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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63 : 신라의 역사 62 (제42대 흥덕왕)

두바퀴인생 2011. 2. 21. 15:27

 

 

 

한국의 역사 163 : 신라의 역사 62 (제42대 흥덕왕)

 

 

제42대 흥덕왕

흥덕왕(興德王, 777년 ~ 836년, 재위: 826년 ~ 836년)은 신라의 제42대 왕이며, 초명은 수종(秀宗), 수승(秀升)이었다가 후에 경휘(景徽)로 개명했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태자 김인겸(金仁謙), 어머니는 각간 김신술(金神述)의 딸 숙정부인(淑貞夫人, 소성왕에 의해 성목태후으로 추봉)이며, 소성왕, 헌덕왕의 한 동생이다. 왕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章和夫人)이다.

 

생애

형 현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는데 가담하여 이찬이 되었고,

 

819년 2월 현직 상대등 김숭빈(金崇斌)이 사망하여, 후임으로 상대등이 되었고,

 

822년 1월에는 부군(副君)에 책봉 되었어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였지만 삼국사기에는 헌덕왕에게는 김헌장(金憲章), 김장렴(金張廉)등의 왕자가 있었지만, 왕자들 보다 세력이 강하고 조정을 장악하여 부군으로 책봉된것으로 추정된다. 826년 헌덕왕이 죽자 왕위에 오른다.

 

치세

당 문종에게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사지절대도독 계림주제군사 겸지절충녕해군사 신라왕(開府儀同三司 検校太尉 使侍節大都督 雞林州諸軍事 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王)으로 책봉받았고, 구당서신당서의 신라전에는 태화 5년(831년)이라고 하였지만, 삼국사기는 이 책봉에 대해서는 흥덕왕 2년(827년)으로 하고 있다. 또, 이 책봉 시에, 왕모 박씨를 대비, 왕비 박씨를 왕비에게 책봉하는 일도 아울러 행해졌다.

 

당나라에 조공을 계속하여 문물의 초래에 노력하고 827년에 당나라에 들어간 구 고구려계의 승려 구덕(丘德)은 경전을 가지고 돌아갔다.

 

또, 828년에 귀국한 김대렴(金大廉)이 가지고 돌아간 차의 종자를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한 이후에 영호남을 차의 본 고장으로 만들었다.

 

국내에서는 827년에 한산주 표천현 사는 어떤 자가 빨리 부자가 되는 방법이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하자 그를 먼 섬으로 추방하였다.

 

828년 장보고로 하여금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였다.

 

832년 봄 여름에 가뭄이 계속되었고, 정전을 나가지 않고 음식도 줄이며 기우제를 지넸다. 7월 큰 비로 흉작이 되어 굶주린 민중이 도적이 되어 봉기 하였다.

 

833년 온 나라가 기근에 시달렸고,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그 다음해 10월에는 각지에 사자를 파견하고 백성들을 위문하고 곡식과 베를 하사하였다.

삼국유사에는 흥덕왕이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836년 12월에 사망하여, 유언에 따라서 장화부인의 능에 합장 되었다고 하여, 그 왕릉은 경주시 안강읍의 사적 제 30호가 비정 되고 있다. 그리고 흥덕왕 비문에는 신라 태조를 태조 성한왕이라고 하였다.

 

왕비

흥덕왕이 826년 10월에 즉위 한 후, 12월에는 왕비 장화부인이 죽어, 왕은 몹시 슬퍼했다. 군신은 후비를 넣는 것을 진언 했지만, 왕은 "외짝 새도 제 짝을 잃은 슬픔을 가지거늘,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었는데 어떻게 무정하게도 금방 다시 장가를 든다는 말인가?" 라고 하고, 후비를 맞이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또, 후궁의 시녀를 접근하는 일도 하지 않고, 왕의 좌우에는 단지 내시만이 있었다고 한다. 시호를 정목왕후(定穆王后)라고 하였다.

왕비를 잃은 슬픔을 한 쌍의 새에게 비유했던 것에 대해서, 삼국유사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가계

  • 아버지 : 혜충태자 김인겸
  • 어머니 : 성목태후 김씨
  • 왕후 : 정목왕후 김씨(定穆王后 金氏, 장화부인)
    • 아들 : 김능유(金能儒)
  • 후비 : 왕후 박씨(王后 朴氏) - 흥덕왕 2년에 당 문종이 지절사에 의해 왕비로 책봉되었다.

 

참고

 

 

  

제42대 흥덕왕 실록

( ? ~ 서기 836년, 재위기간 : 서기 826년 10월~ 836년 12월, 10년 2개월)

 

1. 아내와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병마에 시달리는 흥덕왕

흥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셋째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과 헌덕왕의 동복 아우이다. 초명은 수종이었다가 왕위에 오른 뒤에 경휘로 고쳤다.

 

그는 형 헌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는데 가담하여 반정을 성공시키고 이찬이 되었다. 헌덕왕 11년 (819년)에 상대등이 되었다. 그리고 822년에는 부군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권을 확보한 뒤, 826년 10월 헌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헌덕왕은 왕자가 여럿 있었는데도 동생인 그를 부군으로 책봉하여 왕위를 계승토록 한 것은 그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찬탈한 왕위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반정 성공으로 왕위에 오른 자신과 그에 대한 아우의 공을 인정해주어 자신을 이어 왕위를 잇도록 해줌으로써 피를 부르는 살육을 방지하고픈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막강한 권력을 배경으로 왕위에 오른 흥덕왕이었지만, 그의 치세는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는 즉위한 지 두 달 만에 사랑하는 아내 장화부인을 잃었다. 그는 그녀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매일같이 슬퍼하며 지냈다. 신하들은 표문을 올려 새로운 왕비를 맞이할 것을 간청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그로부터 4년 후 결국 그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왕권은 미약해지고, 조정 대신들 사이에 세력 다툼이 치열해졌다. 흥덕왕은 애장왕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왕위를 계승한 만큼, 흥덕왕이 죽은 뒤에도 반정에 가담했던 세력 중에서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곧 왕위 계승권을 두고 다툼의 불씨가 되고 있었다.

 

흥덕왕은 와병 중에도 불행한 일들을 격어야 했다. 재위 6년에 아들 김능유를 비롯하여 승려 아홉 명을 당나라에 보냈다. 그런데 그들이 7월에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아내의 죽음에 이어 또다시 아들의 죽음마저 닥치자, 흥덕왕은 몹시 절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재위 6년에는 지진이 일어나고, 7년에는 봄과 여름에 걸쳐 심한 가뭄이 들어 땅이 붉게 변하고 논바닥이 갈라졌다. 흥덕왕은 정전에 나가지 않고, 음식도 줄이며 기우제를 지냈다. 다행히 그해 7월에 비가 내려 한숨 돌렸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오랜 가뭄으로 흉년이 닥쳤고, 그 때문에 곳곳에서 도적 떼가 흥기하여 민가와 관가를 습격하였다.

 

그 여파로 재위 8년에는 온 나라가 기근에 시달렸고,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은 사태가 벌어졌다. 겨울로 접어드는 10월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는 이상 기온까지 겹쳤고, 전염병이  돌아 곳곳에 시체가 늘어져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듯 혼란이 계속되자, 흥덕왕은 재위 9년 9월에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서형산 아래로 행차하여 군대를 사열하고, 국가 기강을 다잡는 데 주력했다. 10월에는 기근과 도적 떼로 몸살을 앓고 있던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직접 순행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고 곡식과 베를 하사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재위 10년에 상대등과 시중을 모두 교체하여 조정을 정비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재위 11년(836년) 12월에 죽고 말았다.

 

그의 치세 중에 주목할 만한 일이 몇 가지 있는데, 우선 재위 3년째인 828년에 당나라에서 군중소장으로 있던 궁복(장보고)가 신라로 돌아와서 청해진(완도)에 터를 잡았다. 흥덕왕은 그를 청해대사로 임명하고 해상을 지키게 하였다. 장보고는 훗날 왕위 계승 전쟁에 깊숙히 가담하게 된다.

 

이 해에 한산주 표천현에 사는 어떤 자가 빨리 부자가 되는비결이 있다며 사람들을 현혹하자, 흥덕왕은 그를 먼 섬으로 추방하였다.

 

또 같은 해 12월에 당에서 귀국한 사신 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와서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시절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여 영호남을 차의 본고장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흥덕왕의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마련되었으니, 그의 유언에 따라 정목왕후의 능에 합장된 것이다.

 

 

2. 흥덕왕의 가족들

흥덕왕은 두 부인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었다. 첯 부인은 정목왕후 김씨이며 왕자 능유가 그녀 소생이다. 돌째 부인은 박씨인데, 시호는 전하지 않는다.

 

정목왕후 김씨(?~826년)

정목왕후는 소성왕의 딸이니, 그녀는 삼촌과 결혼한 셈이다. 흥덕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시집왔으며, 흥덕왕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원래 정화부인으로 불리다가 죽은 후에 정목왕후에 추봉되었다.

 

흥덕왕은 정화부인을 몹시 사랑했던 모양이다. 그의 즉위 두 달 만인 826년 12월에 그녀가 죽자, 너무 슬퍼하여 매일같이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신하들이 새 왕비를 맞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자, 흥덕왕은 이렇게 말했다.

 

"짝을 잃은 새도 그 슬픔을 간직하거늘, 어찌 좋은 배필을 잃고 무정하게도 곧바로 부인을 얻겠는가?"

 

흥덕왕은 심지어 시녀들도 일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고, 오직 내시 두 사람만 주변에 머물도록 했다 한다.

 

그 모습을 애처롭게 여긴 신하 하나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앵무새 한 상을 선물했다. 그런데 그만 암눔이 죽고 수눔만 홀로 남아 늘 구슬프게 울었다. 그래서 흥덕왕은 거울을 하나 구해와 수눔 앵무새 앞에 걸어 주었다. 앵무새는 거울 속에 있는 새가 제 짝인 줄 알았다가 거울을 쪼아보고는 그것이 그림자인 줄 알고 더욱 구슬프게 울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흥덕왕은 그 앵무새를 위해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둘째 왕후 박씨(생몰년 미상)

박씨는 이름도 시호도 전하지 않는다. 다만 흥덕왕 2년 2월에 당나라 문종이 지절사를 보내 '아내 박씨를 왕후로 책봉하였다.'는 구절만 전할 뿐이다.

 

이 기록은 흥덕왕이 신하들의 강한 요청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새 왕비를 맞아들였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것도 아내가 죽은 지 불과 두 달 만에. 당시 왕실에선 왕비의 역활이 매우 중요하였으므로 흥덕왕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이 새로운 왕비를 간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왕비의 집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능유(?~831년)

능유는 흥덕왕의 장남이며 정목왕후 김씨 소생이다.

 

그의 출생과 성장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 831년 2월에 왕명을 받아 승려 아홉 명과 같이 당나라에 진종사로 갔다 7월에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모두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는 기록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