억울함에 고통받게 되면 백성은 정치권을 외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특히 나라 일을 하는 관리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득에 급급하여 탐욕을 부리다보면 자신은 물론 나라까지 무너지게 된다는 이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장보고가 신라 정치권에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무역업에만 종사하면서 꿈을 이루었다면,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자신의 딸에 대해 왕비로 책봉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면, 그는 남은 인생을 더욱 위대하게 보냈을 지도 모르고 청해진에서 이룬 막대한 부로 인하여 신라는 다시 증흥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럴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 위치까지 오르기까지 자신을 도우며 희생을 감당했던 정화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부탁을 물리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화 연인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 그의 심장을 타오르게 하였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묵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열혈사나이였다. 정화라는 여인도 장보고의 앞길에 자신이 걸림돌이 되지 않토록 스스로 비켰으며 장보고의 어려움에는 자신도 모르게 발벗고 나섰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무서운 힘을 보여주는 감동의 드라마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장보고는 결국은 권력에 대한 탐욕을 부린 것이며 신분 상승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우리는 탐욕이라 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탐욕을 뿌리치기는 힘들 것이다. 반정 궐기에 김우징을 도운 것도, 염장을 환대한 것도 장보고 입장에서는 모두가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의와 고마움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드라마는 장보고의 탐욕에 대해서 그렇지 않았다. 장보고는 탐욕을 버리고 오로지 청해진의 발전이 바로 신라의 발전이라는 등식을 알고 있었고, 조정은 이미 혼탁의 도를 넘어섰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관직도 마다하고 황도에 머무르며 신문왕을 보좌해 달라는 왕의 권유도 거절했다. 그래서 그는 반정 성공후에는 미련없이 청해진으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오늘날 소위 성공한 사람들...권력과 힘(돈, 무력)을 가진 사람 주변에는 많은 기회주의자와 아첨꾼, 간신들이 몰려든다. 오늘날 정치 권력 주변이나 공기업, 큰 재력을 가진 기업 총수나 회장, 사장들에게 주변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과 이치가 같다. 그러나 그와 경쟁하거나 그를 시기하는 무리도 같이 주변이 물려든다. 성공한 사람들이 언제 그들의 칼, 총, 법, 권력 앞에 무너질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이 세상에는 영원한 권력도 없으며 영원한 삶도 없다. 최근 리비아 카다피의 종말을 바라보면서 김정일,김정은, 그리고 중국의 정치지도부들이 그 사실을 깨닭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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