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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65 : 신라의 역사 64 (제44대 민애왕) 본문
한국의 역사 165 : 신라의 역사 64 (제44대 민애왕)
제44대 민애왕
민애왕(閔哀王, 817년 ~ 839년, 재위: 838년~839년)은 신라의 제44대 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명(明)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인 김충공(金忠恭, 후에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봉)이고 어머니는 귀보부인(貴寶夫人, 후에 선의태후(宣懿太后)로 추봉)이다.
생애
흥덕왕 10년(835년) 2월 김균정이 상대등으로 취임하여 그의 아들 김우징이 시중을 퇴임하면서, 당시 대아찬이었던 김명이 후임 시중이 되었다.
흥덕왕의 사후, 김균정과 김제륭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란이 일어났고, 아찬 이홍(利弘)과 함께 싸움에 이겨 제륭을 옹립하고, 왕으로 즉위 시켰다. 희강왕의 즉위 후, 837년 1월에 상대등이 되었고, 이홍이 시중이 되어 반대파를 압도하는 입장이 되었다.
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 대사의 장보고 앞으로 집결하고 반격을 모의 하고 있었지만, 838년 1월에 김명은 이홍과 함께 사병을 이용하여 희강왕의 측근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으로 희강왕이 왕궁에서 자살하였고, 김명은 자립하고 왕위에 들었다.
장보고의 아래에서 집결한 김우징등의 일파는 838년 3월에 군사를 일으켜, 우징파 김양(金陽)이 무주(광주광역시)를 공격했고, 그리고 남원소경을 함락 시켰다.
12월이 되어 김양이 무주 철야현(전라남도 나주시)까지 군사을 이동시켰고,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를 보내어 요격 했지만, 김양군과의 전투에서 괴멸 했다.
839년 1월 19일, 김양군이 달벌(대구광역시)에까지 진출하였고, 왕은 금군(禁軍)을 이용하여 방어전에 노력했지만 이루어지지 않고, 군사의 반수 이상이 전사했다.
이 패전 소식을 들은 왕의 측근은 모두 도망가 버려, 왕도 또 월유택이라고 하는 별궁에 도망쳐 숨어 있었지만, 김양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839년 1월 22일에 사망했다고 하고 있다.
가족
- 할아버지 : 김인겸- 혜충대왕으로 추봉, 원성왕의 장자.
- 아버지 : 김충공(金忠恭) -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봉.
- 어머니 : 귀보부인 박씨(貴寶夫人 朴氏)
- 누이 : 문목왕후(文穆王后) - 희강왕의 왕후
- 누이 : 조명부인(照明夫人) - 신무왕의 계비, 헌안왕의 생모
- 부인 : 윤용왕후 김씨(允容王后 金氏) - 각간 영공의 딸.
참고
신라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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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대 (기원전 57년 - 654년) |
혁거세 거서간 · 남해 차차웅 · 유리 이사금 · 탈해 이사금 · 파사 이사금 · 지마 이사금 · 일성 이사금 · 아달라 이사금 · 벌휴 이사금 · 내해 이사금 · 조분 이사금 · 첨해 이사금 · 미추 이사금 · 유례 이사금 · 기림 이사금 · 흘해 이사금 · 내물 마립간 · 실성 마립간 · 눌지 마립간 · 자비 마립간 · 소지 마립간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신라 중대 (654년 - 780년) |
태종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 |
신라 하대 (780년 - 935년) |
선덕왕 · 원성왕 · 소성왕 · 애장왕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민애왕 · 신무왕 · 문성왕 · 헌안왕 · 경문왕 ·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 신덕왕 · 경명왕 · 경애왕 · 경순왕 |
제44대 민애왕 실록
( ? ~ 서기 839년, 재위기간 : 서기 838년 정월~ 839년 윤 정월, 1년 1개월)
1. 민애왕의 왕위 찬탈과 처참한 말로
민애왕은 원성왕의 손자 대아찬 충공의 아들이며, 귀보부인 박씨 소생이다. 이름은 명이며 헌덕왕 대부터 여러 벼슬을 거쳐 희강왕을 보좌한 덕으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가, 838년 정월에 시중 이홍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아버지 충공을 선강대왕, 어머니 귀보부인을 선의태후로 추존하고, 김귀를 상대등, 헌중을 시중으로 삼았다.
김명의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균정파의 김양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징을 만나 김명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그를 응징하고자 제의했다. 이에 우징이 장보고에게 이렇게 말했다.
해상왕 장보고
"김명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이홍도 왕과 아버지를 함부로 살해했으므로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원수요. 원컨데 장군의 군대를 빌려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그러자 장보고가 말했다.
" 옛 말에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용기가 없는 자라고 했으니, 내 비록 용렬하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래서 장보고는 군사 5천을 동원하여 친구인 정년에게 주면서 말했다.
"자네가 아니면 이 난국을 평정하지 못할 것이네."
장보고의 군사는 그해 12월에 출병했다. 김양이 평동장군에 임명되어 염장을 비롯하여 장변, 정년,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을 거느리고 내륙으로 진군했다.
민애왕은 그 소식을 듣고 대감 김민주에게 군사 3천을 내주고 장보고의 군대를 막도록 했다. 정부군과 청해진 군대는 무주의 철야현에서 격돌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김민주는 대패하여 군사를 모두 잃었다.
첯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청해진 군대는 기세가 올라 곧장 나주를 거쳐 서라벌로 향했다. 이듬해 윤 정월 19일에 달구벌(대구)에 이르렀다. 그 소식에 민애왕은 이찬 대흔과 대아찬 윤린, 의훈에게 군사를 내주고 대응토록 했다. 그러나 정부군은 청해진 군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김양은 단번에 정부군의 절반을 궤멸시키고 서라벌로 달려갔다.
민애왕은 청해진 군대가 밀려오자, 궁궐 서쪽의 교외에 몸을 숨기고 측근들은 모두 겁을 먹고 흩어졌다. 그는 혼자 별궁인 월유택으로 도망하여 숨었다. 하지만 결국 청해진 군대의 수색에 걸려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때가 839년 윤 정월 22일이니, 왕위에 오른지 불과 13개월 만이었다.
민애왕의 부인은 윤영왕후이다. 그녀는 각간 영공의 딸이다. 민애왕이 살해될 때 가족들도 모두 같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기타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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