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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62 : 신라의 역사 61 (제41대 헌덕왕) 본문
한국의 역사 162 : 신라의 역사 61 (제41대 헌덕왕)
제41대 헌덕왕
헌덕왕(憲德王, ?~826년, 재위: 809년~826년)은 신라의 제41대 왕이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언승(彦昇)이고, 신라 원성왕의 장남 인겸의 차남으로 소성왕의 동생이다.
생애
원성왕 6년(790년)에 사자로서 당나라로 갔고, 귀국후에 대아찬이 되었다.
다음 791년 전 시중 제공(悌恭)의 반란 진압에 공적을 세었고,
794년에는 당시 시중 김숭빈(金崇斌)이 물러나고 언승이 시중에 발탁 되었다.
795년에는 이찬, 796년에는 병부령(兵部令)을 거치고,
800년에 애장왕이 즉위 하면서 그 섭정이 되었다.
게다가 801년에는 왕의 행차를 총괄하는 책임자가 되어, 그 다음에는 상대등이 되었다.
809년 7월 동생과 함께 애장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를 이었다.
즉위 하면서 즉시 당에 사자를 파견하여 선대의 애장왕의 죽음을 전하고 당 헌종에게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위 지절 대도독 계림주제군사 겸지절충영해군사 상주국 신라왕(開府儀同三司 検校大尉 持節大都督 雞林州諸軍事 兼持節充寧海軍使 上柱國 新羅王)에게 책봉 되었다. 이 때 왕비에 대한 책명에서는 왕비는 정씨(貞氏)로 되어 있지만 실은 김씨이다.
그 후도 당에 대해서는 810년 10월에 왕자 김헌장(金憲章)을 보내 금은제의 불상등을 헌상 한 것 외, 정기적으로 조공을 행했다.
또, 819년 7월에는 당의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병마를 징병하는 헌종 조칙에 응해 장군 김웅원(金雄元)등 3만의 군사를 파견해, 당나라를 지원하였다.
812년 9월에는 발해에도 사자를 파견하고 동향을 보고 있었고, 선왕 대인수가 즉위하고 긴장이 되자,
후에 826년 7월 한산주 이북의 주 군으로부터 1만명을 징병 하여 대동강가에 300리 장성를 쌓고, 발해의 남하를 막는 준비를 하였다.
한편, 김헌창(金憲昌)이 822년 3월에 반란을 일으켜, 웅진(熊津)을 수도로 하고 장안국(長安國)이라고 하였고, 그 지배 영역은 무진주, 청주, 웅천주, 완산주, 사벌주 등 5주 및 국원, 서원, 금관 3소경등 구 백제의 영역을 중심으로 국토의 대부분이 김헌창을 지지하여, 왕권에 대항하는 자세를 보이게 되었다.
김헌창의 반란은 1개월 정도로 진압되었지만, 난의 진압에 활약한 토벌군은 귀족의 사병과 화랑 집단이며, 율령 체제 아래에서의 병제는 유명 무실화 하고 있는 것이 드러났다.
825년 1월에는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고달산(高達山, 경기도 여주군)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 반란은 북한산주 도독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826년 10월에 사망하여, 그 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의 사적 제 29호가 비정 되고 있다.
가계
- 부인 : 귀승부인 김씨(貴勝夫人 金氏) - 헌덕왕의 숙부인 각간 예영(禮英)의 딸이며, 당나라에서의 책봉에는 정씨(貞氏)라고 하였다.
참고
신라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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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대 (기원전 57년 - 654년) |
혁거세 거서간 · 남해 차차웅 · 유리 이사금 · 탈해 이사금 · 파사 이사금 · 지마 이사금 · 일성 이사금 · 아달라 이사금 · 벌휴 이사금 · 내해 이사금 · 조분 이사금 · 첨해 이사금 · 미추 이사금 · 유례 이사금 · 기림 이사금 · 흘해 이사금 · 내물 마립간 · 실성 마립간 · 눌지 마립간 · 자비 마립간 · 소지 마립간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신라 중대 (654년 - 780년) |
태종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 효소왕 ·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 |
신라 하대 (780년 - 935년) |
선덕왕 · 원성왕 · 소성왕 · 애장왕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민애왕 · 신무왕 · 문성왕 · 헌안왕 · 경문왕 ·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 신덕왕 · 경명왕 · 경애왕 · 경순왕 |
제41대 헌덕왕 실록
( ? ~ 서기 826년, 재위기간 : 서기 809년 7월~ 826년 10월, 17년 3개월)
1. 헌덕왕의 측근정치와 김헌창의 난
헌덕왕은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며, 성목태후 김씨 소생으로 소성왕의 동복 아우이다. 이름은 언승이며, 소성왕이 죽은 뒤에 어린 애장왕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이 되었다가, 애장왕 10년(809년)에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원성왕 6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그후 대아찬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이찬 제공의 역모 사건을 해결하여 공을 세웠으며, 이 일로 잡찬에 올랐다. 원성왕 10년에는 시중이 되었고, 11년에는 이찬으로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며, 12년에는 병부령에 임명되었다. 애장왕 원년에 각간에 올라 섭정을 하였고, 2년에는 어룡성 사신이 되었다가 곧 상대등에 올랐다. 그리고 애장왕이 성장하여 친정을 하려 하자, 조카 제륭, 아우 수종 등과 함께 반정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왕위를 찬탈한 까닭에 헌덕왕의 정치는 함께 반정을 꾀한 친위 세력 위주의 측근정치 형태로 이뤄질 수 밖에 없었다. 함께 반정에 가담한 자들은 그의 아우 수종(흥덕왕)을 비롯하여 조카 제륭, 양종, 언흥, 충영, 숭정, 균정, 영공, 헌정 등이었는데, 헌덕왕은 그들을 차례로 시중에 기용하면서 조정을 장악하였다. 그 덕분에 헌덕왕은 재위10년까지는 조정이 비교적 안정된 편이었다.
그러나 인사의 편중이 심한 탓에 불만 세력이 늘어났다. 특히 지방으로 방출당한 관리들의 불만이 팽배해져 지방 행정이 급격히 약화되었고, 그로인해 재위 11년부터 지방 곳곳에서 초적들이 일어났다. 헌덕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들에게 명하여 초적들과 전면전을 펼쳐 그들을 토벌하도록 했다.
그 무렵, 당나라에서는 이사도의 난이 일어났다. 당시 당나라는 환관들이 조정을 장악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있었는데, 이사도가 이에 불만을 품고 봉기한 것이다. 당나라 헌종은 자력으로 이사도의 난을 진압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하고, 신라에 군대를 요청했다. 그러자 헌덕왕은 군사 3만을 보내 당을 돕도록 했다.
이렇듯 당나라는 신라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국정이 문란해 지고 있을 무렵, 신라 내부에서도 번역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왕위를 노리고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은 선덕왕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선덕왕을 이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하필 그날 폭우가 내려 알천 냇물을 건너지 못해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궁궐로 가지 못한 사이 조정에서는 원성왕파들의 계략으로 다시 공론이 일어 왕위 계승자가 바뀌는 바람에 왕위를 원성왕에게 내준 불운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김주원은 항상 왕위를 도둑맞은 사실에 분개하고 있었고, 그런 생각은 아들 헌창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김헌창은 애장왕 8년에 행정부의 수반인 시중에 임명되었고, 헌덕왕이 반정을 일으킬 당시에도 그 자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 후 헌덕왕 대에도 벼슬을 유지한 것을 보면, 그도 반정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후 그는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된다. 헌덕왕이 들어서자, 그는 시중 직위에서 밀려나 무진주 도독으로 좌천되었고, 814년에 다시 중앙으로 불려와 시중이 되었으나, 헌덕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아마 그는 현명하지 못했던 인물인 것 같다. 그래서 그는 816년 다시 외직인 청주 도독으로 발령났으며, 821년에 다시 웅천주 도독으로 발령이 났다. 말하자면 그는 외직을 돌며 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였던 것이다.
김헌창은 이런 현실에 불만을 품고 822년 3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에 헌덕왕은 아우 수종을 부군(왕위 계승권자)으로 삼았는데, 헌창은 수종이 부군이 된 것도 몹시 못마땅하였던 모양이다. 선덕왕을 이어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올랐다면, 아마 지금쯤 헌창은 아마 왕좌에 앉아 있거나 왕위 계승권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고, 왕위는 커녕 늘 찬밥 신세가 되어 수 년 동안 외직을 떠돌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비통해하며 한탄하다가 역모를 획책하게 된 것이다.
헌창이 외직을 두루 돌아다닌 덕에 그의 봉기에 호응하는 곳이 많았다. 반군의 깃발을 들자 순식간에 무진, 완산, 청주, 사벌 등 네 주가 호응하여 그의 수중에 떨어졌고, 이에 그는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며 스스로 왕을 칭하며 반군을 이끌었다.
조정에서 헌창의 반란 소식을 접한 것은 3월 18일이었는데, 완산주의 장사 최웅과 영충 등이 가까스로 서라벌로 도주해 와 알렸던 것이다.
그 무렵, 헌창의 반란 소식은 순식간에 각 지역으로 퍼졌다. 그러나 한산주, 우두주, 삼량주, 패강진, 북원경 등에서는 헌창에게 호응하지 않고, 자체 수비를 강화하면서 반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에 헌덕왕은 경군을 동원하여 서라벌 주변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군대를 위공과 제륭, 균정, 웅원, 우징 등에게 맡겨 헌창의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부군의 진압 작전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헌창의 반란군은 곳곳에서 무너졌다. 그러자 결국 웅진성으로 몰린 헌창은 웅진성에서 웅거하면서 수성전을 펼쳤으나,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었고, 반정이 실패한 것으로 판단한 헌창은 스스로 자결하였다.
헌창이 죽자, 그의 부하들이 헌창의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어 두었다. 한편 웅진성을 함락시킨 정부군은 헌창의 무덤을 찿아내 그의 시신을 다시 칼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모두 처형하였다.
하지만 헌창의 아들 법문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잔병들을 모아 산으로 도주하였고, 825년 정월에 부하들을 이끌고 북한산주를 공격했다. 그는 그곳에서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건국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북한산주 도독 총명에게 결국 패배하여 처형되고 말았다.
헌덕왕도 그 이듬해 10월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능은 천림사 북쪽에 마련되었다.
2. 헌덕왕의 가족들
헌덕왕은 황아왕후에게서 아들 둘을 얻었다. 그녀는 원래 귀승부인으로 불리다가 헌덕왕이 왕위에 오른 뒤, 왕비에 책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그녀가 원성왕의 셋째 아들 각간 예영의 딸이라고 쓰고 있으나, 삼국유사는 각간 충공의 딸로 기록하고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녀는 아들 헌상과 장렴을 낳았다. 헌상은 810년 당으로 가서 금은으로 만든 불상과 불경을 당 순종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장렴은 817년 당에 보내져 조공하였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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