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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61 : 신라의 역사 60 (제40대 애장왕) 본문
한국의 역사 161 : 신라의 역사 60 (제40대 애장왕)
제40대 애장왕
애장왕(哀莊王, 788년~809년, 재위: 800년~809년)은 신라의 제40대 왕이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청명(淸明)이고, 나중에 중희(重熙)로 이름을 바꾸었다.
생애
800년 즉위하였을 때, 13세에 불과하였으므로 작은아버지인 병부령(兵部令) 김언승(金彦昇)의 섭정을 받았다.
805년에 공식(公式) 20여조를 반포하였고,
808년에 12도(道)에 사신을 파견하여 군(郡), 읍(邑)의 경계를 정하였다. 이것은 애장왕의 중앙과 지방제도에 대한 개혁조치라 할 수 있다.
즉위한 후, 어머니 계화(桂花)를 대왕후(大王后)에, 부인 박씨(朴氏, 또는 정(貞)씨/계월왕후(契月王后)라고 하나 근거 없음)를 왕비에 책봉하였다.
청주(菁州:지금의 진주)의 노거현(老居縣)을 학생녹읍(學生祿邑)으로 설정하였다.
사치와 항락을 일삼던 애장왕은 809년 김언승과 동생 제옹이 반란을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고 이때 애장왕은 동생 체명과 함께 살해당했다.
가계
참고
신라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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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상대 (기원전 57년 - 65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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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하대 (780년 - 9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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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대 애장왕 실록
( 서기 788 ~ 809년, 재위기간 : 서기 800년 6월~ 809년 7월, 9년 1개월)
1. 어린 애장왕의 즉위와 언승의 반정
애장왕은 소성왕의 장남이며, 계화부인 김씨 소생으로 초명은 청명이고, 욍위에 오른 뒤에 중희로 고쳤다. 788년에 태어났으며, 800년 6월 소성왕이 죽음을 앞두고 태자로 책봉했다. 같은 달에 소성왕이 죽자,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애장왕은 왕위에 오른긴 했으나, 너무 어린 탓에 숙부 언승(헌덕왕)이 섭정을 하였다. 당시 언승은 병부령의 위치에 있었는데, 곧 어룡성 사신으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상대등에 올랐다. 이에 따라 조정은 언승이 장악하였다.
하지만 애장왕이 성장하여 친정을 하려 하자, 언승 일파와 근왕 세력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애장왕이 친정을 요구한 때는 재위 6년 째인 805년인데, 이때 애장왕의 나이는 만 18세였다. 당시 사회에선 15세 이상이면 성인으로 대접받았던 점을 감안한다면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친정을 시작한 애장왕은 우선 자신의 모후 김씨를 태왕후로, 부인 박씨를 왕후로 봉하여 위엄을 세웠다. 또 행정 질서를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법안 20여 조를 반포하고, 12도에 특사를 파견하여 모든 군과 읍의 경계를 확정하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조치였다.
애장왕은 불교에 대해서도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불교의 사치스런 행사를 막기 위해 일체의 불교 행사에 비단과 금은으로 그릇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사신을 조원전으로 불러 접견하는 등 외교 문제도 손수 챙겼다.
일본과 관계 회복은 애장왕 즉위 초에 이뤄졌다. 이때 언승 일파는 애장왕의 당숙 균정을 거짓 왕자로 꾸며 대아찬 벼슬을 주고 왜국에 볼모로 보내려 하였다. 하지만 균정이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다. 언승 일파가 균정을 왜국에 볼모로 보내려 했다는 것은 균정이 애장왕의 측근이었다는 뜻이다. 언승은 애장왕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에게서 균정을 떼어 놓으려 했던 것이다.
그 뒤, 애장왕 4년(803년)에 정식으로 일본국과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성덕왕 30년(731년)에 일본의 침입 사건으로 단절되었던 두 나라의 외교 관계는 72년 만에 회복되었다.
왜왕은 신라와 우호 관계를 맺은 것을 기뻐하며 804년 5월에 사신에게 황금 3백 냥을 안겨 애장왕에게 선물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806년에 다시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애장왕은 그들을 접견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더욱 증진시켰다.
일본은 808년에도 사신을 보내왔고, 이번에도 역시 애장왕이 직접 그들을 맞이하면서 환대하였다.
이렇듯 애장왕이 내외의 정사를 직접 챙기기 시작하자 왕권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상대적으로 언승 일파의 힘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언승과 그의 조카 제륭이 결국 왕권을 찬탈하기 위해 반란을 도모하고, 군대를 일으켜 궁궐을 장악하였다. 반정에 성공한 언승은 곧 애장왕을 죽이고, 왕을 호위하고 있던 왕제 체명도 함게 죽였다. 이때가 애장왕 10년 째인 809년 7월이었다.
2. 애장왕의 가족들
애장왕은 부인을 둘 두었으나, 자식에 대한 기록은 없다.
정비 박씨가 언제 애장왕에게 시집왔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으며, 애장왕 10년에 왕후에 책봉된 사실만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그녀의 소생에 대한 기록도 없으며, 아마도 애장왕이 살해될 때에 자식들도 같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후궁 김씨는 아찬 김주벽의 딸로 애장왕 3년인 802년에 입궐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자세한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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