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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59 : 신라의 역사 58 (제38대 원성왕)

두바퀴인생 2011. 2. 17. 10:01

 

 

 

한국의 역사 159 : 신라의 역사 58 (제38대 원성왕)

 

 

제38대 원성왕

원성왕(元聖王, ? ~ 798년, 재위: 785년 ~ 798년)은 신라의 제38대 이다. 성은 김, 휘는 경신(敬信)이다. 삼국사기에는 원성왕은 선덕왕과 마찬가지로 내물왕의 10세손으로 되어 있다.

 

생애

김경신은 혜공왕 때 선대 경덕왕의 관제개혁을 원상복귀 시키는 일에 참여 하였다.

 

선덕왕 1년(780년) 이찬(伊飡)으로 상대등(上大等)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고 상대등에 올랐다. 선덕왕이 죽고 대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당과 통교하였다. 원성왕 4년(788년)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했고, 이어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여 농사를 장려했다.

 

김경신은 경덕왕성덕왕(김양상 외조부), 개성왕(추존, 김양상 아버지)의 사당을 허물고 자신의 부, 조부, 증조부의 사당을 세웠다. 또한 내물왕, 무열왕, 문무왕 및 조부인 흥평대왕(추존)과 부친인 명덕대왕(추존)을 국가 5묘로 지정하여, 자신의 조부와 아버지를 무열왕, 문무왕와 동등하게 만들었다.

 

원성왕은 자신의 고조부인 법선을 현성대왕, 증조부인 의관을 신영대왕, 할아버지 위문을 흥평대왕, 아버지 효양을 명덕대왕, 어머니를 소문태후로 추봉하였다.

 

신라 하대는 원성왕 시대가 기점이다. 김경신은 무열왕계 경덕왕과 자신의 동료였던 김양상의 아버지 개성왕, 외조부 성덕왕의 사당을 허물었다. 불국사을 만들어 자신의 부, 조부을 모셨다.

 

원성왕이 불국사을 만든 목적은 새로운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미가 포함되었다.

 

가계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경신의 가계는 복호-습보-지증-진종-흠운-마차-법선-의관-위문-효양이다.

기록이 정확하다면 무열왕과 "지증"까지는 같은 혈통이다.

  • 아버지 : 김효양
  • 어머니 : 계오부인 박씨
  • 왕후 :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 각간 김신술(神述)의 딸
    • 아들 : 인겸(仁謙) - 785년 태자 책봉, 791년 음력 1월 사망, 혜충태자(惠忠太子)에 추증되었다가 소성왕 즉위 후 혜충대왕으로 추존
      • 손자 : 준옹(俊邕) - 인겸의 아들로 794년 음력 4월 태자 책봉, 798년소성왕 즉위
        • 증손 : 청명(淸明) - 800년에 13세의 나이로 애장왕 즉위
        • 증손 : 체명(禮明) - 준옹의 아들, 살해됨
      • 손자 : 언승(彦昇) - 인겸의 아들로 809년헌덕왕 즉위
      • 손자 : 수종(秀宗) - 인겸의 아들로 826년흥덕왕 즉위
      • 손자 : 충공(忠恭) - 인겸의 아들로 혜충대왕(惠忠大王)으로 추봉되었다.
      • 손자 : 제옹(悌邕)
    • 아들 : 예영(禮英) - 혜강태자(惠康太子)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혜강대왕(惠康大王)에 추봉, 부인은 혜강태후
      • 손자 : 헌정(憲貞) - 익성대왕(翌成大王)에 추봉, 부인은 성목태후(聖穆太后)
        • 증손 : 제륭(悌隆) - 헌정의 아들로 836년희강왕 즉위
      • 손자 : 균정(均貞) : 성덕대왕(成德大王)에 추봉, 부인은 헌목태후(憲穆太后)
      • 손녀 : 귀승부인(貴勝夫人) : 헌덕왕(憲德王)의 부인
    • 딸 : 대룡부인(大龍夫人)
    • 딸 : 소룡부인(小龍夫人)

참고

 

 

 

 

제38대 원성왕 실록

( ? ~ 798년, 재위기간 : 서기 785년 정월~ 798년 12월, 13년 11개월)

 

1. 폭우 덕에 왕위에 오른 원성왕과 계속되는 재난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 손으로 김효양과 계오부인 사이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경신이다.

 

혜공왕 말기에 이찬 지정이 친위혁명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이 반혁명을 일으켜 지정과 싸웠다. 경신은 이때 양상을 도와 지정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다. 그 덕분에 그는 김양상(선덕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죽자 측근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선덕왕이 죽고 난 뒤에 신하들이 원래 왕으로 추대한 인물은 선덕왕의 족질인 김주원이었다. 당시 주원은 서라벌 도성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왕위 등극의 연락을 받은 주원은 서러벌로 출발하려 하였으나, 그 때 마침 엄청난 폭우가 내려 주원은 불행히도 알천을 건너갈 수가 없었다.

 

주원이 발을 구르며 알천의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조정은 묘한 분위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상대등 경신의 측근들이 중심이 되어 주원의 왕위 계승을 취소하고 경신을 왕위를 잇게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측근들이 그 논의를 촉발시킨 논지는 이랬다.

 

"임금이라는 중책은 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닌데, 오늘 폭우가 내리는 것을 보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물론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경신의 측근이었을 것이다. 또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도 가졌으니, 능히 왕으로 추대할 만하다."

 

결국 조정의 대세는 경신을 왕으로 추대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비가 그치고 알천의 물이 줄어든 후에, 주원은 그 소식을 듣고 통탄했지만, 이미 결정된 일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이때가 서기 785년 정월이었다.

 

원성왕이 왕위를 오를 당시 그에게는 손자가 여럿 있었다. 이는 경신이 연로한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던 폭우 덕분에 왕위에 오른 원성왕은 병부령 충렴을 상대등으로, 이찬 세강을 시중으로 임명하여 국사를 꾸렸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순탄하지 않았다. 하늘이 거의 매년 천재를 안겼기 대문이다.

 

천재는 그의 재위 2년(786년) 4월에 내린 우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동쪽 지방에 내린  우박으로 인해 뽕나무와 보리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7월에는 가뭄으로 이어졌다. 이로인해 백성들은 기근에 허덕였다.

 

원성왕은 9월에 곡식 3만 3천 2백 40석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나, 그것으로도 모자라 다시 10월에 곡식 3만 3천 석을 다시 풀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에 서라벌에 지진이 일어나고, 7월에는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곡식을 갉아먹는 바람에 또 한 차례 흉년이 닥쳤다. 이런 현상은 788년에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서쪽의 곡창지대가 가뭄에 허덕이고, 이어 메뚜기 떼가 창궐했다.

 

계속되는 가뭄과 흉년, 메뚜기 떼의 창궐에 이어 도적 떼까지 극성을 부리자, 원성왕은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거나 국고를 풀어 백성을 구제하는 곳 이외에는 별 뽀족한 수가 없었다. 원성왕은 벽골제를 증축하는 등 가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도 하였지만,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닥치는 가뭄 탓에 골머리를 앓았다.

 

가뭄은 자연스럽게 메뚜기 떼의 창궐로 이어지고, 그것은 또다시 흉년으로 이어져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태로 확대되고, 유랑민과 도적 떼가 늘어나 국정을 흔들어 놓았다. 그 난국을 틈타 791년에 시중을 지낸 이찬 제공이 역모를 획책하다 발각되어 주모자들이 처형되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국정은 더욱 혼란으로 치달았다.

 

거기다 원성왕은 자식 복도 없어, 장남 인겸을 태자로 책봉하였는데 791년 병으로 죽고, 그래서 둘째 아들 헌평을 태자로 책봉하였지만 그도 794년에 병으로 죽어 버렸다.

 

또한 신하들 복도 없어 첯 시중 제공은 임명되자마자 곧 사직하였는데, 아마도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듯하다. 그는 이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791년 반역을 도모하다 처형되었다. 제공의 후임으로 세강을 임명햇는데, 그는 5년 동안 시중 자리르 지켰다. 그러나 790년에 종기를 임명하였으나, 이듬해 준용으로 교체하였고, 준용은 겨우 1년 만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준용의 후임으로 이찬 숭빈을 앉혔으나, 그도 겨우 1년 반 만에 병으로 사직했다. 그 뒤로 잡찬 언승이 2년, 이찬 지원이 1년 반, 다시 아찬 김삼조가 1년 동안 시중에 있었다. 행정부의 우두머리가 이렇게 자주 교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국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다는 뜻이다.

 

원성왕은 이렇게 끊임없이 지속되는 천재와 조정의 혼란 속에서도 확실한 업적 하나를 남겼는데, 바로 '독서삼품과' 설치였다. 당시는 궁술과 명접으로 관리를 뽑았으나 독서삼품과를 설치함으로써 학문의 깊이와 능력에 따라 벼슬을 내리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과목은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 '논어', '효경', '곡례' 등으로 하였다. 이는 과거제의 시초라고 할 만했다.

 

원성왕은 재위 14년인 798년 12월 29일에 죽었다. 왕릉은 곡사에 마련되었다가, 그의 유언에 따라 봉덕사 남쪽으로 옮겨 화장되었다.

 

 

2. 원성왕의 가족들

원성왕은 한 명의 부인에게서 3남 2녀를 얻었다. 부인은 숙정왕후 김씨인데, 각간 신술의 딸이다. 인겸과 헌평, 예영 등의 아들과 두 딸 대룡과 소룡을 낳았다.인겸과 헌평은 차례로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망하였고, 인겸은 혜충이란 시호를 받았고 헌평은 이름이 아니라 시호이며, 그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셋째 아들 예영은 제41대 헌덕왕의 왕비 귀승부인(황아왕후)의 아버지다. 또 제45대 신무왕이 그의 손자이다. 예영의 아들 균정은 흥덕왕이 죽고 난 뒤, 제륭(희강왕) 일파와 권력 다툼을 벌이다 살해되었는데, 그의 아들 우징(신무왕)이 아버지 원수를 갚고 왕위를 차지한다.

 

대룡, 소룡에 대해서는 이름만 전해질 뿐, 구체적인 해적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